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1일 중국 상하이 푸둥에서 개막한 CES 아시아에서 샤오양 화웨이 최고전략책임자가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지난 6월 11일 중국 상하이 푸둥에서 개막한 CES 아시아에서 샤오양 화웨이 최고전략책임자가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현재는 화웨이에 가장 위험한 시기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좋은 상태에 놓여 있다.”

지난 6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CES 아시아’에 첫 번째 기조연설자로 나선 샤오양(邵洋) 화웨이 소비자부문 최고전략책임자(CSO)는 런정페이(任正非) 회장의 말을 인용해 위기설을 애써 부인했다. 올해로 5회째를 맞이한 아시아 최대 가전전시회 ‘CES 아시아’ 개막 첫날, 모든 관심은 미국에 의해 난타당하고 있는 화웨이(華爲)에 쏠렸다. 미국의 제재로 거래선이 속속 끊어지고 있는 지금의 상황만 놓고 본다면 올해 ‘CES 아시아’는 화웨이의 마지막 고별무대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장 위험한 시기 아니다”

약 800석의 자리가 마련된 상하이 푸둥(浦東) 케리호텔 상하이볼룸에는 화웨이의 대응을 지켜보려는 전 세계 미디어·IT 업계 관계자들이 1000명 가까이 몰려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21년 전인 1998년 화웨이에 엔지니어로 합류했다는 샤오양 최고전략책임자는 “21년 전만 해도 주변 친구들이 화웨이가 무슨 일을 하는 회사인지 몰랐는데, 20일 전부터는 ‘스트레스가 많지 않느냐’ ‘몸조심 하라’는 등 걱정을 많이 해준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이날 샤오양 최고전략책임자는 화웨이 스마트폰을 주 채널로 TV, 태블릿, PC, 이어폰, 자동차, 손목시계, 안경, 스피커 등 8개 보조채널을 하나로 묶는다는 ‘1+8 전략’을 제시해 주목을 끌었다. 지금은 각각의 기기가 따로 놀고 있지만 향후에는 화웨이 스마트폰에 탑재된 ‘AI(인공지능) 플랫폼’ 하나로 모두 컨트롤할 수 있게 한다는 야심 찬 전략이었다.

CES 아시아의 본 행사장인 상하이 푸둥 신국제박람중심(SNIEC)의 가장 좋은 길목에 자리 잡은 화웨이 부스에도 미·중 무역전쟁에서 고군분투 중인 화웨이를 응원하는 자국 참관객들이 미어터졌다. 이날 화웨이는 자사의 대표 휴대폰 라인업인 ‘P30’과 ‘메이트(Mate)20’ 시리즈, 노트북 라인업인 ‘메이트북’ 시리즈를 대표선수로 내세웠다. P30과 메이트20은 업계 1위 삼성 갤럭시나 애플 아이폰에 못지않은 디자인과 스펙을 자랑했다. 독일의 광학기업인 라이카(Leica)와 함께 개발했다는 P30 스마트폰에 탑재된 카메라는 아이폰 못지않은 화질을 자랑했다. 화웨이 관계자는 “메이트20이 각종 비즈니스 업무에 적합하게 만들어졌다면, P30은 주로 사진을 찍는 데 특화되게 만든 스마트폰”이라고 설명했다.

샤오양 최고전략책임자는 이날 기조연설에서 “화웨이 직원들은 과거에만 해도 휴대폰을 두 개 들고 다녔다”고 고백했다. 사내용으로 쓰는 화웨이폰, 외부 사람들을 만날 때 쓰는 애플 아이폰이었다. 기술력과 디자인이 부족해 화웨이폰을 어디 내놓기 부끄러울 때의 이야기였다. 이제 기술력과 디자인이 뒷받침되면서 이런 이야기는 농담으로 얘기할 수 있는 전설이 됐다고 자랑한다. 화웨이는 스마트폰 시장에서 중국 1위, 글로벌 시장에서는 삼성에 이어 세계 2위에 올라와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애플은 이미 추월했고, 오는 2020년경 삼성을 추월하는 것이 화웨이의 목표다.

지난 6월 11일, 상하이 푸둥 신국제박람중심(SNIEC)에서 ‘CES 아시아’가 열렸다. CES는 세계 최대 가전전시회의 하나로 독일 베를린의 IFA(국제가전박람회),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MWC(모바일월드콩그레스)와 함께 전 세계 IT·가전 시장의 트렌드를 주도하는 세계 3대 전시회다. 1967년부터 매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렸는데, IT 시장에서 아시아 기업들, 특히 중국 기업들이 차지하는 위상이 커지면서 2015년부터는 중국 상하이에서 ‘CES 아시아’라는 별도의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CES 아시아가 열린 상하이 푸둥 신국제박람중심(SNIEC).
CES 아시아가 열린 상하이 푸둥 신국제박람중심(SNIEC).

미국 대표 기술기업들 대거 불참

올해로 5회째를 맞는 이번 ‘CES 아시아’에는 약 70개국 550여개 기업이 참가했다. CES 아시아 행사를 주관하는 미국 소비자기술협회(CTA) 개리 샤피로 회장은 ‘5G’와 ‘AI(인공지능)’를 이번 행사의 화두로 던지면서 “550여개 참가 기업 중 스타트업만 115개에 달한다” “참관객은 약 5만명으로 역대 최대 규모”라고 말했다. 지난해 CES 아시아에는 50개국, 500여개 기업이 참가하고 4만명의 참관객이 찾았었다. 행사 규모만 놓고 보면 외형적으로는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올해 CES 아시아에는 화웨이에 대한 전면 제재로 기술전쟁으로 비화된 미·중 무역전쟁의 여파가 강하게 드리우고 있었다. 참가국과 기업, 참관객은 역대 최대를 경신했지만, 미국을 대표하는 기술기업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부품소재를 생산하는 미국의 화학기업 3M, 다우(Dow), 음향장치 기업 보스, 소노스(Sonos) 정도가 전부였다.

전기차 시장을 주도하는 중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벤츠, 아우디, 혼다, 닛산, 현대기아차 같은 글로벌 완성차 기업과 덴소(일본), 콘티넨탈(독일), 현대모비스(한국) 같은 자동차 부품사들도 대거 별도 부스를 꾸리고 전장부품을 출시했지만, GM이나 포드 같은 미국 자동차 기업은 보이지 않았다.

특히 미국과 행보를 같이하는 소니, 파나소닉, 샤프 등 일본의 가전기업은 불참했고, 미국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삼성, LG 등도 공개 부스를 꾸리지 않고 행사장 귀퉁이에 상담장만 열었다. 지난해 CES 아시아에서 삼성은 인수한 음향기업 ‘하만’을 앞세워 부스를 꾸렸다. 삼성그룹의 한 관계자는 “신제품이 있어야 들어가는데, 지난 1월 라스베이거스 CES와도 일정이 겹쳐서 후원만 하고 별도 부스를 꾸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LG는 공개 부스를 꾸리지 않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행사장에 내걸린 LG 로고와 간판 주위로 무선 이어폰들이 줄줄이 걸려 있었다. 사실상 중국 동네잔치로 전락한 것이다.

이 같은 분위기는 지난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본행사 때부터 어느 정도 예견돼왔다. 한때 CES는 ‘소비자 가전쇼(CES)’가 ‘차이나 가전 쇼’가 됐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중국 기업들의 참여가 활발했었다. 2018년 라스베이거스 CES 때는 모두 1551개 기업이 참가했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런정페이 화웨이 회장의 딸이자 후계자로 거명되는 멍완저우(孟晩舟) 최고재무책임자(CFO)가 캐나다에서 체포되면서 ‘화웨이 죽이기’가 시작된 이후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지난 1월 열린 라스베이거스 CES에는 중국 기업들이 대거 불참하면서 1211개로 참가기업 수가 줄었다.

미국 소비자기술협회(CTA)가 주관하기 때문인지 중국에서 열리는 ‘CES 아시아’에도 중국 1위 백색가전 업체 메이디(美的)를 비롯해 TCL(TV), 거리(格力·에어컨) 같은 중국의 주요 가전기업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중국계 스마트폰 업체 역시 화웨이만 참가하고 오포, 비보, 샤오미 등은 불참했다. 지난해 ‘CES 아시아’에 부스를 꾸렸던 알리바바도 이번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전기차 관련 기업들의 대거 참여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중국 전기차를 대표하는 테슬라와 비야디(BYD)도 불참했다.

삼성, LG, 소니, 파나소닉, 샤프 같은 메이저 가전기업들이 불참하면서 확 시선을 끄는 신제품이 없는 점도 아쉬웠다. 중국 1위 TV 업체로 글로벌 시장에서 삼성, LG, 소니 등과 경합을 벌이는 하이센스(海信)는 각각 가정용과 상업용으로 쓰이는 100인치와 216인치 초대형 벽걸이 TV를 부스에 선보였다. 하지만 글로벌 TV 시장 1·2위인 삼성과 LG가 이미 선을 보인 8K(가로 화소 수 8000개) TV가 아니고 4K에 불과해 큰 이목을 집중시키지는 못했다. 8K TV는 4K TV에 비해 4배, 풀HD TV에 비해 16배 더 선명한 화질을 자랑한다.

중국 베리실리콘이 선보인 안면인식 기술.
중국 베리실리콘이 선보인 안면인식 기술.

안면인식 기술의 정수 선보인 중국 업체

다른 중국의 유명 디스플레이 기업인 스카이워스(촹웨이)도 초고해상도 TV를 전시했으나 핵심칩은 ‘삼성 엑시노스’를 쓴다고 적어 두고 있었다. 다른 디스플레이 기업인 콘카(캉자)도 가전제품 전시장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유명 백색가전 기업인 하이얼은 자사의 별도 고급 브랜드인 ‘카사르트(Casarte)’를 앞세워 부스 전체를 미래형 스마트홈으로 꾸몄으나 기술과 디자인 면에서 특별히 차별화된 점을 보여주지 못했다. 고급스러운 ‘블랙가전’을 표방했으나 야심 차게 전시한 더블데커 세탁기의 문이 잘 닫히지 않아 참관객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과거의 하이얼 백색가전들이 더 참신해 보였다.

오히려 주목을 끄는 것은 기술력으로 무장한 중국의 기술기업들이었다. 특히 중국 기술기업들은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사물인터넷(IOT), 인공지능(AI), 안면 및 동작인식, 가상현실(VR), 로봇 등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기술 수준을 보여줬다.

상하이 푸둥에 본사를 둔 ‘베리실리콘(芯原)’이란 업체는 안면인식 기술의 정수를 보여줬다. 부스에 있는 CCTV로 다중(多衆)의 얼굴을 동시에 포착한 뒤 성별, 나이, 안경착용 여부, 기분 등을 파악해 스크린에 띄워주는 기술이었다. CCTV는 부스를 찾은 기자의 얼굴을 포착한 뒤 기분만 제외하고 성별, 나이, 안경착용 여부 등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정확히 집어냈다.

한국의 SK가 지난 3월, 6억달러(약 6700억원)에 달하는 대규모 투자를 단행해 유명해진 베이징에 본사를 둔 ‘호라이즌 로보틱스(地平線)’란 업체도 열감지센서, 동공추적을 통한 자율주행 기술을 부스에서 구현해 많은 주목을 끌었다. 호라이즌 로보틱스의 공동창업자이자 부회장인 황창(黃暢)은 행사 둘째 날인 지난 6월 12일 기조연설을 맡기도 했다.

상하이 푸둥 신국제박람중심에 별도로 마련된 스타트업 전시관.
상하이 푸둥 신국제박람중심에 별도로 마련된 스타트업 전시관.

미래형 상점 선보인 쑤닝

중국 최대 가전유통업체이자 알리바바, 징둥에 이어 3위의 온라인 유통업체인 쑤닝(蘇寧)은 미래형 상점을 부스에 구현해 인기를 끌었다. 사과, 바나나 등 각종 과일들이 진열돼 있는 매대에서 과일을 하나 집어들자 과일의 중량 및 가격, 원산지, 수확일자, 운수일자, 진열일자 등이 일목요연하게 디스플레이에 표시됐다. 이와 동시에 과일의 당도 및 단백질, 지방 등 각종 영양성분도 매대 위에 있는 디스플레이에 떠올랐다.

매대에 있는 운동화를 집어들면 옆에 있는 스크린을 통해 다른 구매고객들의 평가를 확인할 수도 있었다. 다른 중국의 신생업체는 상점에 들어선 고객의 성별, 얼굴, 입고 있는 옷차림새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관심이 있을 만한 상품을 미리 제시해주는 기술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다지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흥미를 유발해 고객참여를 유도하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소비자 가전전시회로 시작했지만, 전통적인 의미에서 전자기업보다 자동차 기업들의 참여가 돋보이는 것도 이번 전시회의 특징이었다. 본행사장인 푸둥 신국제박람중심 6개 대형 전시장 가운데 2개가 자동차 분야에 할애됐다. 자동차의 전장화, 내연기관차에서 전기차로 변하는 트렌드를 잘 보여줬다. CES 아시아에 참가한 벤츠, 아우디, 혼다, 닛산 등 글로벌 자동차 기업들은 운전자가 필요 없는 자율주행 시대에 대비한 미래형 자동차의 모습을 제시해 눈길을 끌었다.

아우디의 경우 미래형 자동차를 대거 선보였는데 운전석에 운전대 대신 접이식 테이블을 설치해 태블릿이나 책을 보거나 음료를 마실 수 있게 배려한 점이 돋보였다. 운전대는 수동주행을 원할 때만 테이블 아래서 나오게 설계했다. 운전석과 조수석 옆 사이드미러는 후방 카메라로 바뀌어 있었다. 중국 최대 검색엔진인 바이두(百度)도 자동차관에 부스를 설치하고 자율주행을 도와주는 각종 기술을 선보였다.

현대차그룹은 CES 아시아에 현대차를 비롯 기아차, 현대모비스 등 주력 3사가 모두 각각의 부스를 꾸렸다. 3사의 부스를 모두 합하면 참가 외국 기업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다. 현대차는 수소연료전지차(FCEV) ‘넥소’를 주력으로 내세웠고, 기아차는 지난 4월 상하이모터쇼에 이어 동작인식 기술을 탑재한 미래형 자동차 체험공간인 ‘리드(Read)’를 선보여 큰 인기를 끌었다.

윤경림 현대차 오픈이노베이션 전략사업부장(부사장)은 CES 아시아 개막 첫날 화웨이의 뒤를 이어 기조연설을 맡기도 했다. 첫날 열린 세 개의 기조연설 가운데 화웨이를 제외한 두 개의 기조연설이 현대차와 아우디에 돌아갔다. 윤경림 현대차 전략사업부장은 KT 미래융합전략실장, 글로벌사업부문장으로 일한 IT 전문가로, 현대차가 올해 초 영입한 인사다. 윤경림 전략사업부장은 “현대차는 40여개 스타트업에 투자해 미래 자동차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며 “중국은 오픈이노베이션의 가장 중요한 시장”이라고 말했다.

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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