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초 트럼프 대통령이 나토(NATO) 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영국을 방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런던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주한미군 모두를 계속 주둔시키는 게 미 안보 이익에 부합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트럼프의 대답은 “토론할 수 있다. (주둔이든 철수든) 두 방향 다 가능하다”였다. “만약 계속 주둔한다면, 그들(한국)이 좀 더 공정하게 부담을 나눠야 한다”고 했다. 방위비 분담 협상이 한창 진행 중인 상황에서 이 말은 미군 철수 가능성을 열어놨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미국 정부를 지칭할 때 ‘미국’ ‘트럼프 행정부’ 또는 ‘워싱턴’이라고도 한다. 미묘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미국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고 이끌어가는 기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런데 요즘 이 단어가 예전과는 어감이 다르다. 미국 정부라고 하면 예전엔 한 덩어리였는데 요즘엔 트럼프와 미국 정부의 관리들, 두 겹의 정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때로는 대통령과 정부 관리들의 생각이 다른 게 눈에 보인다. 드물게 대통령이 생각을 바꾸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대통령의 뜻으로 수렴한다. 그 과정에서 의견이 다른 사람들은 그만두거나 잘린다.

어떤 복잡한 사안이 진행 중일 때 전문가들의 주장 마지막에 꼬리표처럼 붙는 말이 있다. 트럼프가 어떻게 결정할지 모르니 좀 기다려봐야 한다는 것이다. 시리아 주둔 미군 철군 결정처럼, 군인과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결정을 강행해버리는 경우가 있다. 제임스 매티스 전 국방장관이 막고 막다가 결국 그만둬버린 후 트럼프는 자신의 뜻을 관철했다. 미국 정부는 이런 식으로 계속 트럼프화하고 있다.

트럼프는 일관성과 예측불가능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일관성은 그의 핵심 어젠다에서 드러나고, 예측불가능성은 방법론과 타이밍의 문제이다. 트럼프는 오래 갖고 있던 생각을, 보통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기습적으로 펼친다.

트럼프가 거의 맹목적으로 추진하는 주요 의제는 의외로 견고해서 뿌리가 깊다. 동맹과 해외주둔 미군에 대한 생각이 그렇다.

워싱턴의 싱크탱크 CSIS(전략국제문제연구소)가 올해 초에 발표한 조사를 보면, 트럼프는 1990년부터 이미 동맹국에 미군을 주둔시키는 데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한국, 일본, 나토 등에 미군을 주둔시켜야 할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왔다. CSIS 조사 결과 이 같은 발언을 공개적으로 한 사례가 114번에 달했다고 한다. 이 연구가 발표된 시점이 지난 2월 말이니까 그 사이 횟수는 더 늘었을 것이다.

동맹에 대한 트럼프의 생각이 처음 드러난 1990년 ‘플레이보이’ 인터뷰를 읽어봤다. 당시 트럼프는 43세 억만장자로 세상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대통령이 된다면’이란 가정하에 여러 질문이 나왔는데, 대답 중 동맹에 대한 트럼프의 언급이 있다. “강한 군사력을 강하게 믿지만 누구도 신뢰하지는 않는다. 러시아인도 믿지 않고 동맹도 신뢰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돈 많은 몇몇 나라들을 공짜로 지켜주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본을 지켜주면서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트럼프의 30년 전 인터뷰가 지금 하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 요즘은 미군 주둔을 원하면 돈을 더 부담하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뿐 아니라 일본, 나토도 고심 중인 미국과의 방위비 분담 협상은 그래서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강인선 조선일보 워싱턴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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