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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호] 2018.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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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통신]키케로 편지의 교훈

2000년 전에도 선거판은 진흙탕이었다

권석하  재영칼럼니스트 

▲ 키케로 흉상
지난 5월 3일 치러진 영국 지방의회선거 전 잉글랜드의 한 지방 매체에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들을 위한 ‘선거전략의 지혜(wisdom of election strategy)’라는 글이 실렸다. 요점을 잘 정리해 놓은 듯해서 출마자들에게는 도움이 될 만한 내용들이었다. 일단 간략하게 인용해 보자.
   
   
   1. 무엇보다 선거에는 가족과 주변 친지들의 지지가 가장 중요하다.
   2. 주위에 능력 있는 참모를 두도록 한다.
   3. 평소에 당신에게 신세를 진 사람들로부터 이제 돌려받을 시간이니 모두 동원하라.
   4. 이해와 의견이 다른 폭넓은 지지자 모임을 만들어라.
   5.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약속이라도 하라.
   6. 소통의 기술이 가장 중요하다.
   7. 어떤 이유로든 선거구를 떠나지 마라.
   8. 적의 약점을 잘 파악하라. 그리고 그걸 이용하라.
   9. 체면불구하고 유권자에게 아부하라.
   10. 유권자들에게 온갖 희망을 약속하라.

   
   
   유권자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도 후안무치하지만 세계 모든 나라의 출마자들이 이미 사용하고 있을 듯한 효과적인 전략으로 보인다. 분명 선거에 상당한 내공을 가진 전략가가 만든 지침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 지침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2082년 전인 기원전 64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로마시대의 달변 정치가인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당시 로마 최고권력인 집정관(Roma Consul)이 되기 위한 선거에 출마했을 때 동생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형에게 보낸 편지(Commentariolum Petitionis)의 축약 내용이다. 퀸투스는 58개 항목에 걸쳐 하나하나 자세하게 선거전략을 충고했다. 그렇게 오래전 글인데도 지금 세계 어디에서의 선거전에 사용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현실성이 펄펄 살아있다. 전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감각이다.
   
   결국 이 말은 이 편지가 쓰이고 나서 무려 2082년 동안 인간의 속성은 전혀 변하지 않았고 그에 따른 선거 양상도 완벽하게 동일하다는 말이다. 놀랍다기보다는 인간과 세상에 대해 절망감을 느낄 정도이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세상이 변하지 않았다면 지금으로부터 2082년 이후의 미래 세상도 온전하게 같을 거라 생각하니 정말 모골이 송연해지는 공포감마저 든다.
   
   당시 마르쿠스는 로마에서 유명한 달변가였고 야심만만한 정치가였다. 그는 로마공화국을 지배하는 최고정치가인 2명의 집정관 중 한 명으로 선출되기 위해 출마했었다. 로마공화정은 기원전 510년 왕정을 폐지하고 성립된 이후 450년간 유지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기원전 43년 로마제국 체제로 바뀌기 전까지 공화정은 민회에 의해 선출된 2명의 집정관이 한 달씩 번갈아가면서 1년간 통치하는 체제였다. 독재나 전횡을 막는다는 차원에서는 현대 어느 정치제도보다도 훌륭했다. 그런데 이런 훌륭한 정치제도하에서도 선거는 냉혹하고 비도덕적인 전략이 판쳤나 보다. 오히려 그래야만 당선될 수 있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당선을 위해서라면 소신은 헌신짝?
   
   퀸투스가 형에게 쓴 편지를 영국의 지방 매체는 필립 프리만이 2012년 번역한 ‘어떻게 선거에서 이기는가(How to win an election)’라는 책 서문에 있는 10개의 요점으로만 인용했지만 실제 편지는 더 자세하게 전략을 설명한다. 예를 들면 앞서 소개한 4번 지침 ‘이해와 의견이 다른 폭넓은 지지자 모임을 만들어라’는 이처럼 자세하게 돼 있다. ‘형은 귀족들과의 우호의 관계를 유지하도록 열성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형과 형의 참모들은 그들이 형이 언제나 전통주의자였다고 믿게 만들어야 합니다. 절대 그들이 형이 인기주의에 영합하는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사안에 대해 대중의 편이 되는 의견을 말했을 경우는 이는 단지 폼페이우스의 입맛에 맞는 말을 해서 그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거나 최소한 적으로 만들지 않게 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믿게 하세요.’
   
   당시 지배세력인 귀족과 일반 시민 유권자, 즉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양측 모두에 자기네 편처럼 보이게 하라는 주문이다. 결국 당선을 위해서는 상황에 따라 소신을 헌신짝처럼 버리라는 말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현대의 정치인들도 반드시 필요로 하는 ‘젊은 세대의 지지’가 중요함도 상세하게 설명한다. 편지는 ‘좋은 집안의 젊은이들을 끌어들여 형 지지자로 만들어야 합니다’라면서 이렇게 충고한다. ‘그들은 형이 멋지게 보이도록 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형이 이미 이런 젊은이들을 지지자로 많이 갖고 있다면 형이 얼마나 자기네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알게 해주세요. 그런 젊은이들이 형 주변에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습니다.’ 요즘 정치인들이 청바지를 입고 젊은이들이 추는 춤을 배워 어색하게나마 흉내 내는 모습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또 이런 대목도 나온다. ‘로마 군중들에게 멋진 쇼를 보여주는 걸 잊지 마세요. 물론 품위 있게 해야 하지만 가능한 한 화려한 색깔의 볼거리를 많이 제공해야 합니다.’ 요즘 후보들의 유세현장을 보면 우선 복장부터 원색이고 형형색색의 현수막과 고성능 확성기를 이용한 로고송과 운동원들의 현란한 몸동작이 등장한다. 정말 대단한 쇼를 보여주고 있는데, 로마시대의 쇼도 결코 현대에 뒤지지 않았을 듯하다.
   
   편지는 결국 네거티브 캠페인을 하라고 부추긴다. ‘또한 형의 적인 다른 후보가 얼마나 악당인지를 보여주는 건 절대 형에게 해가 되지 않습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그들의 악행을 들먹여서 오명을 씌워야 합니다. 바로 그들의 범죄와 성추문, 부정부패를 유권자들에게 말해주어야 합니다.’
   
   정말 고소를 금치 못할 양상이 로마광장에서 벌어진 셈이다. 대중매체를 이용한다는 점만 빼면 현대의 선거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바로 지금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선거전의 양상이 바로 2082년 전 로마에서도 벌어졌다는 말이다. 당시 지배계층인 로마 귀족들은 마르쿠스에게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기에 선거 전 예상은 마르쿠스의 낙선이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시골 평민 출신으로 당시로는 ‘흙수저’인 마르쿠스가 당선되자 로마 상류층은 충격에 빠졌다. 지도층의 의도를 대부분 따르던 로마 시중 여론이 독자적인 행동을 한 셈이다. 결국 퀸투스가 편지에서 충고한 진흙탕 선거전략이 먹혀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현재도 유효한 로마시대 선거전략
   
   앞서 강조했지만 로마시대부터 이어져온 이런 선거 전략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통할 수 있는 보편적인 지침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이런 보편적 전략이 잘 먹혀들지 않는 곳이 있다. 바로 필자가 살고 있는 영국이다. 영국 선거에서는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이전부터 진흙탕 선거전략이 잘 통하지 않았다. 우선 영국 선거는 조용하다. 영국 선거의 가장 큰 특징은 가가호호 방문이다. 후보 자신은 물론 선거운동원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유인물을 나눠주고 세대별 정치 성향을 파악해 대화로 한 표를 설득하는데, 사실 이 정도가 선거 유세의 거의 전부다. 선거자금 한도가 엄격해 홍보물마저도 함부로 못 뿌린다. 대중 앞에서의 선거 유세나 스피커를 이용한 가두홍보, 선거벽보, 현수막도 법으로 금지돼 있다. 만약 허용돼 있다고 하더라도 선거자금이 부족하기 때문에 쉽게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대형 스피커가 장착된 유세용 트럭이나 집단군무를 선보이는 운동원들에게 익숙한 한국 유권자들의 눈으로 보면 진짜 딴 세상이다.
   
   선거철 영국에 놀러오는 외국 관광객들은 진짜 선거철인지조차 모를 때도 많다. 선거철이라는 걸 알리는 외형적인 것들이 거의 없고 평상시와 다름없이 조용한 분위기이기 때문에 TV를 보지 않으면 선거가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 수 없다. 이것은 대다수 유럽 나라와도 다른 점이다. 독일이나 프랑스, 이탈리아 같은 유럽 국가들은 선거철이 되면 우리처럼 전신주나 벽에 후보들의 사진이 대문짝만 하게 나붙는다. 물론 영국에서도 각당의 정책을 알리는 대형 선거용 광고판이나 TV 공영 홍보물이 있긴 하지만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요란스럽지 않다. 특히 지난 5월 지방선거에서는 광고판이나 TV 홍보물도 없어서 진짜 선거철인지 아닌지 모르게 조용히 지나갔다.
   
   영국 언론도 선거철이라고 별다른 선거용 기사들을 내보내지 않는다. 흥미를 끄는 대단한 스캔들이 선거에 임박해서 터지지 않는 한 영국 언론은 후보 개인에 대해서는 자세한 보도를 하지 않는다. 영국 유권자들은 언론 매체나 인터넷에 나오는 정치 댓글에도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 댓글 여론의 향방에 따라 자신의 결정을 맡길 정도로 인터넷 여론에 관심을 쏟는 유권자들도 별로 없다. 해서 로마시대 퀸투스의 네거티브 선거전략이 파고들 틈이 전혀 없다.
   
   영국 선거에서는 차라리 상대방 정책의 약점이나 실패를 파고들어 유권자들을 설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를 들면 보수당 정권이 지난 8년간 지속적으로 유지해왔던 긴축정책에 유권자들이 얼마나 지치고 힘들어하는지를 노동당은 계속 광고한다. 사실 긴축재정에 대한 유권자들의 피로감은 이번 지방선거 전에 치러졌던 2017년 조기총선에서 나타난 바 있다. 2017년 4월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는 예정보다 3년을 앞당겨 느닷없이 조기총선을 선언했다. EU와 향후 2년에 걸쳐 진행될 복잡한 브렉시트 협상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보다 안정된 의석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보수당은 조기총선 선언 직전까지 나왔던 ‘보수당 지지율 43%, 노동당 지지율 27%’ 같은 여론조사에 고무된 상태였다. 조기총선을 하면 보수당의 ‘압도적인 승리(landslide winning)’로 100석은 더 확보할 수 있다고 언론과 전문가들은 예상했었다. 당시 보수당은 의회 과반수에서 겨우 6석을 더 점유한 331석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테레사 메이 총리가 자신만만하게 주사위를 던졌지만 결국 희대의 자충수로 판명됐다. 선거 결과 보수당은 기존의 321석에 100석 추가는커녕 무려 13석을 더 잃어 집권을 위한 326석에서도 8석이나 모자라는 대패를 하고 말았다. 반면 노동당은 무려 30석을 더해 262석을 차지했다. 총선 전 당수 지위를 도전받고 있던 제러미 코빈 노동당 당수가 살아난 것은 물론 차기 총선에서 노동당의 집권이 가시화되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결국 보수당은 10석을 보유한 북아일랜드 극우정당과 굴욕적인 연합정부를 세워야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런 예상 밖 선거 결과는 8년 넘게 계속되어온 보수당의 긴축재정에 유권자들이 피곤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노동당의 기민한 선거전략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거기다가 사회복지 축소와 긴축재정에 직접적인 피해를 보고 있던 브렉시트 반대 성향의 젊은이들을 노동당이 끌어들인 것도 주효했다. 자신들이 브렉시트 투표에 참여하지 않아서 브렉시트가 통과되었다고 느낀 젊은이들이 대거 조기총선 투표에 참여했다. 영국 언론에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 긴축재정을 뜻하는 ‘Austerity’와 EU 탈퇴라는 ‘Brexit’ 두 단어가 2017년 조기총선의 결과를 결정한 셈이다. 이렇게 영국인은 후보 개인보다는 후보가 속한 정당의 정책을 보고 투표를 한다. 개인 후보들이 로마시대 퀸투스의 지침을 아무리 충실하게 따른다 해도 대세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 지난 5월 3일 치러진 영국 지방의회선거 투표를 마친 제러미 코빈 노동당 당수. 2022년 총선 승리가 점쳐지고 있다. photo 뉴시스

   영국 역사의 시계추는 우에서 좌로
   
   영국 유권자들이 정당의 정책에 따라 기존에 지지해오던 당을 바꾸기 시작했다는 징표는 지난 지방의회선거에서도 나타났다. 특히 한인 후보자 3명이 출마한 런던 인근 해머스미스와 킹스턴시가 공교롭게도 대표적 지역구로 떠올랐다. 지난 12년간 계속 보수당이 당선되던 해머스미스 지역구의 경우 의원 3명이 모두 노동당으로 바뀌었는데 그중 한 명이 한인 2세 권보라 후보였다. 유럽 교민 100년 역사상 처음으로 한인 후보가 선출직에 당선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대표적 한인 거주지인 킹스턴의 경우도 지난 28년간 계속 보수당이 당선되던 지역구에서 자민당 의원 3명이 다 당선되었다. 한국인 여성 지방의회 의원을 만들겠다고 보수당이 전략공천한 한인 후보는 낙선했다. 다른 한인 하재성 후보는 백인 후보에게 자기 지역구를 뺏기고 당선 가망성이 전혀 없던 옆 지역구로 옮겨서 출마했는데도 당선되는 이변이 벌어졌다. 4년 전 선거에서 1500표로 당선되었던 보수당 후보가 이번에는 800표대로 떨어지고 800표대로 떨어졌던 자민당 후보는 1500표로 당선되었다. 무려 당선표의 50%인 700여표가 움직인 셈이다. 이 표들은 브렉시트 투표 시 반대표와 비슷한 숫자다. 결국 보수 성향의 유권자들이 브렉시트 때문에 보수당과 등졌다는 의미다.
   
   2017년 조기총선과 2018년 지방의회선거 결과는 8년에 걸친 보수당 정권의 긴축재정 정책을 심판하는 선거였다. 바로 이 8년 동안 지방정부 예산은 4분의 1이 삭감되었다. 유권자들이 피부로 긴축을 느낄 만했다. 그렇게 오래 집권하도록 보수당에 표를 몰아줬는데 항상 긴축만 외쳤지 뭘 해놓았느냐는 심판이 두 번의 선거에서 벌어진 셈이다. 보수당 정권은 지방정부에 내려보내는 건강보험 수혜액이나 연금은 줄지 않았다고 변명하지만 유권자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결국 영국 정치도 돈이 말해준다. 유권자는 자신들이 낸 세금이 얼마나 자신에게 유효하게 돌아오는지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런데 유권자들은 보수당 정권 8년 동안 복지혜택이 줄어들기만 했지 자신의 삶이 나아졌다고 느끼지 않았다. ‘충분히 할 만큼 했다(Enough is enough)’는 노동당의 선거 전략이 먹힐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영국 정치학자들이 사용하는 ‘전국 득표 등가 수치(National Equivalent Vote Shares·NEVS)’라는 정치학 산술이 있다. 하원의원 선거 전 수년간 치러진 지방선거 결과를 이용해 차기 하원의원 선거 결과를 예측하는 산술이다. 예를 들어 NEVS 분석에 따르면 1997년의 노동당 집권은 이미 예측된 결과였다. 1993년과 1996년 사이의 지방선거 결과를 대입해 보니 노동당 42.25, 보수당 28.25로 수치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2010년 보수당이 정권을 탈환할 때는 2006년과 2009년 지방선거 결과를 대입한 결과 NEVS 수치가 보수당 39.25, 노동당 24.5로 나왔었다. 낙엽 하나를 보고 천하에 가을이 온 줄 아는 것이 아니라 수차례의 지방의회선거 결과를 보고 수년 뒤에 치러질 총선을 예측한다는 말이다. 이런 과거 사례는 결국 2022년 총선에서 지금의 노동당 당수 제러미 코빈이 영국 총리가 되고 영국 철도를 비롯한 거대 공공서비스 기관들이 다시 국유화되는 천지개벽이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영국 역사의 시계추는 이제 우에서 좌로 가고 있다. 이 추세는 퀸투스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되돌리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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