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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계
[2562호] 2019.06.17

시진핑의 6·25 왜곡

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truth21@empas.com

▲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7년 7월 30일 인민해방군 창건 90주년을 맞아 장병들을 사열하고 있다.(왼쪽) photo Chi.mil
중국 정부와 공산당이 미국과의 무역전쟁을 ‘상감령(上甘嶺)전투 정신’으로 승리하자면서 선전·선동에 열을 올리고 있다. ‘상감령전투’란 6·25전쟁 당시 백마고지전투와 함께 2대 고지전(高地戰)으로 평가받는 전투다. 상감령은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오성산(1062m) 남쪽 저격능선과 삼각고지 사이에 있는 고개다. 이곳에선 1952년 10월 14일부터 11월 25일까지 43일간 미군 제7사단과 국군 제2·9사단이 중국군 제15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당시 중국군은 오성산을 비롯해 저격능선과 삼각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미군 7사단은 삼각고지를, 국군 2사단은 저격능선을 탈환하기 위해 각각 공세를 벌였다. 미군 7사단은 중국군과 삼각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 끝에 탈환에 실패했고, 10월 25일 병력을 철수시켰다. 대신 국군 2사단이 저격능선과 삼각고지를 동시에 맡게 됐다. 국군 2사단은 중국군의 인해전술로 삼각고지 전투에서 후퇴했다. 국군 9사단 30연대가 다시 삼각고지 탈환에 나섰지만 결국 실패해 11월 5일 병력을 철수시켰다.
   
   하지만 국군 2사단은 저격능선에서 Y고지를 제외하고 나머지 고지들을 사수했다. 중국군과의 전투가 소강상태를 보이자 국군 2사단은 11월 25일 국군 9사단과 저격능선에 대한 방어 임무를 교대하고 철수했다. 저격능선 전투에 투입됐던 중국군은 오성산 후방으로 후퇴했다. 이 전투에서 희생된 사상자를 보면 국군 자료로는 2만여명(중국군 1만4815명, 미군과 국군 등 유엔군 4683명), 유엔군 자료로는 2만8000여명(중국군 1만9000여명, 유엔군 9000여명), 중국군 자료로 는 3만7000여명(중국군 1만1529명, 유엔군 2만5498명)에 이른다.
   
   
   ‘상감령전투’의 진실
   
   이런 자료들을 볼 때 국군이 삼각고지를 탈환하지는 못했지만 저격능선을 사수했고, 사상자의 숫자를 고려하더라도 우리가 승리한 전투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중국 정부와 공산당은 삼각고지와 저격능선 전투를 한데 묶어 ‘상감령전투’라고 지칭하면서 6·25전쟁에서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다고 주장해왔다. 특히 중국 정부와 공산당은 상감령전투가 미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이라고 선전해왔으며, 이를 초·중·고 교과서에 싣기도 했다. 그런데 실제로 중국군이 미군과 전투를 벌였던 것은 삼각고지에서 일주일 정도였고 대부분은 국군과의 공방전이었다. 게다가 사상자의 숫자까지 조작했다. 중국군이 엄청난 인명 손실과 미군의 막강한 화력에도 불구하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땅굴 덕분이었다. 물론 중국군이 삼각고지를 빼앗기지 않고 버텼다는 것만으로 ‘승리’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수많은 병사들이 희생된 것을 감안하면 중국 정부와 공산당이 이 전투를 ‘상감령대첩’이라고 선전해온 것은 말 그대로 역사의 왜곡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6년에는 마오쩌둥 주석의 지시로 2시간 분량의 영화 ‘상감령’이 제작돼 전국에 상영됐다. 6·25전쟁 참전으로 대규모 인적·물적 피해를 봤던 중국 정부와 공산당은 인민들의 불만을 막기 위해 이 영화를 통해 ‘상감령 정신’을 강조했다. ‘상감령 정신’이란 ‘어려움을 극복하고 조국과 인민의 승리를 위해 봉헌하는 불요불굴의 의지로 일치단결해 용감하고 완강하게 전투를 벌여 끝까지 승리를 쟁취’하는 것을 말한다.
   
   게다가 중국 정부와 공산당은 이 영화의 주제가인 ‘나의 조국(我的祖國)’을 통해 인민들을 세뇌시켰다. 지금까지도 불리고 있는 이 노래는 2008년 베이징 하계올림픽 개막식에도 사용됐다. 2011년 후진타오 국가주석의 방미 때 백악관 환영만찬에서 중국의 대표적인 피아니스트 랑랑(郞朗)이 이 노래를 연주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 노래 가사 중에는 ‘친구가 오면 좋은 술로 대접하고 승냥이가 오면 사냥총으로 맞아주겠네’라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승냥이는 미국을 말한다.
   
   
▲ 중국이 제작한 6·25전쟁 영화 ‘상감령’ 포스터. photo 베이징일보

   ‘조선전쟁’과 ‘항미원조전쟁’
   
   중국 정부와 공산당이 미국과의 무역전쟁을 벌이면서 6·25전쟁을 소환시킨 이유 역시 중국 정부와 공산당이 그동안 6·25전쟁을 ‘승리한 전쟁’이라고 간주해왔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6·25전쟁을 미국에 맞서 북한을 지원한 전쟁이라는 의미로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이라고 부른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한국의 침략에 맞서 조선(북한)을 구하기 위한 전쟁이라는 뜻이다. 미국 정부가 지난 5월 15일 중국의 통신장비업체인 화웨이를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거래제한 조치를 내리자, 중국 정부와 공산당은 즉각 반격에 나서며 6·25전쟁을 끌어들였다. 중국 관영 CCTV의 전문 영화채널인 CCTV-6은 5월 16일부터 연일 황금시간대에 6·25전쟁을 다룬 영화를 긴급 편성해 방영했다. CCTV-6이 내보낸 영화들을 보면 ‘영웅아녀(英雄兒女)’ ‘상감령’ ‘기습(奇襲)’ ‘빙혈장진호(冰血長津湖)’ ‘철도위사(鐵道衛士)’ ‘창공의 날개(長空比翼)’ 등이다. 장피민 중국영화기금회 이사장은 “70편의 애국영화를 골라 반년 동안 5만차례 방영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중국 정부와 공산당의 의도는 항미원조전쟁에서 승리했듯이 미국과의 무역전쟁에서도 승리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려는 것이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자매지 환구시보의 총편집인 후시진(胡錫進)은 “중·미 무역전쟁이 치열해질수록 우리는 절로 항미원조전쟁을 떠올리게 된다”면서 “3년의 전쟁 중 2년은 싸우며 담판했고, 담판 테이블에서 미국의 고개를 숙이게 한 건 전쟁에서 끝까지 버티는 정신과 성과였다”고 강조했다. 후 총편집인은 “지금이 바로 상감령 정신을 발휘할 때”라면서 “무역전쟁에서 미국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버텨나가자”고 주장했다. 중국 인민해방군 장교 출신이자 화웨이의 창업주 겸 최고경영자(CEO)인 런정페이 회장도 “내년에 교육과 미래에 대한 투자로 뛰어난 인재들을 이끌고 상감령을 향해 진격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상감령 정신을 피력했다.
   
   그렇다면 중국은 6·25전쟁에서 진짜 승리했을까. 중국은 또 6·25전쟁 발발에 아무런 책임도 없는가. 중국은 6·25전쟁을 내전으로서의 ‘조선전쟁’과 국제전으로서의 ‘항미원조전쟁’으로 구분한다. 조선전쟁은 1950년 6월 25일 38선에서 시작돼 같은 해 10월 24일 북·중 국경인 압록강에서 북한의 패배로 사실상 끝났다고 본다.
   
   하지만 중국인민지원군이 같은 해 10월 25일 압록강을 넘으면서 새로운 전쟁(항미원조전쟁)이 시작됐다고 중국은 주장한다. 항미원조전쟁은 압록강변에서 시작돼 1953년 7월 27일 휴전선에서 끝나면서 ‘침략자’(미국)를 400㎞ 이상 몰아내는 성과(?)를 거뒀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중국은 항미원조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2017년 8월 1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인민해방군 창설 90주년 기념 경축대회 연설에서 “인민군대가 항미원조전쟁 등을 승리로 이끌어 국위와 군위를 떨쳤다”고 강조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시 주석은 부주석 시절인 2010년 10월 25일 항미원조전쟁 60주년 기념식에서 “항미원조전쟁은 평화를 지키고 침략에 맞선 위대한 정의의 전쟁”이라면서 “세계 평화와 인류 진보를 지켜낸 위대한 승리”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시 주석의 이런 발언들은 6·25전쟁의 역사적 진실을 호도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6·25전쟁은 김일성과 북한의 남침 때문에 발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유엔 안보리 결의에는 북한군의 선제 무력 남침을 평화의 파괴행위로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다. 특히 “침략에 맞선 위대한 정의의 전쟁”이란 말은 역사적 사료들에서 입증됐듯이 전혀 사실이 아니다. 6·25전쟁은 이오시프 스탈린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마오쩌둥 전 중국 국가주석의 승인하에 기습 남침으로 시작됐다.
   
   
   아직도 공식적으로 ‘북침’ 주장
   
   6·25전쟁 연구 전문가로 1981년 ‘한국전쟁의 기원’이란 책을 펴냈던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한국이 북한을 먼저 공격했다는 북침설은 사실이 아니다”라면서 “오히려 진실은 그 반대”라고 지적했다. 중국 사회과학원도 2013년 말 보고서에서 “북한이 소련의 지지와 중국의 묵인 아래 군사행동을 개시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처럼 중국 학계는 대부분 ‘남침’을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중국 정부와 공산당은 ‘남침’을 공식화한 적은 없다. 중국 인민해방군 군사과학원이 2000년 3권으로 펴낸 ‘항미원조전쟁사’에는 6·25전쟁을 ‘북침’으로 기록하고 있다. 중국 정부와 공산당으로선 북한의 남침을 인정하면 마오쩌둥 전 주석의 결정으로 이뤄진 참전의 정당성을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게다가 중국은 6·25전쟁은 제국주의 침략자(미국)가 중국 인민에게 강요한 전쟁이라면서 침략자가 조·중 국경의 압록강과 투먼강(두만강)을 압박하고 비행기를 출동시켜 동북 변경도시와 마을들을 폭격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런 점도 진실을 왜곡한 것이다. 미군은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16개국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더욱이 압록강을 넘어 중국까지 공격한 것이 아닌데도 ‘미국의 침략’을 거론하는 것은 6·25전쟁 참전을 합리화하기 위한 마오 전 주석의 아전인수식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마오 전 주석은 군부와 당 고위 간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순망치한(脣亡齒寒·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이라는 고사성어를 언급하면서 참전을 결정했다. 그 이유는 미군이 주둔하는 한국과 국경을 맞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마오 전 주석은 미국이 한반도를 점령하고 베트남까지 진출한다면 유사시 동북 3성과 윈난성 양쪽에서 공격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마오 전 주석은 ‘항미원조’에 ‘보가위국(保家衛國·가족을 보호하고 국가를 지킨다)’이란 명분을 추가해 참전했다. 하지만 중국의 참전은 유엔 안보리 결의와 국제사회 규범을 무시하고 북한의 침략전쟁을 도와준 것이기 때문에 정당성을 잃은 행위라고 볼 수 있다.
   
   
▲ 지난 4월 1일 인천시 계양구 17사단 ‘중국군 유해 임시안치소’에서 열린 6·25전쟁 중 전사한 중국군 유해 입관식. photo 뉴시스

   대만 침공 포기 등 중국의 피해 막대
   
   6·25전쟁에 따른 피해는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참혹했다. 한국의 경우 국군 사상자 62만여명, 민간인 사망자 24만여명, 북한군에 학살된 민간인 13만여명, 부상 민간인 23만여명, 북쪽으로 끌려간 피랍자 8만5000여명 등 100만여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유엔군의 피해도 엄청났다. 전사한 3만7000여명과 부상 후 고국에 돌아가서 사망한 군인들까지 합치면 미군의 사망자는 5만4000여명에 달했고 16개 참전국의 사상자를 합치면 유엔군의 사상자는 50만여명에 달한다.
   
   북한도 인민군 사상자 80만여명에 민간인 사상자 30만여명 등 100만여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중국군의 피해도 엄청났다. 중국 정부가 발표한 전체 사상자는 30만여명이지만 실제로는 100만여명에 가깝다는 것이 정설이다. 중국이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투입한 병력은 이른바 ‘윤전(輪戰)’ 방식으로 연인원 240만여명이나 됐으며 비전투 요원 50만여명까지 모두 290만여명이나 됐다.
   
   중국 정부와 공산당은 항미원조전쟁은 당시 최강국인 미국과 대등하게 싸움으로써 국제사회에서 자국의 위상과 지위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인명 손실과 경제적 희생은 너무나도 컸다. 출범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던 중국 정부의 예산에서 국방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1950년 41.1%였다가 6·25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한 1952년 43.0%로 늘어났다. 마오 전 주석은 1953년 7월 정전협정으로 6·25전쟁이 중단되자 곧바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착수했지만 참전의 후유증 때문에 실패했다. 마오 전 주석은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1958년부터 1961년까지 ‘대약진운동’을 벌였지만 중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세계 최하위 수준으로 추락했다. 대약진운동의 결과 수천만 명의 중국 국민들이 아사(餓死)했다.
   
   중국은 또 대만과 통일할 수 있는 기회도 놓쳤다. 1949년 10월 1일 대륙을 해방시킨 이후 대만을 점령하려는 계획을 추진했지만 6·25전쟁에 참전한 대가로 대만 침공 계획을 포기해야만 했다. 중국은 또 국제사회에서 침략자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유엔에 가입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진징이(金景一) 베이징대 교수는 “6·25전쟁에 파병한 신생공화국 중국은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대만과 통일의 기회를 놓쳤으며 미국 등 서방국가들과 수십 년간 적대적 관계로 담벼락을 쌓았다”고 지적했다. 이런 후과(後果)들을 볼 때 중국은 6·25전쟁에서 패배한 셈이다.
   
   
   패배했음에도 승리 주장은 자승자박
   
   시 주석이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승리했다고 포장한 항미원조전쟁처럼 미국과의 무역전쟁에서 끝까지 싸우겠다는 것은 역사의 진실을 외면하는 자승자박(自繩自縛) 행위다. 6·25전쟁 당시 미국의 우세한 화력을 견뎌내며 고지를 사수했듯이 이번 무역전쟁에서도 미국의 강력한 압박을 버텨내며 이른바 ‘인민전쟁’이란 구호를 앞세우고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 승산이 있을 것이란 시 주석의 계산은 오판이다. 중국 관영 언론 매체들은 무역전쟁이 자국 인민 전체가 협박을 받는 인민전쟁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중국 인민들은 자신들의 희생을 볼모 삼아 중국이 애국주의로 세계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에 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시 주석이 미국과 무역전쟁에서 자국 국민의 단합을 위해 반미(反美) 감정의 촉매제로 6·25전쟁을 활용하고 있는 것은 엄청난 아픔을 겪은 한국 국민을 모독하는 것이다. 아무튼 “한반도는 사실 중국의 일부였다”는 주장까지 했을 정도로 왜곡된 역사관을 갖고 있는 시 주석이 미국과의 무역전쟁을 ‘제2의 항미원조전쟁’으로 간주하는 것은 자충수가 될 것이 분명하다. 시 주석은 6·25전쟁의 역사적 교훈을 분명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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