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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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티셔츠만을 고집하던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였다. 하지만 지난 10월 23일(현지시각) 멀쑥한 정장을 차려입고 미국 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 청문회에 참석했다. 무려 6시간 동안 진행된 청문회는 페이스북이 실시하고 있는 리브라 프로젝트를 묻고 따지는 자리였다. 그동안 통화는 국가의 것이라는 건 불변의 법칙이었다. 이런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페이스북이 달갑지 않은 듯 위원회 소속 의원들은 매섭게 저커버그를 몰아쳤다. 저커버그는 “리브라는 미국에 도움이 된다”며 “적극적으로 규제를 따르겠다. 규제 당국의 승인을 받기 전까지 리브라를 출시할 계획이 없다”고 공언했다. 페이스북 CEO의 한발 빼는 모습은 시장에 그대로 반영됐다. 청문회 이후 1비트코인(BTC) 가격은 10% 가까이 빠지며 800만원대로 폭락했다.

다시 청문회로 돌아가보자. 위원들은 끊임없이 저커버그에게 “왜 리브라를 만드는가”를 물었다. 저커버그는 그때마다 “리브라는 세계경제에서 미국의 지위를 공고하게 해줄 것이다”라고 답했다. 리브라는 ‘스테이블 코인(stable coin)’이다. 단어 그대로 코인의 가격이 법정화폐와 연동돼 가격이 거의 변동하지 않고 안정된 암호화폐를 말한다. 스테이블 코인은 달러 등 특정 법정통화를 담보로 가치를 보장하는데 리브라는 특정한 법정통화 대신 안정적인 몇몇 법정통화(달러·유로·파운드·엔)를 묶은 통화 바스켓에 연동해 가치를 유지한다. 저커버그의 얘기는 이 바스켓의 대부분을 미국 달러가 차지할 것이고 차후 디지털 기축통화 역할을 미국이 맡을 수 있다는 걸 뜻했다.

리브라 개발에 위협 느낀 시진핑의 발언

저커버그는 청문회장에서 종종 중국을 등장시켰다. 만약 리브라를 선제적으로 서비스하지 않으면 중국의 디지털화폐 공세를 막기 어렵다는 주장을 펼쳤다. “리브라 백서가 공개되자 중국에서는 여러 기업들이 협력해 디지털 위안화를 서비스하려 한다. 우리의 주된 경쟁자가 그들이다”라고 말했다.

저커버그의 말은 중국의 행보를 보면 설득력 있다. 암호화폐 가격의 하락세를 막기 어려울 거라는 부정적인 예측이 나올 때 이걸 단번에 오름세로 돌린 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었다. “블록체인 기술이 디지털 금융과 사물인터넷, 디지털 자산거래 및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고 있다. 중국도 블록체인 기술 개발과 이를 통한 경제·사회 통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저커버그 청문회 다음 날인 10월 24일(현지시각)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중앙정치국 행사에 참석한 시 주석의 발언에 시장은 활활 타올랐다. 주말 새 비트코인 가격은 40% 가까이 오르며 1BTC는 1000만원을 돌파했다.

비록 암호화폐가 아니라 블록체인 기술에 방점을 찍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호재였다. 하나의 블록체인 서비스가 활성화되기 위해 중요한 수단이 되는 게 암호화폐다. 블록체인 생태계가 활발하려면 블록체인에서 구동되는 애플리케이션인 ‘디앱(Dapp)’이 많아야 한다. 암호화폐는 이 생태계 내에서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한다. 시 주석의 발언은 블록체인 기술에 관한 내용이었지만 암호화폐 시장이 덩달아 들썩이는 건 둘 사이의 긴밀함 때문이다. 유명 암호화폐 전문 애널리스트 알렉스 크루거는 “암호화폐 상승이 중국발 뉴스와 관계된 건 분명해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의 인터넷 검색 최대 기업인 바이두 내에서 ‘블록체인’이나 ‘비트코인’이라는 검색 조회수가 급증했다는 분석도 내놨다.

중국의 친(親)블록체인 선언이 놀라운 건 그간 블록체인의 발전을 번번이 막아선 곳이 중국이라서다. 2017년 9월 암호화폐 시장이 활황세를 이어가던 때 자국 내 암호화폐 거래소와 암호화폐공개(ICO)를 통한 자금조달을 전면 금지했던 곳이 중국이었다. 심지어 거래소 임직원들의 해외 여행까지 제한했다. 게다가 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 등 중국 내 주요 모바일 결제 플랫폼에서도 암호화폐 거래를 금지시켜 시장을 얼어붙게 했던 전력이 있다. 통제를 좋아하는 중국 정부에 통제를 벗어날지 모르는 암호화폐는 눈엣가시였다. 포브스는 “중국은 다른 나라보다 자국 금융 시스템에 강한 통제를 원한다. 하지만 암호화폐가 정부의 통제력을 약화시키기 때문에 이를 규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갑자기 인식이 바뀐 걸까. 시 주석의 발언이 나온 이틀 뒤인 지난 10월 26일,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가 ‘암호법’을 통과시키며 시 주석의 발언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었다는 걸 알렸다. 법안은 블록체인 분야에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을 담고 있다. 여기에 더해 ‘상업적 암호화폐 사용을 위해서는 명확한 지침과 규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민간의 활동은 엄격히 통제하고 감시하겠지만 국가의 노력은 장려하겠다는 뜻이다.

시 주석이 블록체인에 관심을 표명한 건 왜일까. 그의 발언 중 한 문장이 많은 걸 담고 있다. “글로벌 발언권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일단 페이스북이 글로벌 코인을 표방하며 리브라 개발에 나선 건 중국에 위협이 됐다. 블룸버그는 “중국은 리브라가 미국 달러 지위를 강화해 중국의 자본 통제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보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리브라의 통화 바스켓에 달러, 유로, 파운드, 엔 등은 포함돼 있지만 위안화가 없다는 게 중국 정부를 자극했다. 한때 미국과 통화전쟁까지 벌였던 국가이기에 암호화폐, 더 나아가 디지털화폐가 구축할 새로운 경제질서에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했다. 외부 질서에 휘둘리는 것보다 자신이 만든 질서로 게임체인저가 되겠다는 뜻이 시 주석의 발언에 드러난 셈이다.

지난 10월 24일, “중국도 블록체인 기술 개발과 이를 통한 경제·사회 통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시진핑 중국 주석의 발언에 암호화폐 시장은 급등세로 돌아섰다. ⓒphoto 신화통신·뉴시스
지난 10월 24일, “중국도 블록체인 기술 개발과 이를 통한 경제·사회 통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시진핑 중국 주석의 발언에 암호화폐 시장은 급등세로 돌아섰다. ⓒphoto 신화통신·뉴시스

“디지털 위안화 곧 발행할 것이다”

암호법이 통과되고 이틀 뒤인 지난 10월 28일, 황치판 중국국제경제교류센터(CCIEE) 부회장은 상하이에서 개최된 ‘상하이 번드 서밋’에서 “중국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이 독자적인 국가 디지털통화를 먼저 발행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라이벌 ‘리브라’를 언급했다. “일부 기업이 리브라를 발행해 국가 통화에 도전하려고 한다. 분산형 블록체인 기반의 통화는 국가의 신용이 지원되지 않기에 진정한 재화가 되기 어렵다.” 중국이 화폐 주권을 보호하기 위해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개발을 시작했다는 보도는 이미 9월에 나온 적이 있다. 한국금융연구원 역시 10월 27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2020년 상반기 중국의 디지털화폐 발행 가능성을 예측했다.

중국 인민은행은 이미 2014년 암호화폐 연구를 시작해 2017년 6월에 ‘디지털통화연구소’를 설립했다, 최종적으로 이들이 개발하려는 CBDC는 이미 성숙 단계에 들어온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 정부는 표면적으로 CBDC가 리브라를 의식한 게 아니라고 말하지만 인민은행은 여러 문서에서 자신들의 디지털통화를 리브라와 비교해왔다. 게다가 올해 9월 인민은행의 디지털통화연구소의 수장을 교체한 뒤 본격적으로 CBDC 개발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는데 리브라 구상이 세상에 발표된 뒤 일어난 일이었다.

그간 중국 정부는 블록체인 기술을 자금유출의 통로로 인식해왔다. 민간이 통로가 돼 자금이 빠져나갈 경우 위안화 가치가 떨어질 수 있다는 시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래서 채택한 게 민간 주도의 블록체인을 통제하고 대신 국가 주도의 블록체인을 활용해 통제력을 키우는 방법이다. 중국 외환관리국의 루레이 부국장은 ‘상하이 번드 서밋’에서 “블록체인과 인공지능(AI)을 결합해 외환 거래에 활용하는 방안을 연구 중”이라며 “리스크 관리에 절대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외환 거래 자유화를 위해 블록체인을 활용하지 않고 통제력 강화에 쓰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중국 외환관리국의 또 다른 간부는 로이터에 “페이스북의 리브라처럼 외환관리를 방해할 수 있는 디지털통화에 대해서는 더욱 강하게 규제할 것”이라고 말했다.

블록체인으로 ‘공산당원 초심 강화’ 나서

중국이 블록체인을 활용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경제적 통제수단을 넘어 사회적 통제수단으로도 도입했다. 지난 10월 26일 시 주석의 발언에 발맞춰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인터넷판인 ‘인민망’은 새로운 서비스를 시작했다. ‘체인위의 초심’이라는 이 프로그램은 공산당 당원들을 위한 블록체인 서비스다. 애플리케이션으로도 나와 있는데, 애플 앱스토어를 보면 “공산당 내의 의사소통과 상호작용을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실시해 당의 관리 작업을 지원하겠다”고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중국공산당에 관한 데이터와 중앙정부의 정책 등을 홍보하고 교육한다. 공산당원은 QR코드를 통해 로그인할 수 있는데 이곳을 통해 소통하고 교류하도록 설계돼 있다. 서비스 이름처럼 여기에는 ‘초심’을 적는다. 당원이 기록한 초심은 블록체인에 남아 영구히 변하지 않는다. 초심을 적은 당원은 세 가지 중 하나의 서비스를 선택할 수 있다. 타임캡슐에 보관해 매년 특정한 날에 기록한 초심을 확인하거나, 자신의 초심을 모든 사람들이 보게 하거나, 미래의 나에게 지정한 날에 메일로 보낼 수 있다. 블록체인이 커뮤니케이션 용도로 활용되는 경우라 할 수 있는데 9000만 공산당원들의 당심을 강화하는 밑거름으로 삼을 모양새다. 초심은 시 주석이 최근 자주 사용하는 말로, 지방을 시찰하거나 회의를 가질 때마다 그는 “초심을 잊지 말자”는 말을 사용해왔다.

시 주석의 발언과 법안 통과, 앱의 배포와 정부 관리들의 지원 사격까지, 불과 일주일 사이 이루어진 중국발 블록체인 굴기 소식이 흥미로운 건 블록체인의 본질과 확연히 다른 중국의 블록체인 활용법 때문이다. 분산원장을 바탕으로 ‘탈중앙화’를 표방하는 블록체인 기술은 권력의 분산과 익명성이 특징이다. 반면 시 주석과 중국 정부는 통제와 모니터링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블록체인을 채택했다. 블록체인 굴기의 정점이 될 인민은행 디지털화폐 CBDC가 실제로는 블록체인을 활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것도 흥미롭다. 블룸버그는 “인민은행 연구원들은 블록체인이 대규모 동시 거래를 지원할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솔로데이(광군절) 하루에만 초당 최대 9만2771건의 거래가 발생하는데, 블록체인으로 대규모 거래를 처리하기가 쉽지 않은 게 문제로 지적된다. 시 주석은 달러에 대항할 디지털 기축통화를 만들어 미국과 싸움에 나섰고 정부가 주도하는 블록체인과 디지털통화라는 점에서 민간과도 대립각을 세웠다. 복잡한 층위의 싸움은 블록체인 굴기의 관전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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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권 IT·국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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