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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계
[2570호] 2019.08.12

주검 대신 표가 좌우하는 美의 총기 규제

김회권  국제·IT 칼럼니스트 judge003@gmail.com

▲ 지난 4월 27일 미국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열린 전미총기협회(NRA) 연례총회에서 참가자가 신형 라이플을 직접 만져보고 있다. photo 뉴시스
목격자들은 용의자를 두고 “마치 사격 연습을 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21세의 백인 남성인 패트릭 크루시어스는 카고 바지에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사람이 붐비는 지난 8월 3일 오전 10시, 미 텍사스주 엘패소에 위치한 월마트에 들어섰다. 때마침 새학기를 앞두고 쇼핑에 나선 사람들이 많았다. 사격장에서나 착용할 만한 귀마개를 한 그는 소총을 양손에 쥐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총격이 시작됐다. 사고 현장에 있었던 한 시민은 CNN에 “갑자기 탕, 탕, 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말했다. 자동소총을 연속 발사할 때처럼 ‘드르륵’ 갈기는 소리가 아니었다. 정확히 표적을 겨냥하며 총을 쏜 것처럼 총성은 한 발씩 끊어지며 들렸다. 용의자는 살해 의도를 가지고 사람을 노린 ‘액티브 슈터(active shooter)’였다. 짧은 시간 동안 22명이 사망하고 26명이 부상하는 대참사가 엘패소에서 벌어졌다. 이제 태어난 지 4개월 된 아기부터 80대 노인까지, 모두 총기 사고의 피해자가 됐다.
   
   
   수정헌법 2조의 결정체인 NRA
   
이 사건은 미국 총기 사고 역사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대참사다. 다만 충격이 더욱 크게 온 건 일련의 사건들이 마치 도미노처럼 밀려왔기 때문이다. 지난 7월 28일부터 8월 4일까지 일주일 내내 미국 전역은 총격 사건으로 들끓었다. 7월 28일 캘리포니아주 북부에서 열린 ‘길로이 마늘 페스티벌’에서 발생한 총격으로 용의자인 20대 백인 남성을 포함해 4명이 숨졌다. 다음날인 29일 미 중부 위스콘신주 치페와카운티에서 발생한 총격 사건으로 숨진 사람은 5명이었다. 30일에는 미시시피주 사우스헤이븐에 있는 월마트에서 전직 직원이 총을 발사해 2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여기에 8월 3일 엘패소에서 발생한 비극이 더해졌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충격에서 채 헤어나오지도 못한 4일 오전 1시, 오하이오주 데이턴의 중심가에서는 24세의 청년이 반자동 소총을 휘갈겼다. 그렇게 용의자 포함 10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일어났다.
   
   일주일 새 사망한 숫자는 무려 41명이었다. 문명국가에서 벌어진 참혹한 결과는 총기의 자유를 누리는 미국에서 또다시 논쟁을 불러오고 있다. 미국에서 총기 사고가 이토록 잦은 건 어느 나라보다 총기 보유율이 높고 총기를 구하기 쉬워서다. 미국인은 전 세계 인구에서 4% 남짓이지만 공권력을 빼고 계산할 경우 전 세계 민간인 보유 총기의 절반을 갖고 있다. 미국 의회조사국(CRS)이 추정하는 총기만 약 3억정 정도다. 미국에서는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이 미국 역사에서 벌어진 모든 전쟁에서 사망한 사람보다 더 많다는 슬픈 통계가 있다.
   
   이처럼 잊을 만하면 총기 사고가 반복되고 그때마다 미국 사회는 총기 규제 이슈로 들끓었다. 컬럼바인, 산타모니카, 버지니아공대 등 수많은 장소에서 허무하게 사람들이 죽을 때마다 논란은 이어졌지만 매번 별다른 진전 없이 제자리걸음을 해왔다. 가장 큰 장애물은 수정헌법 2조로 똘똘 뭉친 이익단체 전미총기협회(NRA)였다. 수정헌법 2조는 “잘 규율된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State)의 안보에 필수적이므로,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하는 인민의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미 대법원은 과거에 이미 “수정헌법 2조가 전반적인 총기 소지의 권리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으며, 개인용 무기를 소지하는 데 까다로운 조건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판결하며 총기 소유권을 헌법이 보장하고 있다고 인정했다.
   
   총기 사건이 벌어지면 총기 규제로 한걸음 내디딜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스티브 이즈리얼 전 하원의원(뉴욕주·민주당 3선)이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은 그가 겪은 좌절의 과정을 경험으로 녹여내고 있다. 그는 2012년 겨울에 벌어진 사건을 끄집어냈다. 그해 12월 14일 오전 9시40분, 미 코네티컷주 뉴타운에 위치한 샌디훅 초등학교에 20살의 청년이 침입해 총기를 난사했다. 어린이 20명과 교직원 6명, 범인과 범인의 모친까지 합해 무려 28명이 순식간에 사망했다. 어린이 대상 범죄라는 점에서 그 어느 때보다 슬픔이 컸던 사건이었다.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성명을 발표하면서 목이 메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고 끝내 눈물을 보였다.
   
   
▲ 지난해 4월 트럼프 대통령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이후 30년 만에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 자격으로 NRA 연례총회에 참석하는 기록을 남겼다. photo 뉴시스

   공화당 2인자도 주저앉힌 총기 단체
   
   당시 의회 활동을 하던 이즈리얼은 샌디훅 사건 탓에 총기 규제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 여론의 흐름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겪은 의회는 예상과 다르게 돌아갔다. 다른 의원들은 사건의 핵심을 아이들의 생존권에서 총기 소유자의 기본권 보장으로 돌리는 데 애썼다. 이즈리얼은 “다른 의원들은 내게 총기 규제를 지지하는 정치인은 전미총기협회(NRA)에 찍히는데 어쩌겠냐고 말했다”고 떠올렸다. 이즈리얼의 경험이 말해주듯 NRA가 미국 정치에 끼치는 영향력은 익히 알려진 얘기다. NRA는 미국 대선이 있었던 2016년, 미 연방선거위원회(FEC)에 5440만달러를 정치후원금 명목으로 신고했다. 하지만 단순히 돈을 많이 쓰기 때문에 워싱턴이 NRA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다. 더 무서운 무기는 회비를 꼬박꼬박 납부하는 500만명의 NRA 정회원과 이들의 풀뿌리 정치 활동이다.
   
   NRA는 선거철이 되면 ‘총을 소지할 권리’를 옹호할 수 있는 후보인지를 판단해 A부터 F까지 등급을 매긴다. 의회에서의 투표 기록이나 발언, 그리고 NRA가 보내는 설문에 대한 답변 등을 종합해 등급을 결정한다. A를 받는 후보는 NRA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지만 F를 받아든 후보는 그때부터 낙선 운동을 견뎌야 한다. 선거 때가 되면 NRA는 이런 등급을 참고해 500만 회원들에게 문자나 이메일,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후보에 대해 알리고 경고한다. 친구나 지인들에게 입소문을 내는 것도 회원들의 몫이다. 이들이 노리는 건 주로 당내 경선이다. 본선에 비해 투표 참가자들이 적으니 한 표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2014년 공화당의 2인자이자 차기 하원의장으로 유력하던 에릭 캔터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7선)가 중간선거 경선에서 NRA가 지원하는 무명의 데이비드 브랫 후보에게 패한 사건은 NRA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당시 캔터는 2만8902표를 얻어 3만6120표를 얻은 브랫에게 패했고 정치 인생을 갑작스레 접어야 했다. 반면 NRA는 정치인을 유명하게 만들 수도, 반대로 무너뜨릴 수도 있는 정치세력이란 명성을 워싱턴에 증명할 수 있었다.
   
   이렇다 보니 공화당 의원들이 NRA를 거부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2017년 6월, 워싱턴DC 인근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의 한 야구장에서 공화당 원내 총무 스티브 스컬리스 하원의원이 괴한이 쏜 총에 맞는 일이 벌어졌다. 엉덩이에 총을 맞은 스컬리스는 중상을 입고 병원에 후송됐는데 그를 위해 총기 규제 의견을 피력한 공화당 의원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샌디훅 초등학교 사건 이후 총기 구매자의 신원 조회를 강화하자는 법안은 여론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하원을 힘들게 통과했지만 상원의 벽을 넘지 못했다. 주요 법안의 경우 상원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정원 100명 중 60명 이상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당시 총기구매자 신원조회 법안은 56표를 얻어 4표 차로 부결됐고 이게 그나마 미국 의회에서 총기 규제 법안이 ‘통과’에 가장 가까웠던 순간이었다.
   
   샌디훅의 악몽처럼 1주일간 41명이 사망하는 참사를 겪은 미국 사회에서는 ‘이번에야말로 총기 규제에 나서자’는 절박함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상황이다. CNN의 표현대로 ‘미국에 치명적인 날’들이 이어지면서 총기 규제 강화 요구가 촉발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의회가 쉽게 움직일 것 같지는 않다. 워싱턴포스트(WP)의 유명 진보논객인 E.J. 디온 주니어는 그 이유를 정치시스템에서 찾았다. “지금 미국을 석권하고 있는 건 비다수대표제 민주주의(non-majoritarian democracy)다.”
   
   현재 미국의 선거제도 아래서는 총기 소지자가 많은 비도시 지역 선거구가 도시의 선거구보다 훨씬 많다. 그러다 보니 인구가 적은 비도시 지역 의원의 영향력이 대도시의 많은 인구를 대변하는 의원보다 상대적으로 크다. 보통 도시 지역은 총기 규제를 찬성하는 편이다. 도시의 정치인들이 규제를 지지해도 최후에는 규제에 반대하는 비도시 지역 의원들이 막아버린다. 비도시 지역에서 벌어지는 예비선거에서는 총기 규제 같은 뜨거운 쟁점에 유권자들이 쉽게 영향을 받는 경향이 있기에 정치인들은 보수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디온 주니어는 “그간 표결에 가더라도 총기 규제 법안은 비도시 의원들의 반대로 배척돼왔다. 진정한 의미에서 인구 비율을 반영하는 다수대표제 민주주의가 이 나라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공화당 의원들은 NRA의 인질”
   
   의회가 지지부진할 때 대통령이 나서면 풀리는 경우도 있다. 특히 공화당이 배출한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나선다면 분위기가 바뀔 수 있다. 과거 비정치인 트럼프는 총기 규제에 꽤 적극적이었다. 자신의 책에서 “공화당 의원들은 NRA의 인질이다”라고 격렬하게 비판했던 게 대표적이다. 2012년 샌디훅 초등학교 사건 뒤 오바마 당시 대통령이 내놓은 총기 규제 방침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2016년 대선에 출마하고 정치인 대열에 합류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모든 입장은 180도 바뀌었다. NRA에서 1000만달러에 육박하는 ‘자금’과 수백만에 해당하는 ‘표’를 제공받은 뒤 그는 2018년 NRA 총회에 30년 만에 참석한 현직 대통령이 됐다.
   
   지금도 둘의 밀월은 유효해 보인다. 연이은 총기 사고 속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은 ‘총기’와 NRA에 책임을 묻지 않고 있다. 오히려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정신질환과 증오”라고 말했다. 정신을 혼탁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소셜미디어를 지목해 페이스북의 주가를 떨어뜨렸고 게임의 폭력성이 젊은이를 세뇌시킨다고 말해 “전 세계가 게임을 하는데 총기 사고는 왜 미국에서만 일어나는가”라는 조롱도 들어야 했다. 총기 소지를 규제하는 방안 대신 대량 살상 범인들이 신속히 처형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게 트럼프 대통령이 일단 내놓은 대처법이다. 위험인물들에 한해서 총기 소지를 막는 ‘적기(red-flag)법’도 언급했지만 총기 구매자 신원조회 등 반대편에서 오랫동안 요구했던 규제는 언급을 피했다.
   
   오히려 책임은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보다 직접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엘패소의 용의자가 “히스패닉이 텍사스주를 침공한 것에 대한 대응”이라며 범행을 정당화하자 트럼프 대통령의 ‘분열적 언어’가 원인으로 지목됐다. 트럼프가 “나에 대한 비판자들은 정치적 인사들”이라며 정치적 이득을 위한 공격이라고 폄하했지만 점점 트럼프 책임론은 거세지는 분위기다. 미 정치전문 저널리즘인 TPM(Talking Points Memo)이 분석한 결과를 보면 2015년부터 최근까지 발생한 대량 살상 사건 중 적어도 12건은 범인들이 트럼프의 이름을 내걸며 공격했다. 총기 사건의 배후로 대통령이 지목받는 이례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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