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 2010년 총선 승리를 이끌며 총선 3연패에 빠졌던 보수당을 구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 2010년 총선 승리를 이끌며 총선 3연패에 빠졌던 보수당을 구했다.

영국 보수당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이자 가장 성공한 정당으로 평가받는다. 그런 보수당의 부침사를 보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장기집권으로 인한 오만으로 몰락한 후 오랜 기간 권력 근처에도 못 가 보다가 어느 날 환골탈태하여 화려하게 재등장하곤 했다. 정당이 선거에서 한 번 패했다고 완전히 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영국 보수당만큼 잘 보여주는 정당이 없다.

근대 영국 역사의 주역은 단연 보수당이다. 1874년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보수당이 예상외의 선전으로 압승을 거둔 이후 1997년 존 메이저 총리의 보수 정권이 44세의 신예 토니 블레어가 이끌던 노동당에 처절하게 참패할 때까지 123년 동안 무려 84년을 집권했다. 권불십년이란 말이 무색하게 영국 보수당은 20세기 들어서도 마거릿 대처의 11년을 비롯해 57년을 집권한 대단한 정당이다.

보수당이 가장 혹독한 시기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 토니 블레어를 만나면서였다. 블레어 노동당에 한 번 권력을 뺏기고 나서는 내리 3번의 총선에서 패해 13년간 권력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는 참담한 일을 겪었다. 2005년 총선에서 블레어 노동당에 355석 대 198석으로 세 번째 패했을 때 ‘잉글랜드 보수당의 이상한 죽음(The Strange Death of Tory England)’이라는 책이 나와 화제를 모은 적이 있었다. 요즘같이 보수당이 부진할 때면 영국 언론이 지금도 인용하는 책이다. 저자 제프리 휘트크로프트는 이 책에서 보수당의 신세를 1922년 이후 한 번도 집권하지 못하다가 어느 날 사라져버린 자유당의 운명과 비교해 예리하게 분석했다. 휘트크로프트는 당시 보수당이 잉글랜드 북부·중부·서부에서 의석을 잃어버리고 잉글랜드 동남부 지역에서만 간신히 지지 기반을 유지하고 있음을 들어 ‘동남부 정당(South East Party)’이라고 비꼬았다. 보수당이 되살아나려면 원래 보수당의 가치를 찾아 더 보수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렇게 혜안이 담긴 내용은 아니었지만 제목 하나만으로도 화제가 된 책이었다.

영국 정당史의 교훈

토니 블레어 전 총리. 1997년 총선에서 노동당 100년 역사상 최대의 압승을 거두며 보수당 집권 18년을 끝냈다.
토니 블레어 전 총리. 1997년 총선에서 노동당 100년 역사상 최대의 압승을 거두며 보수당 집권 18년을 끝냈다.

당시 보수당은 암울한 상황이었지만 한심한 정당은 절대 아니었다. 보수당은 마거릿 대처가 당수가 된 1975년부터 준비를 해서 4년 뒤인 1979년 총선에서 승리한 후 18년간 장기 집권한 저력의 정당이었다. 보수당 집권 18년, 특히 대처 집권기 11년은 역사가들이 ‘현대 보수당의 탄생 시기였다’고 평가할 정도로 대단한 업적을 냈었다. 대처가 실각한 지 28년, 세상을 떠난 지 5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걸핏하면 ‘대처의 아이(Tatcher’s Kids)’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처가 남긴 그림자는 크고 길다. 역설적이게도 대처 이후 집권한 노동당 당수 토니 블레어도 1대 대처 키즈라고 불릴 정도다. 뒤를 이어 보수당의 중흥을 불러일으킨 데이비드 캐머런이 2대 대처 키즈, 그 뒤를 이은 두 번째 여성 총리인 현 테리사 메이가 3대 대처 키즈로 불린다.

대처의 보수당은 전임 노동당의 실정으로 인한 ‘불화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1978~1979)’을 거치면서 지쳐버린 유권자들의 지지로 집권했다. 하지만 ‘영국병(British Disease)’을 강력한 리더십과 남다른 자본주의 철학으로 치유해 영국을 다시 살렸다는 평가를 받던 대처도 결국 장기집권에서 오는 오만, 그로 인한 내부 반란으로 무너졌다. 대처는 유권자들에게 인기가 없던 인두세(人頭稅)를 밀어붙이다가 곤두박질치는 인기도에 위기를 느낀 보수당 의원들이 당수 신임 투표를 통해 끌어내릴 지경에 이르러서야 물러났다. 거기서 보수당은 깊은 내상을 입었으나 1992년 총선에서 11석을 더 얻어 과반수로 다시 5년을 집권하는 데 성공했다.

노동당은 보수당 집권 18년간 와신상담하며 전열을 정비하다 1997년 노동당 100년 역사상 최대의 압승을 거두면서 집권한다. 하원 총 의석 659석 중 무려 63.4%(418석)를 차지하는 전대미문의 승리였다. 반면 165석만 건진 보수당은 1906년 이후 91년 만에 최악의 패배를 맛봤다. 잉글랜드에서만 의석을 확보하고 웨일스, 스코틀랜드에서는 한 석도 못 건져 정말 ‘동남부 지역당’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동안 ‘별 요구 없이(undemanding)’ 항상 과반수 지지를 보내던 보수당 지지층들이 하루아침에 돌아서버린 결과였다.

당시 노동당의 압승은 독직사건, 성추문, 실정 등으로 인한 보수당 자멸의 결과였긴 했지만 노동당이 아무런 노력 없이 승리한 건 아니다. 총선 3년 전인 1994년 당수로 취임한 41세 토니 블레어는 노동당 역사상 가장 젊은 당수여서 총선 전부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진정성이 풍기면서도 냉소적인 분위기의 멋진(brilliant cynical sincerity)’ 이미지로 TV를 비롯한 미디어 총아로 등장해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블레어는 취임하자마자 바로 노동당 개혁을 시작한다. 당시 노동당은 줄어들고만 있던 노동자나 공영주택 주민들과 같은 전통의 지지층에만 매달려 있었다. 또 대처의 국영기업 민영화와 공영주택 사유화 등으로 ‘착시현상의 노동계급 중산층(middle class illusion working class)’이 급속도로 늘고 있는 현상을 무시하고 있었다. 노동자 계층이 중산층으로 변해가고 있던 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중산층 계급 노동자들은 고율의 세금과 이자를 주장하는 노동당 정책을 자신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적(敵)으로 보고 있었다. 결국 새 정책과 새 얼굴이 필요하던 순간에 블레어가 마치 구세주처럼 등장했고, 놀랍게도 당시 당 권력을 잡고 있던 중진들과 평당원들 역시 시대 변화에 맞추어 블레어에게 당 개혁을 맡겼다.

블레어는 승리를 위해 100년 동안 자신들을 믿고 밀어준 동지들을 제일 먼저 배반하는 개혁을 한다. 바로 노동당 내의 노동조합 영향을 줄이는 작업부터 시작한 것이다. 우선 노동조합이 조합원을 대표해서 무더기로 하던 대리투표를 실제 한 명이 한 표만 행사하도록 당헌을 개정했다. 노동당이 창당 이후 지켜오던 가장 중요한 당헌인 ‘거대기업 국유화’ 조항도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감히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혁명 같은 발상이었다. 이미 블레어는 당수가 되기 2년 전부터 공개적으로 ‘거대기업 국유화’ 조항의 삭제를 주장하고 다녔다. 아무리 중요한 당의 정신이라도 시대가 요구하면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 두 가지 개혁은 노동당의 근간을 흔드는 대작업이었지만 결국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만들었다.

블레처리즘의 승리

블레어는 당 정책을 좌에서 중간으로 옮기는 작업도 겸했다. 대처 정부에서 진행된 국유기업 민영화, 독립적인 중앙은행 유지, 기업가 정신, 능력 위주 사회, 공영주택 사유화 같은 정책을 되돌리지 않고 더 발전시키겠다는 정강을 채택했다. 바로 블레어가 제창한 ‘신노동당(New Labour)’의 ‘제3의 길(The 3rd Way)’이다. 쉽게 말하면 기존의 노동당 정책에 보수당 정책을 접목해 좌도 우도 아닌 중도좌파를 만들어 버린, 말 그대로 비빔밥이다. 심지어 블레어는 사회주의를 ‘Socialism’이 아니라 ‘social-ism’이라고 변형해서 부르기도 했다. 사회주의는 문자 그대로 인간 사이의 사교(social)를 가리키는 말이라며 원래 뜻을 바꿔버린 것이다.

블레어는 노동당을 좌파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 자본주의와 타협하는 중간지대에 존재하는 당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했다. 노동당을 노동자 계급의 당으로만 여겨 태생적으로 보수당을 지지하던 중산층을 지지층으로 끌어들였다. 그 이후 중산층은 보수당과 노동당 지지자들로 양분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의식 있는 중산층이 서민과 노동자의 당이었던 노동당의 지지자가 되는 역사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다.

블레어는 노동당 개혁을 당수가 된 지 1년 만인 1995년 달성했다. 정말 전광석화 같은 속도였다. 기세를 몰아 당수가 된 지 3년도 채 안 된 1997년 5월 9일 드디어 집권에 성공한다. 1994년 블레어가 당수 취임사에서 “다음 총선에서는 반드시 집권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블레어 말고는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블레어의 중도우파적 정책에 제일 당황한 것은 보수당이었다. 자신들의 정책을 ‘훔쳐다가 재포장(steal and repacking)’해서 ‘신노동당(New Labour)’이라는 신상품으로 시장에 내놓아 소비자인 유권자를 유혹하는 데 성공했다고 여겼다. 결국 정치판의 중간지대를 놓고 보수당과 노동당이 대전을 벌인 끝에 노동당이 승리했다. 사람들은 블레어와 대처를 합친 ‘블레처리즘(Blatcherism)’이 노동당 승리를 불러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젊은 백기사의 등장

보수당은 이렇게 해서 전통적인 ‘놀이터’였던 중원마저 노동당에 뺏긴 채 내리 3번의 총선에서 처절하게 패했다. 보수당은 블레어가 뺏어간 대처리즘을 찾아오지도 못하고 새로운 철학도 만들지 못한 상태에서 긴 어둠을 헤맸다. 도저히 어떻게 해볼 방법이 안 보일 때였다. 바로 그때 보수당에는 9년 전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같은 ‘39살의 잘생긴 젊은 백기사(young, handsome white knight)’ 데이비드 캐머런이 나타났다. 당시 캐머런은 일반인들에게는 물론 보수당 일반 당원들에게마저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지 않던 인물이었다. 의원이 된 지 고작 5년밖에 안 되었고 재선의원이 된 지도 6개월이 좀 넘었으니 그럴 법도 했다. 영국 하원의원은 현재 650명이나 되어 초선은 물론 재선이라도 임기 내내 언론에 이름 한 번 오르기 힘들다. 의회는 물론 당내에서조차 발언 기회를 얻기도 힘들다.

그런 영국 정당에서 햇병아리 취급을 받을 경력과 나이의 캐머런이 당수에 도전한 것이다. 그는 총선에서 내리 3번째 패한 마이클 하워드 당수가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바로 당수 출마를 선언한다. 캐머런은 처음에는 주목을 못 받았지만 당수 출마 선언 한 달 뒤 열린 전당대회에서 연설문 하나 없이 열정적이고도 인상적인 연설을 해서 당원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빠뜨렸다. 이때의 당수 라이벌이던 데이비드 데이비스는 캐머런보다 18살이 많았고 연설도 인상적이지 못해 바로 캐머런에게 밀렸다. 젊고 미남형에다 박력까지 갖춘 캐머런은 결국 데이비스보다 두 배가 넘는 득표(13만4446표 대 6만4398표)를 하고 당수로 당선된다. 사실 캐머런의 당선은 2001년에 있었던 당수 선출 방법이 바뀌어서 가능했다. 그전에 하던 식으로 하원 의원총회에서 결정되고 말았다면 당선될 리가 만무했지만 일반 당원 투표로 당수를 뽑기로 하면서 캐머런 같은 신인이 혜성처럼 떠오를 수 있었다.

1950년대 300만명에 달하던 보수당 당원은 당시 25만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당원 중 78%라는 숫자가 투표에 참여하는 열성을 보였다. 당 중진과 대결한 신인이 평당원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당선된 셈이다. 거의 당수를 외부에서 영입해왔다고 했을 정도로 ‘깜짝 등장’이었다. 언론과 국민들에게도 놀라운 소식이어서 새 스타의 탄생에 관심이 집중되어 각종 미디어의 각광을 받았다. 정치가 한바탕의 쇼라면 일단 보수당의 의도는 성공한 셈이었다. 당시 유권자들은 8년 동안 5번 당수가 바뀔 정도로 혼란에 빠져 있던 보수당을 무기력한 당으로 보고 있었다.

신인 캐머런의 깜짝 등장

정말 혜성처럼 나타난 캐머런은 당수가 된 이후 토니 블레어처럼 보수당의 모든 걸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실제 그렇게 바꾸었다. 그는 “보이는 것,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을 모두 바꾸자”고 외쳤다. 보수당이 지금 우측에 치우쳐 있다면 중도우파로 가야 하고, 중도우파라면 완전 중도까지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전통 보수당원들은 캐머런을 좌파라고 비난했다. 실제 캐머런의 정치 성향은 전통적인 보수당원들의 눈으로 보면 좌파적이었다. 당시 보수당 내에서는 ‘사회정의(social justice)’라는 단어조차 금기어였을 정도로 보수적인 분위기가 강했다. 하지만 캐머런은 백인 중산층 위주의 기존 틀을 벗고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젊은 보수 유권자와 소수민족 유권자까지 끌어들여 보수당이 새로 태어나다시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캐머런은 “기존의 보수당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아예 기존의 당을 해체하는 수준까지 간 뒤 새로운 당을 만들어야 한다(Not just mend but create after killed)”고 주장했다. 여성을 더 참여하게 하고, 환경에 보다 더 신경을 쓰고, 보통 시민들이 친근하게 느끼는 정당을 만들겠다고 했다. 현대적이고 열정적인 보수를 지향하고, 행복과 복지를 위한 정치에 중점을 두겠다고도 했다. 정부 정책에 무조건 반대가 아니라 사안에 따라 찬반을 갈라 협조할 일은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를 두고 진보 언론의 대표인 가디언과 인디펜던트 같은 신문들도 캐머런의 보수당을 ‘진보적인 보수(progressive conservatism)’ ‘진짜 보수 같지 않은 보수(no right wing enough right)’라고 호평하기 시작했다. 물론 당내 일부에서는 ‘원칙이 없는 정치적인 기회주의자’이자 ‘엘리트주의자’라는 혹평도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토니 블레어가 좌편향의 노동당을 우측으로 끌어내어 집권했듯이 이제는 캐머런이 좌파 정책을 빌려와 보수당을 중도우파로 만들었다. 오른쪽 코너에 몰려 있던 보수당을 노동당이 놀고 있던 중간지점으로 끌어내 중원에서 일전을 벌이기 시작한 셈이다. 거기다가 캐머런은 TV 방송 일을 한 경험이 있어 미디어의 생리와 영향력도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홍보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심지어는 전당대회 날 하루에 옷을 네 번이나 갈아입기도 했다. 언론이 ‘캐머런이 아니라 카멜레온’이라고 빈정댈 정도였다.

마침 노동당의 상황도 캐머런에게는 너무나도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대처와 똑같이 장기집권에서 오는 오만과 독선에 빠져 있었다. 이라크전쟁 참여에 대한 책임을 묻는 당내 반란으로 총선을 3년 남겨둔 2007년 6월 블레어가 사임하고 고든 브라운이 당수 겸 총리로 취임하는 혼선을 겪고 있었다.

보수 같지 않은 보수의 성공

바로 이 시점부터 보수당은 여론조사에서 노동당을 차츰 앞서기 시작했다. 2006년부터 2007년 사이에 완만하게 상승 곡선을 타던 보수당의 인기도는 2008년 5월 여론조사에서 노동당을 무려 26%포인트 차로 앞서가기 시작했다. 1968년 이후 최고의 지지율이었다. 2008년에는 노동당의 철옹성이던 런던에서마저 보수당 시장인 보리스 존슨이 당선되는 이변이 벌어졌다. 보리스 존슨은 1981년부터 런던을 지배하던 노동당 극좌파 시장 캔 리빙스턴을 이기고 당선됐다. 그 이후 2010년 5월 총선까지 거의 3년간 보수당의 인기도는 최소 10%포인트 정도 노동당을 앞서갔다. 2010년 총선에서 과반수(326석)에서 20석이 모자라는 306석을 얻는 데 그쳐 자유민주당과 연합정권을 세워야 했지만 어찌되었건 1997년 실권 이후 13년 만에 집권을 했다. 독단을 버리고 신세대 사고에 맞춰 정책을 내세운 젊은 당수가 결국 유권자 설득에 성공한 셈이다. 캐머런이 집권할 때의 나이는 44세로 블레어 집권 때보다 6개월이 더 빠른 가장 젊은 총리였다.

캐머런은 2015년 총선에서 다시 집권을 했다. 1992년 이후 첫 단독 집권 성공이었다. 총선에서 집권당이 의석 수를 늘린 것은 1900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기도 했다. 당시 캐머런이 펼친 정책은 과거의 보수당이면 생각할 수도 없었던 동성결혼 허용 등 파격적인 것들이었다. 캐머런은 2016년 브렉시트 투표 통과에 책임을 지고 물러났지만 보수당을 완전히 현대적인 당으로 만들어놓았다는 칭찬을 지금도 받고 있다.

이렇게 보면 노동당과 보수당이 앞이 보이지 않는 위기에 처했을 때 혜성처럼 나타난 지도자는 공통점이 있다. 새로운 생각을 가진 젊은 지도자들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이는 대서양을 마주하고 있는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존 F. 케네디, 빌 클린턴 등이 다 새로운 사고로 무장한 젊은 지도자들이었다. 공화당으로부터 정권을 뺏어온 케네디 대통령이 민주당을 구할 때가 44세였다. 그러고 보면 블레어, 캐머런, 케네디가 집권할 때가 우연히 모두 44세였다. 클린턴 대통령만 이보다 조금 많은 47세에 집권했다.

영국 하원. 지금 영국도 보수당 지지율이 바닥을 기면서 2022년 총선에서 보수당 참패가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photo 뉴시스
영국 하원. 지금 영국도 보수당 지지율이 바닥을 기면서 2022년 총선에서 보수당 참패가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photo 뉴시스

수줍은 보수? 창피한 보수!

영국에는 ‘샤이 토리(shy Tory)’라는 단어가 있다. 해석하면 ‘수줍어하는 보수’라는 말이다. 여론조사에서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밝히지 않는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이다. 영국인들 사이에서는 ‘좌파는 외향적이고 우파는 내성적이다. 그래서 보수 성향의 사람들은 자기편 사람들에게만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는 말도 있다. 이 말은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보수 지지자임을 선언하는 일은 사회적인 자살행위’라는 말과도 통한다. 어찌 보면 ‘수줍다(shy)’라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창피하다(shamefaced)’란 뜻이 정확하다고 할 정도로 현재 영국에서도 젊은이들은 보수를 싫어한다. 대처 보수정권과 뒤이은 캐머런-메이 정권에서 서민들을 힘들게 하는 정책을 너무 많이 펼쳤다는 이유 때문이다. 심지어 ‘보수는 악마(evil Tory)’라는 통념도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퍼져 있다. 현재 영국에서도 보수가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어 2022년 치러질 총선에서 보수당의 참패가 기정사실화돼 있다.

앞에서 얘기한 ‘잉글랜드 보수당의 이상한 죽음’은 앞이 보이지 않던 2005년 당시 보수당의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하면서 아래와 같은 훈수로 거의 300쪽에 이르는 책의 끝을 맺고 있다. 딱 지금의 영국과 한국 보수에 하는 말 같다.

“보수당 사람들은 지난 몇 년간 모두가 둘러앉아 ‘언젠가는 우리가 (집권당으로) 돌아간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돌아가야 하는 일이 왜 반드시 언젠가 일어나야 하는지에 대한 합당한 이유를 그들은 말하지 않는다. 어떤 역사의 법에도 한 정당이 반드시 살아 남아야 한다는 조항은 없다. 1906년 자유당은 선거에서 최대의 압승을 했다. 그리고도 10년도 채 안 되어 정당으로서의 존재를 완전히 상실할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 이후 한 번도 집권을 해보지 못하고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 보수당의 운명이 자유당과 같이 될지 여부는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겸손과 능력에 달려 있다.”

‘어떤 역사의 법에도 한 정당이 반드시 살아 남아야 한다는 조항은 없다(No law of history says that any political party has to survive)’는 문장을 다시 읽어보면서 시대와 불화를 일으키는 정당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역사의 진리가 섬뜩하게 다가오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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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하 재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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