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에 반대하는 영국의 시위대. ⓒphoto 뉴시스
브렉시트에 반대하는 영국의 시위대. ⓒphoto 뉴시스

원래 프랑스에서 ‘노란조끼’는 자동차를 수리하거나 타이어를 교체할 때 의무적으로 입는 옷이다. 그런데 이제 노란조끼는 수리가 아니라 시위의 상징이 돼버렸다. 2018년 11월 17일 시작한 노란조끼 시위는 해를 넘기고도 진행 중이다. 2019년 2월 9일, 13주째 사람들이 모였다. 파리와 보르도, 마르세유, 니스, 몽펠리에, 루엥, 카엥 등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어디 나라든 비슷하지만 프랑스에서도 빈부 격차는 큰 문제다. 그런데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경기 부양책의 일환으로 취임 1년 만에 고액납세자를 대상으로 세금 감면을 실시했다. 노란조끼 시위대가 가장 분노한 지점이다. 일단 고액소득자의 자산 전반에 매겨지는 부유세를 폐지했는데 국가가 포기한 세입이 32억유로(4조631억원)에 달했다. 프랑스 경제전망연구소는 “마크롱 정부의 2017~2022년 재정 정책을 분석해보면 세금 인하 관련 정책의 46%가 상위 10% 고소득자에게 유리하다. 70%를 차지하는 중산층의 소비에는 영향이 없을 것 같다”고 전망했다.

“우리는 파리로부터 버림받았다”

노란조끼 시위대의 분노는 어디에서 왔을까. 이런 질문에 작은 힌트를 주는 조사가 있다. 파리정치대학 정치연구소(CEVIPOF)가 실시한 소규모 자치단체 실태 조사다. 이 조사는 2018년 11~12월 사이, 노란조끼 시위 분위기가 가장 활활 타오를 때 이루어졌는데 인구 500명 이하 프랑스 시골마을 1만8547곳을 조사 대상으로 삼았다. 연구소는 이런 소규모 마을을 대상으로 설문지를 보냈고 2145개 마을의 대표로부터 답을 받았다. 시골마을의 대답에서 연구소가 추출해낸 결론은 ‘미래에 대한 큰 불안’이었다.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는 조사 결과를 이렇게 분석했다. “작은 마을에서 엿볼 수 있는 감정은 파리로부터 버림받거나 무시받는 거다. 이런 감정이 노란조끼 운동의 배경에 있다.”

뉴욕타임스는 파리의 시위 행렬에 참가한 한 남성의 고향을 방문한 르포를 실었다. 남성은 프랑스 중부 도시인 게레에 산다. 인구 1만4000여명의 소도시인 이곳에서부터 300㎞ 이상을 운전해 파리로 와 시위에 참가했다. 게레는 지금 “죽어가고 있다”. 도심의 카페는 텅 비었고 역 앞에는 차량이 방치된 채 흉물처럼 서 있다. 월급을 받아도 너무 적어 휴가조차 갈 수 없다. 기사에 등장한 남성이 최근에 한 쇼핑은 열흘 전 소시지 한 팩을 구매한 게 전부였을 정도다. 뉴욕타임스는 게레를 이렇게 묘사했다. “아주 극심한 빈곤에 있는 곳은 아니지만, 화려한 파리와는 다른 또 하나의 프랑스다.”

국가 내 도시와 지방의 격차가 현저하게 나타나는 건 프랑스만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유독 프랑스에서는 이런 격차가 격렬한 충돌로 이어진다. 도시의 화려함을 상징하는 샹젤리제 거리의 상점들이 박살난 건 차별을 박살내는 상징적인 일인지 모른다. 물론 2017년에 취임한 1977년생의 마크롱 대통령에게 모든 책임이 있는 건 아니다. 유류세 인상 등 그가 추진하는 정책은 ‘반발의 방아쇠’에 불과했다. ‘한 방울의 물이 꽃병을 넘치게 한다’는 프랑스 속담처럼 프랑스 내에서도 유류세는 단지 한 방울의 물이었을 뿐이라고 평가한다.

지방 민심이 이반하고 있는 전조는 과거에도 있었다. 프랑스 극우정당인 국민연합(RN)은 2010년대 들어 지방에서, 특히 시골에서 인기가 오르고 있었다. 원래 국민연합은 반이민을 주장했기에 이민자들과 일자리 경쟁을 해야 하는 노동자들이 지지했다. 이 정당은 본래 주로 공업도시에 터전을 잡았지만 최근 기류가 변했다. 파스칼 페리뉴 파리정치대학 교수는 “국민연합의 최근 지지는 농촌 지역에서 급속히 오르고 있다. 차별 현상에 대한 불만 때문이다. 국민연합도 그런 변화를 느끼고 전략적으로 농촌에 출마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미 노란조끼 이전부터 지방에서는 파리의 도시 엘리트 정치 세력을 대안으로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가 흘렀다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마르세유 도심을 행진하는 노란조끼 시위대. ⓒphoto 뉴시스
지난해 12월 마르세유 도심을 행진하는 노란조끼 시위대. ⓒphoto 뉴시스

“런던에 한 방 먹이다”

프랑스에서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에 도달해도 비슷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영국에서는 여전히 브렉시트 논란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2016년 6월 23일 벌어진 국민투표에서 유럽연합 이탈 찬성은 51.89%, 반대는 48.11%였다. 곧장 영국은 EU에서 탈퇴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 결정을 두고 아직까지 분열은 진행 중이다. 너무 격해지자 국내 정치 문제에 특별히 나서지 않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까지 “다른 사람 관점을 존중하자”며 중재에 나섰을 정도다.

암울한 경제 전망들이 쏟아지면서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2018년 11월 영국 채널4 방송이 “내일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열린다면 어느 쪽에 투표할 것인가”를 물으니 54%가 EU 잔류를 선택했고 46%가 EU 탈퇴를 택했다. 2016년과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 셈이었는데 ‘리그렉시트(regrexit·브렉시트 결정을 후회)’ 현상이 증가했음을 보여주는 지표다.

2019년이 와도 해법이 보이지 않는 2016년의 결정을 이끈 사람들은 누구일까. 당시 국민투표 결과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노년층은 이탈에 투표했고 청년층은 잔류에 표를 던졌다.’ 소도시와 시골 주민들은 이탈에 투표했고 런던 등 대도시 주민들은 잔류 쪽에 표를 줬다고도 볼 수 있다. 계급적 분열도 있었는데 노동자, 농민 계급은 이탈을 지지했고 반대로 도시 중산층 이상은 잔류에 투표했다. 이런 결과는 역설적이게도 런던의 정치가 민심과 괴리돼 있다는 걸 증명했다. 당시 영국 하원의원 650명 중에서 잔류파는 무려 500여명에 달했다. 민의를 대변한다는 하원의원들이 민의를 읽지 못한 셈이었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이끄는 ‘보수당 정부의 긴축정책’은 치명타였다. 보수당 정부는 재정적자와 부채가 경제에 나쁘다는 이유로 정부지출을 대폭 삭감했다. 이런 긴축은 공공서비스 예산을 삭감시켰는데 공공의료서비스(NHS)와 지방정부가 운영하는 학교가 당장 영향을 받았다. 충격은 소득 수준이 높은 런던보다 런던이 아닌 지방에서 훨씬 크게 다가왔다. 마틴 파월 버밍엄대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어떤 영국인들은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불러올 후폭풍까지 생각하지 않았을 거다. 그냥 자신의 상황에 불만이 있는 이들이 제도정치권에 한 방 날린 것이었다.”

“왜 독일에 빈곤이 생기는가”

프랑스와 영국에 비하면 안정적이라고 평가받는 독일에서는 최근 흥미로운 사건이 하나 있었다. 독일 NGO 단체인 타펠(Tafel)은 1993년 베를린에서 출범한 푸드뱅크다. 팔다 남은 식료품을 기업이나 개인이 기부하면 그것을 빈곤층에게 제공한다. 지금은 독일 전역에 퍼져 약 2100여개의 배급소를 운영 중이다. 회원들의 기부금으로 운영되며 무려 6만명의 자원봉사자가 일을 돕는다. 주로 연금을 받지 못하는 노인이나 미혼모들이 이곳을 애용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동안 메르켈 정부가 적극적으로 난민을 받아들이자 타펠도 영향을 받았다. 난민들이 타펠을 이용하자 운영에 어려움이 생겼다. 외국인 비율이 75%에 달하면서 막상 도움을 받아야 할 독일인들은 배급소에 오지 못했다. 그러자 타펠은 2018년 1월 일시적으로 신규회원 가입을 중단시켰다.

이 결정 이후 타펠은 엄청난 저항에 부딪혔다. 배급소 문과 배급소 인근에 세워둔 차에는 ‘죽어라 나치’ 같은 말이 스프레이로 뿌려졌다. 베를린의 정치인들은 “식량 난민을 셧아웃시키다니 섬뜩하다” 등의 트윗을 날리며 타펠을 공격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마저 인터뷰에서 “이런 차별 대우는 좋지 않다”며 타펠을 조준했다.

정치인들은 차별을 지적했지만 여론은 오히려 빈곤에 관심을 가졌다. ‘왜 독일 같은 부유한 국가에서 타펠이 활발하게 활동하는가’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풀기 시작했고 화살은 오히려 타펠이 아닌 베를린의 정치인들에게 향했다. EU 통계작성기구인 ‘유로스탯’의 자료에 따르면 2017년 독일의 빈곤율(평균소득의 60% 미만인 경우)은 10%에 육박했다. 이런 논쟁의 틈을 파고든 건 독일의 극우정당이었다. 타펠의 사례는 독일에서 극우정당이 빈곤 문제를 난민 문제로 전환시키는 수법을 보여준다. “난민의 증가로 가장 타격을 받고 있는 건 독일의 저소득층이다” “저렴한 집은 매우 부족하며 난민들이 임금 수준을 하락시키고 있기에 막상 피해는 가난한 독일인들이 본다”는 주장이 호응을 얻었다.

극우정당인 ‘독일을위한대안(AfD)’은 그동안 독일 내 비주류이자 저소득지역인 구 동독 지역에서 높은 득표율을 올리며 주의회 진입에 성공했던 정당이다. 그런데 2018년 10월 독일에서 가장 부유한 헤센주 지방선거에서도 선전을 펼치며 지방의회 진입에 성공했다. 13.1%를 얻으며 19석을 얻었는데 이로써 독일의 16개 모든 주에 진입하는 성과를 얻었다. ‘동독 지역의 지역정당 수준에 머물 것’이라는 조롱 섞인 전망을 불과 몇 년 만에 깨버렸다. 반면 집권 기독민주당(CDU)은 득표율 27.9%를 기록했는데 2013년보다 10.4%포인트나 폭락한 성적표를 받아들어야 했고 메르켈 총리는 위기에 몰렸다.

후폭풍은 거셌는데 메르켈 총리는 곧장 책임을 지고 당 대표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고 다음 총리 후보로도 출마하지 않겠다고 공표했다. 새로운 기민당 얼굴로 뽑힌 이는 ‘미니 메르켈’로 평가받는 안네그레트 크람프-카렌바우어다. 메르켈 총리는 많은 것을 내려놓은 덕에 당내 보수 세력의 반메르켈 정서를 물리쳤고 권력 교체의 연착륙을 꾀했다.

다만 메르켈 총리와 크람프-카렌바우어 대표 체제를 죄어오는 건 2019년 하반기에 예정된 구 동독 지역 3개 주(작센주·튀링겐주·브란덴부르크주)에서 열리는 지방선거다. 여기는 극우 바람의 중심지로 수도 베를린과 다른 민심이 흐르는 곳이다. 이미 AfD는 “우린 제1당을 목표로 한다”고 공표할 정도로 자신만만하다. 만일 기독민주당이 참패한다면 메르켈 총리뿐만 아니라 크람프-카렌바우어 대표의 자리까지 위태롭게 된다.

유럽의 세 축을 이루는 국가들이 정치적 혼란을 겪는 양상은 저마다 다르다. 하지만 그 기저에는 ‘지방의 반란’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취약계층의 정서적 불안감과 실질적 어려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파월 교수의 조언이 진정한 과제로 떠오르는 유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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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권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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