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인종차별만큼 민감한 이슈도 없다. 정치인이 인종 문제와 관련해 말 한번 잘못했다가는 정치 인생이 파탄 나는 건 시간 문제다. 보통 사람들도 일상생활에서 무신경한 표현으로 구설에 오르지 않도록 조심한다. 하지만 금기를 깨는 걸 대단치 않게 생각하는 트럼프 대통령은 이조차도 개의치 않을 때가 많다. 대선후보 시절 무슬림 미국 입국 금지를 주장해 세상을 뒤집어놓고도 대통령이 됐으니까.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트위터에 미국 민주당의 여성 초선의원 4명에게 “너의 원래 나라로 돌아가라”고 썼다. 트럼프가 겨냥한 의원들은 푸에르토리코계인 오카시오-코르테스, 소말리아계 무슬림인 오마르, 팔레스타인 난민 2세인 틀라입, 흑인인 프레슬리 의원이다. 모두 여성이고 유색인종이며 초선의원이다.

트럼프가 공격한 의원들은 당연히 미국인이다. 그중 셋은 미국에서 나고 자란 미국인이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이 정치인들의 원래 출신국을 가리켜 “이들은 정부가 완전히 재앙이자 최악이고 가장 부패하고 무능한 나라 출신”이라고 퍼부었다. “원래 나라로 돌아가 완전히 무너지고 범죄로 들끓는 곳을 바로잡으면 어떤가”라고도 했다.

온라인에는 ‘미국 사람인데 어디로 가라고?’라는 반응이 들끓었다. 하지만 트럼프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자 트럼프의 이런 발언이 재선 전략이란 분석이 나왔다.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 발언이 일종의 ‘편가르기 전략’이라고 했다. 미국 태생 백인들이 기억하는 ‘백인이 주류인 미국’과 ‘인종적으로 다양하고 외국 태생이 점점 많아지는 미국’을 구분함으로써 자신의 지지기반을 다지려 한다는 것이다. 친구와 적을 구분하는 것이 정치의 첫걸음이라고 했다. 트럼프는 ‘백인이 주류인 미국’을 그리워하는 자신의 지지층들을 의식해 이런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트럼프를 당선시킨 2016년 대선은 미국에서 주류이자 다수의 지위를 내놓을 처지가 된 백인들의 입장이 반영된 선거였다. 그해 여름 워싱턴의 한 싱크탱크에서 유색인종이 늘어나는 미국 인구구조가 대선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세미나가 열렸다. 결론은 당연한 얘기지만 ‘백인 기독교도가 주류였던 미국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설명은 이런 것이었다. “지금 우리는 ‘백인 기독교도가 대다수인 미국’의 장례식에 와 있는 것 같다. 앞줄에 앉은 백인들은 슬피 우는데, 뒷줄에 앉은 유색인종들은 환호하고 있다. 백인이 주류의 지위를 잃어가는 상황에 대한 앞줄과 뒷줄 간의 이 현격하게 다른 반응을 어떻게 관리해나가느냐가 미국의 과제이다.”

회의실 전면엔 미국 인구구조 변화를 보여주는 그래픽이 떴다. 청중석에 앉아 있던 은발의 백인 할머니가 손을 들고 일어나서 “내가 어렸을 때는 수십 년 후 우리나라가 이런 미국이 될 거라곤 상상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인종적·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고 포용하면서 성장해온 미국이지만 그 안엔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소셜미디어에 자신들도 “너의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미국 하원은 결국 인종차별 발언을 한 트럼프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의회가 대통령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낸 건 107년 만이라고 한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트럼프의 말이 미국인들 마음에 낸 상처는 그만큼 컸다.

강인선 조선일보 워싱턴지국장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