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지난 12월 5일 한·중 우호 오찬회가 열린 서울 중구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왕이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지난 12월 5일 한·중 우호 오찬회가 열린 서울 중구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나라사랑 전직 외교관 포럼’은 지난 12월 15일 문재인 정부의 외교정책을 신랄히 비판하는 제8차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외교안보정책을 180도 전환하라’는 제목의 선언문에서 전직 외교관들은 “북한은 연말까지 미국이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지 않을 경우 핵과 미사일 도발을 재개할 것이라고 협박하고, 미국은 북한이 비핵화 약속을 어길 경우 군사적 대응도 불사하겠다고 밝히는 등 한반도의 안보 상황은 2년 전 ‘화염과 분노’라는 말로 표현되던 상황으로 되돌아가게 되었고, 이와 함께 대한민국 외교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고 지적했다. 외교관들은 이어 “이러한 상황이 전개된 것은 북한 정권에 영합하려는 주사파 정권의 본색이 외교영역에 그대로 투사되어 있다는 데 그 원인이 있다. 중국에 대한 사드 추가배치 불허,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 불가입, 한·미·일 3각 협력체제로의 불확대 등 3불(不) 약속도 이러한 연장선상에 있다. 이러한 친중·종북 정책에도 불구하고 이 정권은 북한과 중국으로부터 멸시와 조롱만 받는 존재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김석우 전 통일부 차관을 비롯한 전직 외교관들은 특히 “중국의 왕이(王毅) 외교부장이 방한하여 청와대와 외교부, 기업인들을 상대로 우리의 주권과 국민들의 존엄을 심각하게 훼손시키는 행동을 하여 우리 국민을 분노케 하였다”면서 “문 정부는 1000년의 교훈을 망각한 친중(親中) 정책을 폐기하고, 중국에 대한 3불 약속을 조속히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고종 윽박지르던 위안스카이

한국 전직 외교관들의 지적처럼, 왕이 외교부장은 지난 12월 4~5일 이틀간 서울을 방문하는 동안 한·중 수교 이래 어떤 중국 외교장관도 보여준 적 없는 오만방자한 모습으로 한국민을 분노케 했다. 왕이는 지난 12월 5일 청와대에서 문 대통령을 예방한 자리에서 “현재 국제 정세는 일방주의와 강권정치의 위협을 받고 있다. 중·한 양국은 이웃으로서 다자주의와 자유무역을 수호하고 기본적인 국제 규칙을 잘 준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중국이 한국 대통령 면전에서 한국의 동맹인 미국을 비난한 것은 물론, 한국 정부를 향해 ‘중국 편에 서라’고 압박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큰 외교적 결례를 했는데도, 문 정부는 아무런 언급이나 비판이 없었다. 더구나 ‘일방주의와 강권정치’는 한국에 사드 보복을 가하는 중국이 입에 담을 말이 아니었지만, 이에 대해 문 대통령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

왕이의 이러한 모습은 조선 말 청(淸)나라의 조선총독이었던 위안스카이(袁世凱)가 고종을 윽박지르던 모습을 연상시킨다. 왕이의 외교적 결례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과거 중국 국가주석이나 총리가 방한했을 때 하던 행동을 하는 오만함을 보였다. 왕이는 12월 5일 오전 수행원들과 함께 남산에 올라 약 1시간 동안 조깅을 했는데, 이는 과거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서울에 올 때마다 한강 둔치를 달리던 행동을 흉내 낸 것이다. 왕이는 또 그날 신라호텔 오찬장에 한국 내 친중(親中) 인사 60여명을 긴급히 불러 모아놓고 중국의 대외전략과 대한정책을 홍보하는 발언을 반복했는데, 이는 2014년 시진핑 국가주석의 서울대 특강과 유사한 것이다. 외교부 장관이 과거 국가 정상이 하던 행동을 거리낌없이 했다는 것은 한국을 그만큼 우습게 본다는 얘기다.

‘내가 당신 뺨을 때린 건 내 탓이 아니다’

최근 중국이 한국에 하는 일련의 외교행위는 누가 봐도 ‘한국 껴안기’다. 2017년 말 베이징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에게 ‘혼밥’을 시키고 수행한 한국 기자단을 집단 폭행할 정도로 한국을 냉대했던 중국은, 2019년 10월 리커창(李克强) 총리의 시안(西安) 삼성전자 방문을 계기로 ‘한국 포용’으로 급선회했다. 그로부터 두 달 만에 왕이 외교부장이 한국에 왔고, 곧이어 베이징에서 문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의 정상회담이 열린 데 이어, 12월 24일 청두(成都)에서 한·중·일 서밋이 열렸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지난 12월 25일자에서 리커창-문재인 회담을 리커창-아베 회담보다 신문 지면의 상단에 배치함으로써 마치 한국을 일본보다 중시하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중국의 이러한 ‘한국 띄우기’를 일부 한국 언론은 “중국의 한국 중시”라며 크게 보도하기도 했다. 중국의 숨은 속내를 읽지 못한 한국 언론의 가벼움을 보여주는 사례다.

중국이 한국을 껴안는 목적은, 미국과의 무역전쟁으로 중국 경제가 급격히 악화되는 가운데 한국을 중국 편으로 끌어들여 경제위기 상황을 벗어나려는 것이다. 이러한 중국의 목적은 지난 12월 5일 왕이의 신라호텔 오찬장 연설에서 드러났다. 그는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와 한국 발전계획의 연결을 강화하고,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2단계 협상을 조속히 끝내고, 무역·투자·제조·금융·환경보호·디지털 경제·인공지능(AI) 등 방면에서 실질적 협력을 심화시켜 새로운 성장점을 육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중 관계 발전을 위한 희망사항으로 △높은 정치적 상호신뢰 구축 △수준 높은 양자협력 실현 △수준 높은 다자협력 등 3가지를 제시했다. 한·중 관계를 전반적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자는 것이다. 왕이는 그동안 한국을 괴롭힌 사드 보복에 대해 사과하기는커녕 “미국이 만든 문제”라며 책임을 미국으로 돌렸다. 마치 뺨을 때린 자가 이제 와서 “뺨 때린 건 내 탓이 아니다”며 “더 사이좋게 지내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후안무치(厚顔無恥)한 강대국의 강권적 횡포다. 문제는 이를 받아들이는 한국의 태도다.

‘한국을 껴안아 미국을 돌파하려는’ 전략

현재 국면은 중국이 미국의 경제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국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란 점을 한국 정부는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는 중국이 1989년 천안문(天安門) 민주화 시위에 대한 무력진압 이후 미국 등 서방의 경제제재를 받게 되자, 당시 최고 실세 덩샤오핑(鄧小平)이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한국과의 수교를 적극 추진했던 상황과 흡사하다. 중국의 지금 행동도 ‘한국을 껴안음으로써 미국을 돌파하는(抱韓突美)’ 전략이다. 시진핑 정부는 현재 미국과의 무역전쟁뿐만 아니라 홍콩 민주화시위와 청년층의 취업난, 뱅크런 등 금융 불안, 부동산 버블 등으로 리더십에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점에서 다급한 쪽은 한국이 아니라 중국이다. 그런데도 문 정부는 마치 중국이 무슨 짓을 했든 이제부터 잘해주기만 하면 상관없다는 듯이 2020년 상반기 시진핑 주석의 방한에 목을 매고 있다. 시 주석이 2020년 상반기 방한하면 2014년 이후 6년 만이 된다. 문 정부 출범 이후 처음이다. 중국의 국가주석이 일본을 방문한 것이 2008년 후진타오(胡錦濤) 이후 12년간 없었다는 점과 비교하면, 중국 지도자의 방한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문 정부는 다급함을 보이고 있다. 현 정부는 이미 사드 ‘3불 약속’으로 중국에 군사주권을 포기하고 미사일 방어망을 강화할 때마다 중국의 ‘허락’을 받기로 한 전례가 있어, 앞으로 중국과 또 어떤 약속을 할지 우려되는 상황이다.

문 정부는 출범 후 미국과 일본에는 적성국 대하듯이 ‘까칠하게’ 행동하면서도, 중국에는 한결같이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지난번 왕이 방한 때 양국 정부 간에 모종의 비밀 거래가 오갔을 가능성도 점쳐진다. 가령 중국은 반중(反中)적인 한국 여론을 돌려세우기 위해 사드 보복으로 내렸던 자국인의 한국 여행 제한과 중국 내 한류 공연 제한 등 ‘한한령(限韓令)’을 풀어주겠다는 약속을 문 정부에 했을 수 있다.

최근 서울의 덕수궁과 명동 등지에 중국인 관광객이 크게 늘어난 것을 보면, 이미 중국이 한한령을 풀었을 가능성도 있다. 중국 관광객이 쏟아져 들어오면 최소한 여행-숙박업과 유통업에 ‘가뭄의 단비’가 될 수 있다. 그만큼 중국은 작은 카드로 한국을 움직이는 데 능하다. 중국은 또 지난 12월 24일 청두 한·중·일 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이 리커창 총리에게 제기한 ‘동북아 철도공동체 구상’과 관련, 2020년 상반기 시 주석 방한 때보다 진전된 제안을 한국에 제시할지도 모른다. ‘동북아 철도공동체 구상’이 한·중·북·러의 북방 4각 협력체제로 진전된다면, 미국의 대북제재를 깨고 싶어 하는 문 정부에 중요한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 문 정부는 이러한 ‘중국 요인’을 최대한 활용해 오는 4월 총선에서 국민여론을 최대한 유리하게 돌리려 할 것이다.

중국이 시진핑 방한 대가로 요구할 3가지

하지만 외교란 주고받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판을 훤히 읽는 중국은 자신들이 대미전략상 다급하여 한국에 손을 내밀었음에도, 오히려 문 정부에 도움을 주는 듯한 전략상의 우위를 점할 가능성이 높다. 중국은 문 정부에 “선물을 줄 테니 당신들도 무언가를 내놓으라”고 요구할 것이다. 그것은 크게 3가지로 예상된다.

첫째 사드 철회에 대한 진전된 입장, 둘째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하지 않겠다는 약속, 셋째 화웨이 등 중국산 5G(세대) 이동통신제품의 사용 약속 등이다. 시진핑 방한의 전제가 될 이 3가지 조건은 곧 한·미 동맹을 철저히 약화시키는 요인들이다. 문 정부가 만약 연방제 통일 추진에 중국의 협력을 받기 위해 이런 약속을 해준다면, 트럼프 정부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2020년 상반기로 예상되는 시진핑의 방한은 일개 국가 정상의 단순 방문이 아니라, 향후 한국의 운명, 특히 한·미 동맹의 지속과 파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역사적 사건이 될 것이다.

그동안 문재인 정부가 보여온 ‘반미친중(反美親中)’ 행보는 북핵 문제를 풀어보기 위한 일시적인 외교적 입장이 아니다. 문 정부는 중국의 외교 논리에 동조하고 추종하는 태도를 보여왔다. 가령 문 대통령이 지난 12월 23일 베이징에서 “홍콩과 신장 문제는 중국의 내정(內政)”이라는 시진핑의 발언에 “잘 들었다”며 수긍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 것이 대표적이다. 세계가 우려하는 홍콩의 민주화와 인권탄압 문제에 한국만 중국 눈치를 보며 외면하는 나라가 되었다. 같은 날 시진핑을 만난 아베 일본 총리가 홍콩·신장위구르 문제에 ‘우려’를 표명하고 ‘투명성’을 요구한 것과 대조적이다. 현 정부의 이러한 외교적 입장은 대학 시절 리영희의 ‘8억인과의 대화’를 읽고 중국 공산혁명에 대한 환상을 키웠던 현 정권 실세들의 ‘중국관’과 연결돼 있다. 이들의 눈에 미국은 중국과 북한의 적인 동시에 한국이 분단 극복을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으로 각인돼 있다. 이런 ‘중국관’ 위에서 현 정권은 환경평가를 빌미로 사드를 ‘실전배치’하지 않고 언젠가 철회할 여지를 남겨두었으며, 일본과의 지소미아 파기로 미국의 힘과 의지를 시험해본 것으로 풀이된다.

문 정권의 ‘반미친중’ 외교관이 앞으로 시진핑의 방한이 성사될 때까지 얼마나 대중 ‘저자세 외교’로 나타날지가 걱정이다. 현 정권은 2020년 총선 전 시진핑 방한에 외교의 승부를 걸 것으로 보인다. 현 정부가 그러면 그럴수록 중국의 요구는 많아지고 까다로워진다. 또 그 과정에서 한국을 무시하는 중국의 오만은 하늘을 찌를 것이다. ‘왕이’를 ‘위안스카이’로 만드는 것은 결국 한국이다.

지해범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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