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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3호] 2019.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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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일본 운동권 세대들 ‘백서 쓰기’에 나서다

도쿄= 유민호  퍼시픽21 소장·‘일본 내면풍경’ ‘일본 직설’ 저자 silkroad100@gmail.com

▲ 일본 학생운동 2기 전공투 세대가 벌인 도쿄대 야스다 강당 점거 사건. 올해로 50주년을 맞아 70대에 접어든 당시 주역들은 ‘후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라는 백서 쓰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photo 위키피디아
2019년 한국의 허리와 머리는 50대로 채워져 있다. 20여년 전에는 386, 지금은 586, 곧 686으로 불릴 1960년대생(이하 86세대)이 지금 한국의 주역이다. 여러 분야 중 특히 정치는 학생운동 출신 86세대들이 아성을 쌓은 공간으로 보인다. 1980년대 대학에서 들었던 숱한 운동권 단체 출신 86세대들이 정치권에 진입해 활약 중이다.
   
   필자 역시 86세대다. 동시대를 살았다는 이유겠지만 정치권에서 활동하는 86세대들의 면면이 낯설지 않다. 한국이란 나라는 좁다. 이런저런 연(緣)으로 한 다리만 건너면 서로 이어진다. 사실 30여년 전 1980년대 대학생활은 다양성과는 무관했다. 흑백필름 수준의 단순, 획일 시대였다. 독자적 세계관을 쌓을 수 있는 개방된 정보, 즉 인터넷도 없었다. 굳이 정치 분야가 아니더라도 86세대란 이유 하나만으로도 연결될 공통분모가 많다.
   
   필자의 대학생활은 운동권과는 거리가 있었다. 얼떨결에 시위에 참가했다가 다쳐서 4개월간 병원에 입원했던 게 재학 중 학생운동에 관한 유일한 추억이다. 열혈투사가 본다면 가소로운 존재겠지만 대학 시절은 물론 이후 사회에 나가 오랜 외국생활을 하면서도 줄곧 동세대 운동권 출신들을 지켜봐왔다.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다시 정치권에 대거 입성한 86세대를 대하면서 그동안 쌓아온 실력과 세계관이 어떤지 궁금했다. 결론은 ‘기발, 한심, 불쌍’이다. 한국을 들썩이게 하는 ‘조국 사태’에서 보듯이 자식·돈·권력에 대한 남다른 사랑이 기발하다. 또 남의 생각에 눈과 귀를 막고 있는 ‘꼰대’라는 점에서 한심하고, 세상이 몇 번이나 변했는데도 한 세대 전 사고로 살아간다는 점에서 불쌍하다.
   
   
   800만 단카이세대가 주도한 전공투
   
   이웃 일본의 학생운동 세대는 우리 86세대를 밖에서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기에 최적의 비교 잣대다. 한·일 학생운동을 비교해보면 서로 겹쳐지는 부분이 많다. 미국과의 관계가 바탕에 깔린 안보 동맹 이슈에서부터 시위 방식까지 비슷하다. 일본 대학에서 벌어진 반(反)정부 운동의 양상이나 좌익사상, 슬로건들이 일정 시간이 흐른 뒤 한국으로 유입됐다고 보면 된다.
   
   1945년 종전(終戰) 이후로 한정할 때 일본 학생운동의 흐름은 크게 세 시기로 대별된다. 1기 1960년 전학련(全學連)의 안보투쟁, 2기 1968년 도쿄 야스다(安田)강당 시위에서 비롯된 전공투(全共闘)의 반전운동, 3기 군사무장으로 이어진 극좌운동이다. 1기 전학련 안보투쟁의 핵심은 일·미 안전보장조약이었다. 전중(戰中) 세대, 즉 중일전쟁이나 태평양전쟁 당시 태어난 세대가 그 중심에 있었다. 전쟁의 참화를 기억하는 세대로서 안전보장조약이 일본의 재(再)군사화로 나갈 것이라고 우려하면서 극렬 반대했다. 이들은 냉전이 격화되면서 미국의 용병으로 또다시 전쟁에 휘말릴 수 있다는 우려를 했다.
   
   전학련은 원래 일본 공산당 지배하에 있던 대학 청년조직이었지만 상명하복식 공산당 독재체제에 염증을 느낀 지도부들이 쿠데타를 벌여 공산당과는 결별했다. 1955년 이후 전학련은 비(非), 나아가 반(反)공산당계가 조직을 장악했다. 따라서 전학련의 안보투쟁은 공산당과 거리를 둔 정치운동이다. 전학련의 최절정기는 1960년 6월이었다. 전학련의 국회 난입 시위 도중 도쿄대학 문학부 여학생 간파 미치코(樺美智子)가 숨졌다. 8일 뒤인 6월 23일 미·일 안보조약이 국회 비준을 통과하면서 정식 발효됐다. 안보조약을 이끌었던 총리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는 발효와 동시에 자진사퇴하고 곧이어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가 등장해 국민소득 배가운동과 같은 경제 문제에 매진했다. 이후 매년 경제성장률 10% 이상의 고도성장기에 접어들면서 전학련의 정치 활동도 하향길에 접어든다.
   
   제2기 학생운동의 중심은 전공투다. 전후에 태어난 단카이(團塊)세대가 구성원들이었다. 단카이세대는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출생한 사람들로 인구가 800만명에 이른다. 이들로 인해 학생운동이 전학련이 주도한 소수 지식인 중심에서 대중적 차원으로 진화했다. 전공투의 출발점은 도쿄대 의과대학이었다. 1968년 6월 의대생 인턴제도 폐지와 처우개선 문제로 학교 측과 대립하면서 비정치적 운동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시위 진압을 위해 경찰이 대학에 밀고 들어오면서 학생운동이 정치화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불어닥친 베트남 반전운동과 직전의 프랑스 파리 학생시위도 일본 청년들을 달궜다. 전학련과 달리 무장시위도 본격화했다. 화염병이 등장한 것은 물론 책상, 걸상을 이용해 바리케이드로 대학을 봉쇄하면서 ‘대학 해체’까지 주장한다.
   
   전공투운동은 대학생만이 아니라 대입 재수생과 고등학생, 중학생에게까지 확산됐다. 중학생들도 교실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교육 혁신’을 부르짖었다. 주목할 점은 전공투의 명령구조다. ‘논 섹터(None Sector)’, 즉 특정 정파나 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무당파 학생운동이었다. 따라서 중앙에 본부를 둔 상명하복 조직은 아니었다. 전공투란 깃발에 동조하지만 통일된 명령체계가 없었다. 조직원이 속한 학교, 학부, 지역에 맞춰진 수평조직이란 점에서 특이하다.
   
   
▲ 한국의 기득권층으로 떠오른 386세대를 해부한 ‘386 세대유감’.

   반대파 숙청 처단하는 ‘우치게바’ 난무
   
   전공투운동이 시작된 지 불과 1년 만인 1969년 175개의 학교가 여기에 참가했다. 1년 동안 계속된 야스다강당 사건은 교수에게 린치를 가하는 폭력사태까지 불러일으킨 전공투운동의 하이라이트였다. 그러나 전공투운동은 1972년 여름을 기해 한순간 주저앉는다. 전공투의 아류 조직들이 무장폭력운동에 나서고 정부의 대학혁신안이 나오면서 열기가 갑자기 식었다. 특히 미군 점령하에 있던 오키나와(沖繩) 반환은 반전운동을 종식시키는 계기가 됐다. 오키나와를 베트남전 후방기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반전운동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오키니와 주권이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학생운동도 활력을 잃게 된다.
   
   제3기 학생운동은 극좌 과격파 주도하에 이른바 ‘세계동시혁명’에 집중했다. 역시 단카이세대가 중심이었지만 대학생만이 아니라 고등학생들도 중심 조직원으로 나섰다. 이들은 학생운동 차원을 벗어난 테러와 혁명활동으로 치달았다. 전공투에서도 무장시위가 등장했지만 총이나 폭탄은 없었던 반면 3기 학생운동은 군사무장을 주장하는 소수의 신좌익 투쟁주의자들의 손에 좌우됐다. 서로 이념투쟁에 매진하는 과정에서 반대파를 숙청 처단하는 이른바 ‘우치게바(内ゲバ)’도 난무했다. 이념과 조직의 이름으로 반대자를 처형, 살해하는 것이 우치게바의 핵심이다. 내부만이 아니라 다른 이념분파들에 대한 우치게바도 횡행했다. 극좌 과격파의 선두에 선 적군파(赤軍派)는 산에 들어가 군사훈련까지 벌였다. 훈련 도중 조직원 12명을 살해 암매장하는 일도 벌어졌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한·일 두 나라의 현상이나 상황은 총론적으로는 비슷하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달라진다. 학생운동과 관련해 상이한 각론 가운데 필자가 특히 주목한 것은 사회인으로 변신한 학생운동권 출신들의 행적이다. 일본 학생운동은 1970년대를 기점으로 사양길에 접어든다. 한국도 86세대 이후, 즉 1990년대부터 비슷한 상황에 처해진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보면 한국은 86세대, 일본은 1970년대 이전 대학생들이 학생운동의 주역이었던 셈이다. 그러면 한국의 50대, 일본의 70대 이상 운동권 세대는 사회에 편입돼 어떤 식의 삶을 살았을까. 과연 어떤 흔적과 결과를 사회와 국가에 남겼을까.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차이가 두드러진다고 여겨진다.
   
   
   일본의 학생운동은 반(反)권력적
   
   첫째는 정치와 문화 지향성이라는 차이다. 한국은 학생운동이 정치행위였지만 일본은 문화운동 성격이 강했다는 점이다. 한국은 하드웨어적인 정치가 학생운동을 장식했다면 일본은 소프트웨어적인 문화운동의 성격으로 나타났다. 일본인이 말하는 학생운동의 하이라이트는 2기 전공투 활동으로 집약된다. 대학 자치, 부정부패 척결, 학문의 자유를 부르짖던 학생운동이었다. 베트남전 반대를 통해 반미 반제가 핫이슈로 떠오르지만, 당시 대학생 대부분은 반전을 문화운동으로 이해했다. 반전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구미 선진국 젊은이 대부분이 반전운동에 나서는 것을 보면서 시대정신으로 따라갔다고 보면 된다. 미국의 반전 포크송이나 반전·반핵 연극과 영화도 유행했다. 히피의 상징인 장발이 유행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은 독재에 항거한 정치운동에 주력하면서 학생운동 스스로 권력투쟁으로 변질돼갔다. 노동문학·노동가요 같은 문화가 학생운동을 장식했지만 한국 학생운동의 기본적인 속성은 정치와 권력투쟁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는 정치와 분리된 문화운동 그 자체가 학생운동의 큰 테마로 다뤄졌다.
   
   자연스러운 결과지만 한국의 경우 학생운동권 출신 중 적지 않은 숫자가 정치 분야로 진출했다. 특히 문재인 정권에서 86세대는 한국 정치의 중추로 자리 잡았다. 일본은 어떨까. 정치무대로 간 핵심 운동권 인사들은 극히 드물다. 도쿄대 출신으로 야스다강당 사건 당시 학생운동 지도부였던 마에다 가즈오(前田和男)씨는 정치 분야에 진출한 핵심 운동권을 대략 10% 미만이라 말한다. 일반기업 샐러리맨이 30%를 차지하고, 대부분은 언론·미디어·문학·예술·학문·시민운동 영역으로 나갔다고 말한다. 그는 최근 필자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일본 학생운동의 특징이지만, 반(反)권력 정서가 일반적이다. 권력자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학생운동의 근저에 있다. 그런 상태에서 정치가로 일하거나 관료로 나선다는 것은 모순된 행위다. 문화·언론·예술·학문이야말로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동인(動因)이라고 믿었고, 결국 그쪽을 택한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 문화계에서 주로 활약하는 일본 학생운동 출신들. (왼쪽부터) 소설가 무라카미 류, 만화가 야스히코 요시카즈, 작곡가 사카모토 류이치. photo 위키피디아

   학생운동권 출신 문화·예술계 인사들
   
   실제 일본의 문화·예술·언론을 이끄는 60~70대 지도급 인사들의 상당수가 학생운동권 출신이다. 현역으로 활동 중인, 한국인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학생운동 출신들은 아래와 같다.
   
   비토 다케시(ビートたけし): 메이지(明治)대학 신좌익 출신으로 일본 연예계의 대부. 탤런트, 영화감독,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 고등학교 재학 중 전공투에 참가한 인물로, 음악가로 활동 중이다. 영화 ‘마지막 황제(Last Emperor)’의 주제곡 작곡가로도 유명하다.
   
   사토 마사루(佐藤優): 고등학교 때부터 마르크스 좌익 활동에 참가한 인물로, 외교관을 거쳐 현재 일본을 대표하는 정치·외교·문화 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산유테이 엔라쿠(三遊亭圓樂): 아오야마(靑山)대학 당시 급진 사회주의운동에 참가한 인물로, 현재 라쿠고(落語), 즉 만담 분야에서 활동하는 일본 전통문화 계승자다.
   
   테리 이토(テリー伊藤): 니혼(日本)대학 재학 중 전공투 시위에 참가했다. 당시 입은 눈 부상으로 현재 왼쪽 눈이 사시인 상태다. 비토 다케시와 더불어 연출가·극작가·평론가로 종횡무진 활동하는 만능 연예인이다.
   
   무라카미 류(村上龍): 고등학교 재학 중 바리케이드 봉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정학처분을 받았다. 소설가이자 영화감독, TV 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
   
   야스히코 요시카즈(安彦良和): 대학 재학 당시 바리케이드 봉쇄 총책임자로 활동하다가 정학처분을 당했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우주전함 야마토(宇宙戰艦ヤマト)’를 그린, 일본 만화계의 거성으로 통한다.
   
   이노세 나오키(猪瀨直樹): 전공투 의장 출신으로, 이후 소설가로 활동하다가 도쿄도 도지사로도 일했다.
   
   한·일 학생운동의 또 다른 차이는 학생운동의 내용이나 범주를 국내, 국외 어디에 두느냐다. 한국은 주로 국내 문제에 집착한 반면 일본은 국내 문제와 더불어 국제적 관점에서의 결과와 영향력에 무게를 뒀다. 필자의 기억이지만, 1980년대를 통틀어 한국 학생운동이 국제 문제에 관여한 적은 거의 없었다. 반미가 주류지만 구체적으로 미국에 억압받는 제3국에 대한 지지나 후원이 전무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미국의 남미 쿠데타 조종, 구소련의 동부유럽 탄압에 관한 운동권의 생각이나 토론은 핵심 밖이었다. 일본은 어떨까. 베트남전 반대에서 보듯 일본의 학생운동은 이미 국제적 관점에서 시작됐다. 베트남전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한 집단토론도 대학별로 주기적으로 열렸다. 베트남전 반대나 유럽의 68운동에 직접 참가해 나중에 소설로 당시 상황을 묘사한 인물도 있다. 1949년생 단카이세대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틈만 나면 팔레스타인 인권 문제를 거론하고 태평양전쟁과 관련된 아시아의 역사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국제 문제에 천착해온 일본의 학생운동
   
   흥미롭게도 국제 문제와 관련된 일본 학생운동의 하이라이트는 제3기였다. 세계폭력혁명이란 대의명분에 맞춰 활동영역을 전 세계로 넓혀나갔다. 냉전시대 초유의 글로벌 테러집단으로 등장해 싱가포르, 인도,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이탈리아, 필리핀, 쿠웨이트까지 진출했다. 비행기 납치가 주된 활동이었다. 한국인도 직접 목격한 요도호(よど号) 사건 역시 그중 하나다. 1970년 3월 31일 발생한 비행기 납치 사건으로 적군파 요원 9명이 중심인물이었다. 이들은 비행기를 납치해 평양으로 가려고 했지만 기장이 서울에 안착시켰다. 한·일 당국이 협력해 서울을 평양으로 위장, 이들을 공항에서 체포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이들은 공항에 서 있던 미국 비행기를 발견한 뒤 곧바로 기수를 북한으로 돌려 도망갔다. 김일성은 이들 테러리스트들을 혁명영웅으로 대접하면서 ‘공화국 시민’으로 받아들였다.
   
   적군파란 이름이 전 세계로 퍼져나간 것은 1972년 5월이다. 이스라엘 텔아비브공항에서 벌어진 무장 테러사건 때문이었다. 21세기 9·11 동시테러에 필적할 만한 사건으로 사망자 26명, 부상자 73명을 낳은 대형 테러사건이다. 그러나 오히려 일본에서는 이슬람권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된 계기로 작용했다. 일본인 대부분은 이후 학생운동에 등을 돌린다. 적군파들이 테러리즘을 학생운동에 적용한 것은 어찌 보면 일찍부터 터득한 국제 문제에 대한 관심의 결과라 볼 수 있다.
   
   학생운동권 출신의 파워나 영향력이 21세기에도 정치무대에서 통하는 나라로는 한국에 비견될 만한 경우가 없다. 학생운동권 출신들이 누구보다도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과 신념으로 넘쳐나는 듯하지만 현실을 보면 그렇지도 않다. 북한 인권 문제까지 거론하지는 않겠다. 홍콩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주화운동을 봐도, 운동권 출신들은 대부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30년 전 한국에 비견될 만한 상황이 바로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데도 무관심하다. 운동권의 관심이 철저히 국내에 한정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국제 문제에 대한 무관심 덕분이겠지만 외국 유학이나 체험에 나선 운동권 출신들이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는 점도 눈에 띈다. 일본의 단카이세대들은 ‘혁명하는 기분’으로 외국 체험과 유학에 나섰다. 필자가 한때 모셨던 인물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리스트에 올랐던 스탠퍼드대학 교수 아오키 마사히코(靑木昌彦)란 인물이 있다. 이미 2015년 작고했지만 1960년대 안보투쟁을 주도한 학생운동의 대부로 통하는 인물이다. 일본식 자본주의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며 학생운동 이론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흥미로운 것은 대학 졸업 후의 삶이다. 미국 유학길에 올라 미국에서 교수로 활동하면서 일본 경제학의 문제점을 이론적으로 증명해냈다. 말년에는 중국 인민대학 교수로 일하면서 사회주의 경제의 미래를 구축해나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관심은 물론 ‘학생운동-미국 유학-경제학 이론 구축-사회주의 경제학 대가’로 이어지는 아오키 교수의 삶 역시 한국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행적일 듯하다.
   
   학생운동의 공과 과를 역사와 후학들에게 얼마나 정확히, 열심히 전달하느냐도 한·일 운동권의 차이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때 그 시절’ 무용담이 아니라 오늘과 미래로 연결될 수 있는 교훈이자 반성이다. 한국의 86세대들도 반성적인 글들을 남겼지만 개인적 회고사나 무용담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일본의 경우 학생운동사를 기록하는 것 자체가 사회 진출 이후 실행할 ‘제2의 학생운동’으로 평가돼왔다. 주로 글을 통해 작업이 이뤄졌으며 영상·음악·미술 등 다양한 영역을 통해서도 후세에 이어져왔다. 계승·발전으로서의 학생운동이다. 일본에서 ‘지의 거인(知の巨人)’이라 불리는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가 쓴 ‘중핵대혁명마르크스(中核對革マル)’는 학생운동이 과격 좌익분자들끼리의 혈투로 변해가는 양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전학련 반성문’으로 평가받는다.
   
   
   일본의 70대 학생운동 주역들의 ‘백서 쓰기’
   
   올해는 도쿄 야스다강당 사건이 벌어진 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70대에 들어선 당시 주역들의 ‘후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라는 백서 쓰기가 진행 중이다. 야스다강당 사건 25주년째이던 1994년에 이은 두 번째 백서다. 전공투 참가자들이 보내온 설문에 기초한 백서다. 전공투의 의의와 영향, 개개인의 세계관에 대한 75개 질문이 설문에 담겨 있다. 8월 중순 기준, 50년 전 전공투 소속 750여명이 응답했다고 한다. 반(反)권력을 일본 학생운동의 특징이라고 강조한 마에다 가즈오씨는 50주년 백서 쓰기의 실무진이다. 그에게 한국 학생운동을 어떻게 보는지 물어봤다.
   
   “시민운동을 하다가 총리까지 오른 인물이 민주당의 간 나오토(菅直人)다. 일본에서는 실패한 정권으로 통한다. 실례되는 말이지만 1류 운동권 핵심과는 무관한 1.5류, 2류라고나 할까. 2019년 한국 정치가 1류 학생운동권 출신들의 작품인지 여부는 모르겠다. 후세대와의 교류는 학생운동 발전을 위한 기본적 조건이다. 이미 반세기 전 일들이지만, 전공투의 그때 그날을 모두에게 알리면서 반성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역사와의 대화를 한국도 잊지 말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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