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18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국가주석 주재로 열린 ‘개혁개방 40주년 경축대회’. ⓒphoto 뉴시스
지난 12월 18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국가주석 주재로 열린 ‘개혁개방 40주년 경축대회’. ⓒphoto 뉴시스

지난 12월 18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 주재로 ‘개혁개방 40주년 경축대회’가 열렸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78년 12월 18일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11기3중전회)에서 개혁개방 노선을 공식 채택한 것을 경축하는 기념식이었다. 40주년을 맞은 올해에는 알리바바의 마윈, 텅쉰의 마화텅, 바이두의 리옌훙, 지리의 리수푸, 메이디의 허샹젠, 하이얼의 장루이민, 롄샹의 류촨즈 등 중국의 유명 기업가들이 대거 개혁개방 공헌메달을 받았다.

1978년 12월 18일은 덩샤오핑(鄧小平)이 마오쩌둥 사후 공식 후계자로 지명된 화궈펑(華國鋒)을 물리치고 중국공산당의 실질적 영수로 등극한 날이기도 하다. 하지만 집권과 함께 개혁개방을 추진해 오늘날 중국을 만든 덩샤오핑이 말년까지 후회한 사실이 있다. 바로 중국 경제중심 상하이를 ‘경제특구’로 지정하지 못한 것이다. 덩은 “4개 경제특구를 만들 때 상하이를 추가하지 않은 것은 큰 실수”란 아쉬움을 주변에 자주 토로했다.

1978년 11기3중전회에서 개혁개방 노선이 정식 채택된 이듬해인 1979년 ‘수출특구’란 이름으로 ‘경제특구’가 첫 지정됐다. 선전, 주하이, 산터우, 샤먼 등 남부 연해도시 4곳이었다. 상하이는 경제특구에 포함되지 못했다. 4곳의 경제특구에 더해 1988년 하이난성을 경제특구로 추가 지정할 때도 상하이는 경제특구에 포함되지 못했다. ‘개혁개방=경제특구’란 공식에서 상하이는 지금도 여전히 예외로 남아 있다.

상하이의 태생적 한계

상하이가 경제특구에서 제외된 이유를 놓고는 각종 설들이 분분하다. 가장 유력한 설은 상하이의 옛 조계(租界)를 떠올리게 하는 ‘특구’의 위상이다. 1979년 덩샤오핑이 경제특구를 설립할 당시 가장 큰 고민은 외국 자본의 자유로운 기업활동을 광범위하게 허용하는 특구와 서양 열강의 광범위한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조계가 무엇이 다르냐는 보수파의 지적이었다.

상하이는 태생 자체가 서양 열강의 조계로 태어난 도시다. 상하이 조계는 아편전쟁 직후인 1845년 중국에서 가장 먼저 설치돼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한 1943년 폐지되기까지 거의 100년간 존속했다. ‘동방의 파리’라는 상하이의 별명도 프랑스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프랑스조계’ 때문이었다. 중국공산당 역시 상하이 프랑스조계에서 태어났다. 조계와 불가분의 역사를 가진 상하이를 특구로 지정하려니 보수파의 저항에 부딪힌 것이다.

또한 상하이는 극좌파의 본산이었다. 극좌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4인방’ 가운데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을 제외한 왕훙원,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등이 모두 상하이를 정치적 기반으로 활동했다. 상하이시 당 기관지인 ‘해방일보’는 이들의 정치적 무대였다. 이들은 마오쩌둥 사후 상하이를 거점으로 민병 10만명을 동원해 정권 탈취까지 노릴 정도였다. 마오 사후 사인방이 체포되면서 분쇄됐다고 해도 추종세력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상하이의 좌경향은 덩샤오핑이 집권한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덩샤오핑의 라이벌이자 당내 보수파의 거두였던 천윈(陳雲)의 고향 역시 상하이였다. 상하이 칭푸가 고향인 천윈은 중국공산당의 발상지이자 자신의 고향인 상하이에 특구를 설치하는 데 부정적이었다. 실제 천윈은 죽는 날까지 특구에는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결국 천윈의 반대로 상하이에 특구를 설치하려는 덩샤오핑의 시도가 무산됐다는 것이다.

이런 아쉬움 때문인지 덩샤오핑은 살아생전에 상하이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종종 드러냈다. 덩샤오핑은 1920년 16세 나이에 근로장학생으로 프랑스 유학을 떠날 때 상하이 프랑스조계 부둣가에서 배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상하이와 인연을 맺었다. 상하이 지하당에서 활동할 때는 체포 위기를 두 차례나 넘겼다. 첫 부인 장시위안(張錫瑗)과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집을 꾸린 곳도 상하이다. 덩의 첫 부인 장시위안은 상하이 룽화열사능원에 묻혀 있다.

1989년 천안문사태를 전후해 후야오방, 자오쯔양 총서기를 차례로 경질하고 후계자로 발탁한 사람도 상하이 당 서기 출신 장쩌민이었다. 2선 퇴진한 후에도 각별히 챙긴 것은 상하이 푸둥 개발이었다. 1992년 노구를 이끌고 개혁개방의 지속을 설파한 ‘남순강화’ 때 가장 마지막으로 들른 곳도 상하이였다. 덩샤오핑은 말년인 1988년부터 1994년까지 7년 연속으로 상하이에서 매년 춘절을 보냈다. 이쯤되면 상하이에 대한 막대한 애정을 짐작할 수 있다.

덩샤오핑은 생전에 상하이를 찾을 때마다 상하이를 경제특구로 지정하지 못한 아쉬움을 종종 토로했다. 덩샤오핑은 상하이의 지리적 입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선전은 홍콩, 주하이는 마카오, 샤먼은 대만을 마주하고 있는데, (상하이) 푸둥은 세계를 마주하고 있다.” 상하이 사람들의 배포와 손재주를 얘기할 때는 1949년 상하이 해방 직후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자신의 안주머니에 있던 파카 만년필을 소매치기 당한 일화를 종종 언급했다.

덩샤오핑은 상하이를 경제특구로 지정하지 못한 대신 각종 정책지원을 집중했다. 1980년대 상하이 서쪽 훙차오 일대는 국가급 경제기술개발구로 최초 지정됐다. 1990년대에는 푸둥이 국가급 ‘신구(新區)’로 최초 지정되면서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특구’라는 간판만 안 걸었다 뿐이지 이에 버금가는 정책적 혜택을 고스란히 누린 셈이다. 초창기 경제특구 4곳도 사실 선전을 제외하면 주하이, 산터우, 샤먼 등은 당초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이 현실이다.

덩샤오핑의 상하이 사랑

덕분에 덩샤오핑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태어난 푸둥을 비롯한 상하이 곳곳에는 덩의 흔적이 그의 동상이 서 있는 경제특구 선전만큼이나 많다. 중국 최대 철강사인 상하이의 바오산강철은 덩샤오핑이 11기3중전회 직전인 1978년 10월 중국 지도자 최초로 일본을 방문해 신일본제철(신일철)에 기술지원을 요청하면서 건설이 성사됐다. 개혁개방 이후 최대 규모의 프로젝트였다. 바오산강철은 우한강철과 합병해 조강 생산량 기준 세계 2위 철강사(바오우강)가 됐다.

상하이 황푸강을 가로지르는 첫 번째 다리인 난푸대교와 두 번째 다리 양푸대교 역시 덩샤오핑의 지대한 관심 끝에 태어났다. 덩샤오핑은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매년 황푸강 교량건설 현장을 직접 찾았다. 1993년 양푸대교 개통 때는 89세 노구에 비바람을 무릅쓰고 다리 위에 직접 올라갔다. 상하이 구도심과 푸둥을 잇는 핵심교통망인 난푸대교와 양푸대교는 황푸강 선박통행을 방해하지 않도록 수면 위에 높게 걸린 것이 특징인데 평소에도 강바람이 매섭게 몰아친다.

난푸대교와 양푸대교 교각 상단에는 덩샤오핑의 커다란 친필 휘호가 걸려 있다. 이 다리를 이용해 개혁개방의 상징과도 같은 푸둥을 오가는 사람들은 자연히 덩샤오핑을 떠올린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78년 11기3중전회 직후, 덩샤오핑의 희망대로 상하이를 경제특구로 지정했더라면 어땠을까.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지만 중국의 경제성장이 지금보다 더 빨랐을지도 모른다. 미·중 무역전쟁으로 어수선한 개혁개방 40주년을 맞아 그의 존재가 더욱 크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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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춘미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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