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주간조선 로고

상단주메뉴

  • [포커스] 위대한 화해들…그들은 어떻게 ‘과거’에서 ‘미래’로 나갔나
  • kakao 플러스친구facebooktwiteryoutube
  • 검색
  1. 세계
[2518호] 2018.07.30
관련 연재물

[포커스]위대한 화해들…그들은 어떻게 ‘과거’에서 ‘미래’로 나갔나

권석하  재영칼럼니스트 

▲ 1998년 4월 10일 북아일랜드 평화협정에 사인한 후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오른쪽)와 베티 아헨 아일랜드 총리(왼쪽)가 조지 미첼 미 상원의원(가운데)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이 평화협정으로 영국과 아일랜드는 오랜 세월 쌓인 증오와 적대감을 털어내고 평화와 공존의 길로 나섰다. photo APㆍ뉴시스
세상이라는 공간에 역사라는 시간이 거쳐가다 보면 원한이 쌓이기 마련이다. 원한 중에서 가장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사랑하는 가족을 누군가가 해치는 일이다. 해서 ‘부모를 죽인 원수와는 하늘을 같이 할 수 없다’는 ‘부지수 불여공대천(父之讐 不與共戴天)’이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사람들을 용서하고 서로 화해한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 것도 이 세상이다.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이런 기적 중 하나가 1995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있었던 진실화해위원회(The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TRC)의 활동이다. TRC는 1994년 백인 통치로부터 벗어난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에 취임한 넬슨 만델라가 1948년부터 46년간 백인 정권이 자행한 인종차별 범죄의 진실을 밝혀내고자 만든 남아공 정부기관이었다. 위원회는 진실 규명을 통해 피해자와 가족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흑백 간의 화해를 이루어 공화국의 미래를 같이 설계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남아공의 기적
   
   위원회의 대장정은 먼저 가해자가 위원회에 출석해 피해자 본인 혹은 가족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저지른 모든 범죄를 하나도 숨김 없이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피해자는 가해자가 없어도 법정에 와서 자신의 경험을 증언할 수 있었고, 가해자도 피해자 없이 증언이 가능하게 했다. 이후 사면을 신청하면 위원회는 사면을 허가할 수도, 거절할 수도 있었다. 주로 사면 대상은 공무수행 중 인종차별이나 인권침해 범죄를 저지른 경찰관, 군인, 공무원 등이었다. 개인적 범죄는 사면되지 않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인종차별을 해온 백인 정부의 범죄가 하나하나 밝혀졌다. 이런 절차가 없었다면 결코 알려지지 않았을 인권 침해, 살인, 폭력, 기만, 위증 같은 엄청난 범죄들이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가해자와 피해자의 증언은 생방송 중계되어 세계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1996년과 1998년 사이에 2만1000명의 피해자들이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증언을 했다. 가해자 7112명이 증언하고 사면 신청을 했으나 그중 5392건은 사면이 거절되었고 849건만 완전 사면을 받았다. 사면을 받지 못하고 형사처벌까지 받은 사례는 300여건. 1998년 7월 31일 위원회는 그때까지의 결과를 3500쪽 분량의 보고서에 담아 제출하고 활동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5392명의 가해자 중 형사처벌을 받은 300여명을 제외한 5000여명이 정의의 심판대에 서지 못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이로 인해 위원회 활동 자체가 실패했다는 비판의 소리가 대단히 높았다.
   
   그러나 진실화해위원회의 원래 목적은 처벌이 아니었다. 과거에 저질러졌던 각종 범죄의 진상을 밝혀내어 이를 역사에 기록하자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었다. 이를 통해 비슷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위원회 설립의 또 다른 목적 중 하나는 자신과의 화해였다. 엄청난 일을 당했던 피해자들은 자신의 피해를 어디에서도 말해 본 적 없이 가슴속에만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한 많은 증언을 세상이 들어줌으로써 피해자는 상처를 치유하고 인성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런데 숨은 세 번째 목적이 더 놀랍다. 위원회의 목적과 목표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았으나 위원회는 가해자의 인성 회복도 목표로 했었다. 가해자도 공개법정에서 자신의 범죄를 증언함으로써 범죄를 숨긴 채 평생 안고 가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인성을 회복하게 되었다.
   
   과거의 어떤 조사위원회도 TRC와 같은 사려 깊은 목적을 갖고 있지 않았다. TRC가 이전의 어떤 전범재판이나 진상조사재판보다 인간적인 절차였다고 칭찬받는 이유다. 2차대전 후 나치 전범 치죄의 뉘른베르그 재판이 징벌정의(retributive justice)의 절차였다면 TRC는 회복정의(restorative justice)의 재판이었으니 한 수 위였다. 1차대전 전후 처리가 독일을 다시 재기하지 못하게 하는 처벌식 배상에 치중한 데 비해 2차대전 전후 처리는 독일의 부흥에 중점을 두어서 더 깊은 의미를 가졌던 것과 비슷하다. 2차대전 전후 처리 정신을 TRC가 승계한 셈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창설 당시만 해도 전대미문의 혁명적 발상으로 여겨졌다. 세계 역사상 한 번도 있지 않았던 시도였기 때문이다. 성공 가능성에 대한 수많은 회의와 의심에도 불구하고 TRC는 결국 성공을 거뒀다. 당초 목표가 완벽하게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만큼은 다른 아프리카 흑인 국가들의 독립과정에서 있었던 백인을 향한 보복성 유혈폭동은 물론 재산이나 토지 몰수, 강제추방 등이 없었다. 남아공에서는 주변 국가들(짐바브웨·잠비아·앙골라) 같은 경제 파탄이나 유혈 내란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후 남아공 TRC의 성공사례는 브라질, 캐나다, 콜롬비아, 칠레 등과 같은 나라들에도 전파되어 과거와의 화해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되었다.
   
   
   북아일랜드의 기적
   
   필자가 살고 있는 영국의 역사에도 도저히 이룰 수 없을 것 같던 화해의 역사가 있다. 가장 최근의 사례가 바로 북아일랜드 평화협정이다. 북아일랜드 사태는 결국 종교와 인종 전쟁이었다. 연합주의파(Unionists)·왕당파(Loyalists)로 칭해지는 개신교도(Protestant) 영국인과, 민족주의파(Nayionalists)·공화파(Republicans)로 불리는 가톨릭교도(Catholic) 아일랜드인 사이의 유혈분쟁이었다. 아일랜드는 1921년 독립 이전까지 역사상 한 번도 제대로 된 국가를 가져보지 못했다.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이웃 영국의 부단한 침략 때문이었다. 아일랜드 독립 때도 북아일랜드 6개 주의 영국인들은 독립 아일랜드공화국에 속하지 않고 영국에 남아 있길 원했다. 여기서 불행의 씨앗이 뿌려졌다. 이들 6개 주 영국인의 숫자는 전체 주민의 과반수를 넘었다.
   
   북아일랜드 6개 주에 살던 가톨릭교도 아일랜드인들은 심한 차별 탓에 집도 직업도 갖기 힘들었고 빈곤의 늪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개와 흑인과 아일랜드인은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북아일랜드 영국인 상점에 붙어 있을 정도였다. 아일랜드 주민들 사이에서 쌓여오던 불만이 1960년대에 들어 폭력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양측이 무기를 들기 시작한 1970~1980년대에는 결국 전쟁에 가까운 유혈사태가 일상사로 벌어졌다. 수많은 군인, 경찰은 물론 시민들이 죽고 다쳤다. 특히 그중에도 1972년 1월 30일 벌어진 ‘피의 일요일’은 최악의 유혈사태였다. 당시 평화적인 아일랜드인 시위대를 향해 영국군이 총격을 가했다. 1919년 1월 영국을 상대로 독립을 선포한 이후 벌어진 3년간의 독립전쟁에서 죽은 1400명에다가 ‘더 트러블(The Trouble)’로 불리는 30년(1969~1997년)간의 유혈분쟁으로 결국 3524명의 아일랜드인이 사망하고 4만7541명이 부상을 입었다. 정말 피로 쌓아올린 원한을 서로 해소할 방법이 없었다.
   
   사실 아일랜드인들의 마음속에는 북아일랜드 유혈사태도 사태지만 영국을 향한 뿌리 깊은 증오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과거 ‘감자대기근’으로 인한 인종 청소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증오심이었다. 18~19세기 두 번에 걸친 대기근으로 아일랜드에서는 거의 200만명이 굶어죽었는데 당시 영국이 이를 방치했다는 것이 아일랜드인들의 생각이었다.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깊은 역사의 골이 두 민족 사이에 오랜 세월을 두고 겹겹이 쌓인 셈이다.
   
   이 깊은 원한을 해결한 것이 1997년 총선에서 승리해 집권한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였다. 그는 북아일랜드 사태 해결에 자신의 정치 생명을 걸었다. 총선에서 승리한 지 딱 한 달 뒤인 1997년 6월 2일 북아일랜드 수도 벨파스트부터 방문했다. 블레어 총리는 연례행사로 열리던 감자대기근 추모음악제에 참석해 150년 전 대기근 때 영국의 불충분한 지원으로 200만명의 아일랜드인이 숨진 것에 대해 공식 사과를 했다. 그는 이를 시작으로 아일랜드와 화해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2년간의 지루하고 복잡한 협상을 통해 거의 30년에 걸친 유혈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결코 쉽지 않은 협상이었고 과정이었지만 양측 모두 더 이상 유혈대치를 끌면 안 된다는 절대명제를 공동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드디어 1998년 4월 10일 부활절 성금요일에 역사적인 평화협정 조인식이 이뤄졌다. 이 협정안은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공화국을 비롯한 아일랜드 모든 가정으로 우송되었다. 5월 22일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아일랜드 공화국민은 56%가 투표해서 94%가 이 협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북아일랜드인들은 81%가 투표해 71%가 찬성했다. 어느 정도 불만이 있던 양측 정파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할 정도의 압도적 지지였다. 이렇게 양쪽 국민이 앞으로 어떤 형태의 유혈 사태도 원치 않는다고 확실하게 표현을 한 덕분에 현재까지도 북아일랜드에서는 평화가 유지되고 있다.
   
   협상안에는 여러 가지 조항이 있었지만 가장 난항을 겪은 내용은 각종 테러범 처리 문제였다. 협상 당시 양측 모두 형을 살고 있는 테러범들이 있었는데 이들에 대한 처리는 서로의 입장이 극명하게 달라 합의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예를 들면 각종 테러로 유명했던 IRA(Irish Republican Army· 아일랜드공화국군)는 자신들이 독립전쟁을 수행하던 군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전쟁이 끝나면 무조건 석방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영국 정부나 신교도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군인이나 경찰, 심지어 무고한 민간인들을 살해한 테러범을 풀어준다는 것이 보통의 일이 아니었다.
   
   
   부모 살해를 용서한 영국의 왕들
   
   결국 평화를 위한 대의의 입장에서 협정 당시 재판을 받고 형을 살고 있던 모든 기결수를 석방한다고 합의가 이뤄졌다. 그 결과 기결수 428여명이 석방되었는데 그중 143명은 무기수였다. 테러범에 의해 사랑하는 가족이 살해당한 피해자 가족이나 부상을 입은 당사자는 참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협상 주도자인 블레어 총리마저도 “폭파범이 영웅처럼 석방되는 걸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블레어는 “평화가 없이는 결국 살인이 계속될 것이고 그 평화는 이런 참을 수 없는 희생과 양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했다. 또 “평화는 타협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Peace can only be attained through compromise)”면서 “신뢰와 선의(trust and goodwill)만이 어렵게 얻은 평화를 지켜갈 수 있다”고 했다. 당시 한 언론은 사설을 통해 ‘어떤 이유로든 살인자들이 석방되는 걸 누구도 좋아하지 않지만 우리 모두가 애써 무시했던 비극을 더 이상 만들지 않으려면 모두가 참아낼 수밖에 없다”고 평화안을 지지했다.
   
   사실 피 어린 구원(舊怨)을 양보와 타협을 통해 국가적 화합으로 승화시킨 사례는 영국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엘리자베스1세, 제임스1세, 그리고 찰스2세가 집권 후 자신의 부모를 죽이는 데 가담한 자들을 치죄하는 과정에서도 적을 용서하고 과거를 세월 속에 묻은 사례를 볼 수 있다. 이런 영국의 화해와 용서의 역사가 증오가 켜켜이 쌓였던 북아일랜드 사태 해결로도 이어진 것인지 모른다.
   
   우선 엘리자베스1세로부터 시작해보자. 엘리자베스는 집권 후 아버지 헨리8세의 두 번째 부인이자 자신의 생모인 앤 볼린을 누명 씌워 죽이는 재판에 찬성한 27명의 귀족 중 주동자 서너 명만 파직으로 처벌했다. 나머지는 일시 좌천을 시켰다가 다시 불러들여 오히려 충복으로 만들었다. 이들로 하여금 충성을 하면서 두고 두고 빚을 갚게 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자신의 어머니를 세 살도 안 되어 잃은 뒤 25살에 등극하기까지 거의 23년간 숨죽이고 살면서 당했던 원한을 풀려면 수도 없는 사람들을 죽여야 마땅했다. 그런데 영국 역사에는 그런 복수의 기록이 전혀 없다. 그걸 보면 엘리자베스1세가 상식의 수준을 뛰어넘는 타협과 용서를 한 듯하다.
   
   다음은 제임스1세의 경우이다.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는 결혼하지 않아 자식이 없던 엘리자베스1세가 후임으로 지명한 인물이다. 여기서 좀 놀라운 일은 엘리자베스가 제임스 어머니를 사형시켰다는 사실이다. 궁중 반란으로 쫓겨 내려온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제임스1세의 어머니)를 거의 20년간 연금했다가 결국 사형시킨 악연이 있는데도 그 자식을 자신의 후임으로 지명한 것이다. 메리를 그냥 두면 여왕의 지위를 넘본다면서 죽여야 한다고 중신들이 계속 채근했으나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아 주저했다. 그러다가 중신들은 엘리자베스가 메리 처형 서류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게 음모를 만들었다. 사정이 이런데도 잉글랜드로 내려와 왕이 된 제임스는 즉위 후 자신의 생모를 죽인 그 중신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물론 가장 중요한 주모자였던 재상 윌리엄 세실이 이미 죽어버린 탓도 있지만 새로운 곳에서 권력을 행사하려면 토착 세력들과 등을 지면 안 된다는 지혜도 작용했을 듯하다. 그래도 기록에 보면 당시 측근들이 복수를 해야 한다고 제임스1세를 충동질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제임스는 그들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의 원수는 못 갚았지만 대신 자신과 나라는 태평성대를 누렸다. 과거에 매달리지 않고 현재와 미래를 보고 통치를 한 결과였다.
   
   이제 제임스의 아들 찰스1세와 2세의 이야기를 해보자. 제임스가 죽었을 때 캘리 백작은 제임스의 아들 찰스1세의 기질을 알아서인지 ‘제임스는 평화 속에 살았고 평화 속에 죽었다. 나는 신에게 아들인 찰스 왕자도 아버지를 따라 그렇게 살게 해달라고 빈다’고 나중에 보면 섬뜩할 정도로 선견지명 있는 기도를 했다. 하지만 그의 우려대로였다. 왕권신수설을 믿던 찰스1세는 의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갖은 풍파를 다 일으켰다. 결국 의회의 동의 없이 증세를 하려다가 신하들과 런던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찰스1세는 올리버 크롬웰의 신형군(New Model Army)에 체포당해 영국 왕으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단두대에서 처형되고 만다.
   
   크롬웰이 죽고 나서 호국경의 지위를 이어 받은 크롬웰의 아들 로버트는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깨닫고 프랑스에 망명 가 있던 찰스의 아들(찰스2세)을 불러들여 왕위를 주고 물러난다. 왕위를 회복한 찰스2세 역시 아버지의 복수를 한다면서 큰 피바람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당시 최고의 범죄인 ‘왕을 죽인 범죄(regicide)’에 가담한 자들이 살아 있었는데도 말이다. 찰스2세는 아버지의 사형 재판 판결문에 직접 서명을 한 귀족 59명 중 주동자 9명만 사형에 처했다. 이미 사망한 올리버 크롬웰과 주동자 3명은 부관참시를 하고 나머지는 파직을 하거나 런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가벼운 처벌만 했다. 그리고는 보장과 망각의 법(Indemnity and Oblivion Act)을 만들어 자신의 망명기간에 일어났던 모든 범죄를 일괄 사면했다. 망명기간을 공위기간(Interregnum)이라고 칭하면서 ‘지난 19년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그 기간 중에 일어난 일은 법적으로 잊어버린다’고 선언했다.
   
   영국에서 있었던 화해와 용서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세상은 반드시 정의로만 다스려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잊어버리기도 하고 지나쳐버리기도 하면서 같이 미래를 도모하는 일은 사실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역사가 순항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필요한 일인 듯하다.
   
   영국 역사에 기록된 위대한 화해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거와의 현명한 화해는 현재와 미래를 위한 일이다. 아무리 안타까워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 과거다. 그런 과거를 어깨 너머로 자꾸 돌아보면서 가다가는 결국 언젠가 장애물을 보지 못해 사고가 난다. 이 간단한 진리가 영국의 위대한 화해를 살펴보면서 떠오른 진리이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