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미·소 정상회담 중 농담을 주고받고 있는 미 닉슨 대통령(오른쪽)과 소련의 브레즈네프. ⓒphoto The Indipendent
1973년 미·소 정상회담 중 농담을 주고받고 있는 미 닉슨 대통령(오른쪽)과 소련의 브레즈네프. ⓒphoto The Indipendent

최근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이 거의 자존심을 건 치킨게임 수준으로 전개되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가들마저 피해를 입지 않을지 우려될 정도다.

미·중의 대두(메주콩)를 비롯한 곡물 관련 분쟁을 보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곡물 대탈취 사건’(Great Grain Robbery, 혹은 소련발 곡물파동)이 떠올랐다. 1972년 벌어졌던 이 사건은 1855년 영국에서 일어난 금괴 탈취 사건인 ‘그레이트 트레인 로버리(Great Train Robbery)’에서 이름을 따온 사건이다. 사건 전개는 지금의 미·중 무역전쟁과는 분명 다르지만 미·소 두 나라 사이의 분쟁으로 세계가 분란에 휘말렸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곡물 대탈취 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밝혀진 개요는 다음과 같다. 당시 사상 최악의 가뭄과 냉해로 곡물 작황이 말도 못할 지경에 이른 소련은 1972년 7월 1000만t의 밀과 옥수수를 미국으로부터 저가에 일시에 사들였다. 더군다나 미국이 제공하는 자금을 이용해서 말이다. 당시 소련이 곡물을 사들이는 데 쓴 금액은 총 7억달러, 사들인 양은 미국의 1971년 곡물 전체 수출량보다 더 많았다. 미국 1년 곡물 생산의 30%, 미국 내 1년 소비량의 80%에 이르는 엄청난 수량이었다.

냉전의 최정점에서 적국인 소련 정부기관과 미국 소재 곡물 메이저들 사이에 그런 계약이 맺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미국 정부는 사전에 전혀 몰랐다. 곡물 메이저들이 계약을 맺은 뒤 시카고 곡물시장 가격이 갑자기 요동을 치고 나서야 미국 정부는 비로소 사태를 파악했다. 이 사태 직후 세계 곡물 가격은 걷잡을 수 없이 올랐다. 대두의 경우 부셸(28㎏)당 3.31달러였던 가격이 10개월 뒤에는 거의 4배인 12.90달러로 올랐을 정도로 폐해가 컸다. 결국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곡물 가격이 폭등하여 1년 뒤에는 전 세계 소비자 식료품 가격이 50% 정도 올랐고 시카고 곡물 시장 가격도 125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1973년과 1975년 사이 미국발 전 세계 불황이 이 사건 때문에 생겼다는 주장이 정설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세계인의 일상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다. 하지만 사건의 파장치고는 실상이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대두 가격 10개월 만에 4배 폭등

이 곡물 대탈취 사건은 인공위성을 우주로 먼저 쏘아 올린 1957년 ‘스푸트닉 사건’과 미국 코앞인 쿠바에 원자폭탄 미사일을 배치한 1962년 ‘쿠바 미사일 사태’와 함께 소련이 미국의 뒤통수를 친 3대 사건 중 하나라고 일컫는다.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야 미국 정부는 펄펄 뛰면서 일정 이상 수량의 곡물 수출 계약은 사전에 농무부와 협약을 해야 한다는 둥 대책을 마련하느라 법석을 떨었다. 그런데 사건 발생 당시에만 몰랐을 뿐 엄밀히 따지고 보면 이 사건은 미국이 소련에 마당을 만들어주면서 생긴 일이었다. 1972년 5월 2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의 역사적 정상회담에서 핵과 미사일 감축 말고도 곡물거래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닉슨은 작황이 나빠져 미국의 곡물이 없으면 도저히 나라살림을 꾸려 갈 수 없던 소련을 곡물을 이용해 길들이려고 했다. 그래서 곡물 수출에 합의했다. 닉슨은 곡물을 이용하면 소련을 우방은 아니더라도 최소 협력자(partner) 정도로 만들 수 있다고 봤다.

소련이 식량문제로 미국에 멱살이 잡힌 원인은 농업정책과 사회구조에 근원적인 문제가 있어서였다. 소련은 10월 볼셰비키혁명 이전만 해도 세계 최고의 곡물 수출국이었다. 그러던 것이 혁명 직후인 1920년부터 집단농장화가 실시되면서 작황이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 소련이 곡물 수출국에서 수입국으로 바뀐 데는 보통 농업정책의 처참한 실패가 원인으로 꼽히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을 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이 월급이 나오는 제도하에서 누구도 굳이 일을 하려 않는 사회구조가 더 큰 원인이었다. 필자는 1980년대 초부터 거의 10년간 소련에서 살았다. 처음에는 상사 주재원으로, 나중에는 무역과 제조업에 종사하는 개인사업자로 살면서 소련의 실상을 곁에서 지켜본 경험이 있다. 당시 소련의 상황은 조금 심하게 말하면 목불인견의 수준이었다.

예컨대 추수철이 되면 소련 언론에는 군인과 학생들이 농장에서 추수한다는 뉴스가 나왔다. 농장은 생산만 하면 그만이었다. 법에 의하면 비가 오면 농민들은 추수를 하러 밭으로 나가지 않아도 됐다. 소련에는 가을철에 유난히 비가 많이 온다. 곡식이 그냥 밭에서 썩어가자 답답한 소련 정부는 군인이나 학생들을 동원했다. 하지만 추수된 곡식도 운반과정에서 다시 썩었고(운송회사는 물리적으로 장소만 옮겨주면 되고 운송 중 곡식 부패 여부는 책임을 지지 않았다) 운반된 곡식 역시 도시 인근 보관창고에서 썩었다. 연간 3000만t의 밀이 이렇게 없어졌으니 곡식은 물론 채소 등이 근본적으로 모자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소련은 미국에 비해 2배나 큰 경작지에 6배나 많은 농부가 일을 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생산량은 미국의 2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뒤통수 맞은 미국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이뤄진 곡물거래 합의는 엄밀하게 말하면 미·소 양측의 이해가 절묘한 시점에서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당시 미국은 오일쇼크로 사상 최초의 무역적자에 시달리고 있어서 곡물 수출이 절실했다. 그래서 모스크바 정상회담 전에 국내 곡물가보다 낮은 수출가를 농민들에게 보상해주는 계획이 이미 세워졌었다. 1972년 5월 정상회담에 앞서 4월 미국 농무장관 얼 부츠가 모스크바를 먼저 방문해 모든 협의를 마쳐 놓은 상태였다. 특히 미국 정부는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이 인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곡식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모스크바 방문에서 돌아온 닉슨은 1972년 7월 8일 향후 3년간 러시아로 7억5000만달러어치의 곡물을 수출한다는 예산안에 서명했다. 재선에 도움이 되는 농부들을 기쁘게 해서 정권을 제대로 안정시키겠다는 정치적인 수였다. 이 덕분인지 닉슨은 1972년 11월 재선 투표에서 49개 주에서 승리하면서 압승했다. 소련으로서도 닉슨의 이런 정치적 상황을 이용한 셈이다.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취한 것으로 미·소 양국 누구도 손해 나는 일이 없는 거래인 듯싶었다.

그런데 소련이 미국의 뒤통수를 치는 기상천외한 일을 저지른 것이다. 소련은 닉슨이 서명을 하자마자 닉슨이 허용한 거의 전액을 한꺼번에 내지르는 곡물 계약을 체결했다. 물론 정부 간 거래가 아닌 중개인을 이용한 곡물메이저와의 계약이었다. 향후 3년에 걸쳐 사용되어야 할 금액을 한꺼번에, 그것도 비밀리에 지불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협약에는 돈을 일시에 사용하지 못한다는 제한조건이 없었기에 사실 미국 정부로서는 어떻게 할 방법도 없었다. 양측 전문가들이 따지고 또 따졌을 엄청난 금액의 협약에 사용기간 제한조건이 빠진 건 실수라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다. 해서 미국의 의도적인 방조 혹은 소련과의 암묵적인 합의하에 ‘기상천외한 사건’이 벌어진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아직도 제기되고 있다.

사실 계약금액은 7억달러라고 해도 실제 미국 농민들의 수입은 10억달러였다. 1922년에 제정된 농장 수입 안정화 제도에 따라 국내가와의 차이 3억달러를 정부가 보전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자기 돈 한 푼 안 들이고 국제가에서 할인된 가격에 곡물을 수입하여 이듬해를 대비한 곡물 비축을 했고 위성국이던 동구권에 곡물 원조를 하는 선심도 썼다. 결국 미국의 야당과 언론이 난리를 쳤는데도 불구하고 계약은 이행됐고, 미국 농무장관도 자리를 지켰다. 사건은 누구도 손해 나지 않고 처벌받지도 않고 흐지부지 넘어가고 말았다. 미국과 소련 정부 어느 쪽이 곡물거래 합의 성사에 더 열을 올렸는지도 결국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건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아직 여기저기가 의문 투성이다. 인터넷에 ‘Great Grain Robbery’라고 치면 자료가 많이 나오는데 그중에는 미국 감사원이 조사해서 감사원장 이름으로 미국 상·하원에 보고한 보고서도 있다. 또 당시 곡물중개상과 곡물메이저 회사 직원 이름까지 들먹이며 그럴듯하게 사건을 설명하는 미국 유수 언론의 소설 같은 기사까지 별별 내용들이 다 있다. 그런데 그런 자료를 살펴보면 가장 제일 먼저 드는 의문이 어떻게 소련이 미국 연 생산량의 30%, 미국 내 소비량의 80%에 해당하는 엄청난 곡물을 시장을 폭등시키지 않고 구입할 수 있었느냐는 점이다. 그것도 감사원 보고서에 나오듯이 ‘할인된 가격(discounted price)’으로, ‘수개월에 걸쳐서’ 말이다.

군사작전하듯 곡물 매입

필자는 이런 의문을 풀 이야기를 우연히 전해들은 적이 있다. 과거 필자가 다니던 한국 회사는 대규모의 소련산 원자재를 레닌그라드 경매시장으로부터 구매하고 있었다. 많이 살 때는 경매시장에 올라오는 전체 물량의 50% 이상을 구매할 때도 있어서 한·소 수교가 맺어지기 전에도 소련 출입국 시 항상 VIP 대접을 받았었다. 그런데 필자는 영국에 주재하던 소련 상무대표부 플레트뇨프 대표와도 과거 알고 지냈다. 그는 곡물 대탈취 사건이 날 때 미국에 주재하던 소련 상무대표부 대표여서 역사적인 구매의 당사자로 작전을 직접 기획, 지휘했다. 그는 곡물 대탈취 사건 이후 미국의 미움을 사서 영구 입국 거부 인물이 되었다. 그가 필자에게 국가기밀과도 같은 얘기를 사석에서 털어놓은 건 사건이 벌어진 지 거의 30년이 지난 후였다. 당시는 이미 소련이 해체된 후였고 필자가 파트너로 있던 소련 최초의 민간스포츠 에이전트 회사의 고문으로 있을 때였다.

플레트뇨프의 후일담에 따르면 사건은 이렇게 진행됐다. 그는 곡물 대탈취 사건 당시 갑자기 본부에서 모스크바로 빨리 들어오되 바로 소련으로 들어오지 말고 외국 몇 군데를 둘러서 오라는 내용의 전문을 받았다. 그는 외국 정부기관, 특히 미국 정부기관을 따돌리고 들어오라는 뜻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3개국인가를 거쳐서 소련에 들어가보니 바로 곡물 대탈취 작전 지시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미국으로 돌아가는 즉시 구매팀을 7개 구성해 미국과 곡물 구입 계약을 하라는 지시였다. 요령은 7개 팀이 미국의 ‘7대 곡물 메이저(석유 메이저 7자매(Seven Sisters)와 같은 식의 별명)’와 동일한 시간에 방문 미팅을 잡아 각각 150만t 구입 계약을 체결하라는 지시였다. 사전에 시비가 걸릴 조항을 면밀히 검토해 계약서를 꼼꼼히 준비하고 중개상과 변호사를 대동하고 가서 현장에서 바로 계약을 체결하라는 지시도 포함돼 있었다.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까지는 상대 계약 당사자, 즉 메이저 측이 협상장에서 못 나가게 하라는 주문도 있었다. 다른 메이저에게 비밀이 새나가지 못하도록 비밀 유지를 해야 한다며 이유를 둘러대라는 지시도 따라붙었다.

메이저 측으로 봐서는 150만t 정도는 특별히 큰 물량이 아니어서 자기네들하고만 계약한다는 소련 측의 말을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미·소 정부 간 거액의 곡물 거래 합의가 이뤄진 상태였기 때문에 쉽게 생각하고 계약을 했다. 메이저 회사들은 각각 계약을 마친 후 또 물량을 확보하려고 시장 상황을 들여다보고 나서야 시장이 난장판이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련이 자신들하고만 구매 계약을 한 줄 알았는데 다른 모든 메이저와도 같은 계약을 일시에 다른 장소에서 한,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전대미문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소련이 곡물 구매를 왜 군사작전처럼 전광석화식으로 해치웠는지에 대해서도 플레트뇨프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소련 각 농장에 뿌려진 종자가 문제였다고 설명했다. 중앙에서 배분해 파종한 씨앗이 제대로 발아되지 않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태가 전국적으로 벌어졌다는 것이었다. 당시 소련은 곡물증산을 위해 육종에 전력을 기울인 끝에 신품종 종자를 전국에 분배했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었다. 그때가 늦봄이었는데, 한창 작물이 자라 결실이 맺어지는 8월이 되어 이런 작물 상황이 외국에 알려지면 아무리 정보통제를 한다 해도 결국은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수밖에 없음을 당시 소련 정부는 깨닫고 있었다. 5월 모스크바 정상회담 당시에는 소련 정부가 사태를 파악하고 대책 마련에 허둥지둥할 때였다.

더군다나 1972년은 미국 농무부와 항공우주국(NASA), 그리고 CIA가 곡물메이저 후원 아래 소련 지상 정찰을 위한 랜드샛(LandSat) 위성을 본격 가동하기로 한 해였다. 숨길 것이 유별나게 많아진 소련으로서는 속이 탈 수밖에 없었다. 당시 미국은 이미 U2스파이 항공기를 띄워 소련 국토를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찰기가 촬영한 사진 해독으로는 늦은 봄 들판의 곡식 상태까지 정확하게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중국 관세 폭탄으로 중국 측 보복관세 대상이 된 미국산 콩을 주로 생산하는 미네소타주의 콩 생산 농장의 농부가 시름에 잠겨 있다. ⓒphoto AP·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중국 관세 폭탄으로 중국 측 보복관세 대상이 된 미국산 콩을 주로 생산하는 미네소타주의 콩 생산 농장의 농부가 시름에 잠겨 있다. ⓒphoto AP·뉴시스

소련 외교와 국물작황의 함수

본래 소련의 외교정책은 곡물작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있어왔다. 소련에 풍년이 들면 다음 해는 세상이 시끄럽고, 흉년이 들면 조용해진다는 말이 있었다. 풍년이 들면 미국으로부터 식량 수입을 안 해도 되니 자신들 마음대로 공산 혁명수출 같은 외교정책을 펼 수 있었다는 뜻이었다. 예를 들면 소련 곡물 수입의 78%에 이르는 1500만t(20억달러어치)의 미국산 곡물이 소련으로 수출되던 1979년은 카터 대통령 시절이었는데 미·소 간의 사이가 가장 평온했던 냉전시절이었다.

곡물부족 때문에 미국에 멱살이 잡혀 큰소리를 못 치던 러시아도 이제는 더 이상 예전의 곡물수입국이 아니다. 러시아는 2000년 이후 미국과 1, 2위를 다투는 곡물 수출국가가 됐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의 전쟁, 크림반도 강제합병, 영국에서의 스파이 독극물 사건 등으로 구미 각국으로부터 왕따를 당하면서도 큰소리를 치는 이유 역시 독립국가로서 가장 중요한 식량의 자급자족을 넘어 초대형 곡물 수출국으로 올라섰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작년 기준 세계 곡물거래량의 15.7%에 이르는 61억달러어치를 수출하는 미국에 이어 러시아도 58억달러어치(전 세계 거래량의14.8%)의 곡물을 수출한다. 2020년에는 미국을 따라잡아 1위에 오르겠다는 야심 찬 계획도 세우고 있다. 이렇게 단기간에 놀라운 곡물 증산에 성공한 이유는 러시아가 1990년대 후반 평소 ‘자본주의의 주구’라고 부르며 기피하던 곡물 메이저들에게 러시아 곡물 생산에 대한 투자뿐 아니라 직접 경영까지 허용한 적극적인 개방 정책 덕분이다.

거의 반 백년이 되어가는 미·소 간 곡물 대탈취 사건을 지금 들추는 이유는 역사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꿈 같은 이론을 국가 정책으로 도입하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돌아보고 싶어서이다. 순수이론학자에 불과한 칼 마르크스가 주장한 것이 ‘각자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 만큼 누린다(From each according to his ability, to each according to his needs)’였다.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을 감안하지 않은 이 이론을 끝까지 믿어 아집으로 밀어붙인 결과 소련 곡물 생산은 실패로 끝났다. 결국 이는 공산주의 실험 실패로까지 이어졌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일 소련이 집단농장화를 강행하지 않았다면 곡물수입국으로 전락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결국 소련이라는 국가도 해체되지 않고 지금도 존속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랬다면 미국이 세계를 상대로 지금처럼 안하무인식의 무역전쟁을 벌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역사는 오늘도 많은 교훈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런 역사의 교훈을 무시하지 말아야 역사의 불행을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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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하 재영칼럼니스트·'유럽문화탐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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