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31일 열린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photo 뉴시스
지난 3월 31일 열린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photo 뉴시스

지난 3월 31일 열린 우크라이나 대선. 최초에는 44명이 출사표를 던지며 대권에 도전했다. 이후 5명이 사퇴하며 39명이 선거를 완주했는데 이들의 이름을 기입한 투표용지 길이는 115㎝에 달했다. 덕분에 유권자들은 화장지처럼 길게 늘어진 종이를 들고 투표해야 했다. 과거 24명이 출마했던 2004년에는 67㎝였으니 이번에는 모든 게 신기록 감이었다.

치열했던 39 대 1의 경쟁을 뚫고 우크라이나의 차기 대통령이 된 사람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41)다. 선거 직전까지 방영됐던 TV드라마 ‘국민의 종(Servant of the People)’에서 대통령 역할을 연기한 코미디언 출신 배우였다. 그는 1차 투표에서 30.24%를 얻었고 결선 투표에서 73%를 얻어 압도적인 승리를 따냈다. 결선에서 그와 겨룬 후보는 페트로 포로셴코 현 대통령이었다.

드라마에서 대통령을 연기한 게 유일한 정치 경력인 코미디언은 선거에 나오자마자 진짜 대통령이 됐다. 젤렌스키는 대선 토론회에서 포로셴코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당신의 실수가 만들어낸 약속이다.” 그의 말처럼 젤렌스키의 등장을 설명하려면 포로셴코 대통령이 반드시 필요하다.

2014년 친(親)러시아 정부를 물리치고 승리를 거둔 포로셴코 대통령도 처음에는 큰 기대를 받았다. 당시 대선에서 그는 결선까지 가지 않고 1차 투표에서 바로 과반수를 얻어 당선됐다. 우크라이나 국민이 그에게 바랐던 건 경제 재건과 부패 근절이었다. 하지만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선 3일 전까지 방송된 드라마

포로셴코가 물려받은 우크라이나는 녹록지 않은 상황이었다. 일단 동부 지역에서 반군과 벌이는 전투는 부패의 화수분 역할을 했다. 게다가 경제는 엉망이 됐다. 군대에 들어가는 예산이 많다 보니 내치를 위해 예산을 돌리기도 쉽지 않았다. 블룸버그통신이 발표하는 ‘경제고통지수(Misery Index)’는 국민의 경제적 고통을 짐작할 수 있는 지표다. 전 세계 62개국을 대상으로 한 2018년 조사에서 우크라이나는 전체 5위의 상위권 고통국가로 인증받았다.

새 대통령이 될 젤렌스키의 직업은 코미디언이다. 인생의 전환기는 채널 ‘1+1’에서 2015년부터 방영한 드라마 ‘국민의 종’이 히트를 치면서다. 부패와 비리를 싫어하는 30대 교사의 정치 비판이 소셜미디어를 타고 인기를 얻으며 대통령이 되고 우크라이나에 산적한 문제를 해결해간다는 내용인데 여기서 젤렌스키는 주인공을 맡았다. 시즌3의 마지막 회가 방송된 때는 올해 3월 28일이었는데, 대선을 불과 3일 앞둔 날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평범한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나는 정치인이 아니다. 지금의 체제를 파괴하기 위해 온 평범한 인간이다.” 대선 결선 투표를 앞두고 열린 토론회에서 젤렌스키는 정치가로서의 능력을 의심하는 경쟁자의 질문에 답했다. 젤렌스키의 공약은 단순했다. ‘국민투표’를 축으로 한 직접민주주의를 강조했다. 반면 외교나 안보·경제·사회 정책 등에서는 진부한 단어가 나열돼 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았다. 기존 정치체제를 반대하는, 마치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기존의 썩은 체제를 변혁할 수 있는 외부인으로 유권자에게 어필해왔다. 경쟁자들은 정치적 경험이 없는 걸 무수히 공격했지만 유권자들은 이를 마이너스가 아니라 플러스 요인으로 여겼다. 우크라이나는 기존 정치에 오염되지 않은 유명 인사가 등장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2014년 수도인 키예프 시장에 당선된 비탈릭 클리치코 역시 정치 경험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으로 유명했다.

우크라이나는 여러 문제를 안고 있지만 대표적인 게 올리가르히(구소련 해체 후 등장한 신흥재벌)로 대표되는 엘리트의 특권과 부패다. 우크라이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매번 단골로 거론되는 문제다. 우크라이나는 2004년 오렌지 혁명, 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을 거치며 정치 체제가 변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올리가르히 특권은 오히려 강화됐다는 비판을 받았다. 포로셴코 대통령 역시 동유럽 최대 제과회사를 경영해 ‘초콜릿 왕’이라고 불리던 올리가르히다.

우크라이나 최대의 자산가인 리나트 아흐메도프를 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그는 구소련 붕괴 이후 정치권과 결탁해 탄광과 철강 산업으로 막대한 부를 일궜다. 아흐메도프는 2014년 축출당한 친러시아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2014년 동부에서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 내전이 시작되면서 그는 타격을 입었다. 우크라이나 동부를 장악한 반군은 아흐메도프의 사업 자산을 압류했다. 2011년 포브스 추산 160억달러에 달했던 그의 재산은 2016년 23억달러로 급감했다. 그런데 2019년 기준으로 그의 재산은 다시 60억달러로 불어났다. 60억달러는 우크라이나 GDP의 4%에 해당하는 규모다. 포로셴코 대통령 체제가 올리가르히들의 비즈니스에 적합했다는 얘기다. 정부가 택한 화력발전소의 전기료 상승은 우크라이나 화력 발전의 대부분을 소유한 아흐메도프에게 막대한 이익을 안겨줬다. 게다가 민영화하는 국영기업들 중 상당수가 그의 손에 떨어지기도 했다.

성패의 잣대가 될 올리가르히와의 관계

혁명의 결과를 몇몇 소수가 누리는 모순에 반기를 든 게 이번 대선의 결과다. 레오니드 쿠치마 전 대통령은 “이번 선거 혁명은 포로셴코 대통령이 2014년 이후 하지 못했던 성취를 위한 시도다. 우크라이나의 현재 정치 계급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다”라고 말했다. 드라마에서 기존 시스템을 타파해왔던 배우 젤렌스키가 현실에서도 그렇게 해주길 기대하고 있는 셈이다. 영국의 가디언은 “젤렌스키는 기존 정치체제를 혁파하고 올리가르히 해체를 약속했다”고 전했다.

문제는 젤렌스키 역시 올리가르히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미 많은 해외 언론은 우크라이나 금융재벌인 이고르 콜로모이스키와 젤렌스키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다. 콜로모이스키는 금융업과 철강, 미디어가 주요 사업 무대다. 그가 가지고 있는 방송국이 젤렌스키를 스타로 만들어준 채널 ‘1+1’이다. 원래 콜로모이스키는 유로마이단 혁명 때 시위대 쪽에 서서 사재를 털어 지원했던 올리가르히다. 그 공으로 포로셴코 정부가 들어서면서 드니프로페트로스크 주지사 자리를 지냈다. 그런데 대통령과 불화가 생겼고 그가 가진 우크라이나 최대의 상업은행인 프리바트은행은 국유화됐다. 유대인인 콜로모이스키 역시 이스라엘로 망명했다. 이번 대선 결과를 두고 일각에서 ‘콜로모이스키의 복수극’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까닭이다. 대선 캠페인에 드는 막대한 선거 자금, 갑작스러운 출마 전략이 온전히 젤렌스키 머리에서 나왔을 거라고 믿는 사람은 드물다. 올리가르히를 혁파하겠다는 젤렌스키에게 가장 성가신 문제는 콜로모이스키와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 짓느냐로 모아진다.

러시아정치기술센터의 알렉세이 마카루킨 부소장은 젤렌스키 현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탤런트 출신 정치인은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유권자가 기존 정치에 대해 실망하거나 부패에 대한 분노에서 탄생하는 경우가 많다. 둘째, 탤런트가 정계에 진출할 때는 특정 후원자에 의존하는 게 보통이다. 셋째, 탤런트 정치인이 실제로 국가 지도자가 되면 국민들은 지독한 경험을 하게 되고 새로운 실망을 초래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조건을 이미 충족한 젤렌스키가 세 번째마저 현실로 만들까. 콜로모이스키와 올리가르히를 대하는 그의 태도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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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권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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