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클랜드전쟁 당시 영국군이 아르헨티나 적진을 향해 기관총을 겨누고 있다. ⓒphoto the Sun
포클랜드전쟁 당시 영국군이 아르헨티나 적진을 향해 기관총을 겨누고 있다. ⓒphoto the Sun

신년 벽두부터 심각한 질문을 던져본다. ‘만일 독도를 일본이 점령하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만일 북한이 백령도를 점령하면 싸워서 다시 빼앗을 건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국가적 위기 상황이 벌어질 경우 우리 정부에 대비책은 있는지 궁금해서다. 역사에는 ‘만일’이 없다지만 정치에는 ‘만일’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제대로 된 국가라면 ‘만일’이라는 가정하에 예상 가능한 온갖 위기에 대한 대비책을 반드시 세워야 한다는 의미다.

필자가 던진 ‘만일’을 가정한 질문에 대한 답은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벌어졌던 포클랜드전쟁을 통해 구할 수 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영국은 포클랜드전쟁의 승전을 계기로 위기를 호기로 삼아 깊은 영국병(英國病·British Disease)을 고치고 국가 부흥의 쾌거까지 이루었다. 당시 영국의 승전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평소 각종 위기에 대한 철저한 사전 대비와 외국 침략에 좌고우면하지 않고 단호하게 대응한 것이 승전의 기초였다.

포클랜드섬의 충돌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는 남대서양 영국령 포클랜드섬을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군인 1만명을 동원해 점령했다. 영국은 즉각 대응해서 단 3일 만에 출병을 했고, 결국 74일 만에 아르헨티나군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고 섬을 탈환했다. 포클랜드는 아르헨티나 해안에서 480㎞, 영국에서는 1만3000㎞ 떨어진 우리나라 전라남도 크기(1만2200㎢)의 섬이다. 인구 1820명, 40만마리의 양들이 사는 이 조그만 외딴섬을 놓고 양국은 74일간 전투를 벌여 아르헨티나군 649명 전사에 1657명 부상, 영국군 255명 전사에 775명 부상이라는 피해를 입었다.

사실 포클랜드섬은 전쟁을 하면서까지 노릴 가치는 전혀 없는 그야말로 황량한 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33년 영국이 섬을 차지한 이후 아르헨티나는 계속해서 영유권을 주장해 영국과의 사이에는 항상 긴장이 있었다. 1982년 전쟁 이전에도 양국 사이에는 이 섬을 놓고 계속 협상이 있어왔다. 당시 아르헨티나가 군사를 동원한 이유는 레오폴도 갈티에리 장군이 이끌던 독재 군사정권이 경제난과 정치위기에 처한 끝에 국민의 관심을 외부로 돌려 국면 전환을 해보자는 이유가 컸다. 포클랜드섬(아르헨티나 말로는 말비나스섬)을 빼앗음으로써 국민들의 애국심을 불러일으키자는 목적이었다.

당시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는 사태 발생 즉시 바로 전시내각을 구성하고 포클랜드섬 주변 해역 320㎞를 전쟁수역으로 선포했다. 아르헨티나군의 침공이 벌어진 지 딱 3일 뒤인 4월 5일에는 영국 전함 100여척이 차례로 군항을 떠나기 시작했다. 선단은 25일 만에 도착해 4월 30일 첫 전투가 시작되었다. 대처 총리는 침공 소식을 듣자마자 의회에 달려가서 “이런 침략은 부스러기 하나의 정당성도 없고 한 조각의 합법성도 없다(It has not a shred of justification and not a scrap of legality)”고 포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포클랜드 주민들은 영국인이고 영국인으로 살기를 원한다. 그들의 염원을 우리가 저버릴 수 없고 저버려서도 안 된다. 우리는 최대한 가까운 시일 내에 섬을 되찾아 그들이 자신들의 의지대로 살게 해주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하면서 국토 수복을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포클랜드전쟁은 영국으로서는 2차 대전 이후 자국 영토에 대한 첫 침공이었으니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없었다. 당시 야당이던 노동당 당수 마이클 푸트도 전적으로 대처 의견에 지지를 보냈다. 물론 영국 내에서도 아무런 효용 가치가 없는 작은 섬을 위한 출병에 반대하는 여론도 있었다. 보수당 중진 중 한 명이 의회에서 대놓고 “전투도 시작하기 전 우리는 포클랜드를 잃어버렸다”고 선언할 정도로 반대 의견이 있었다. 영국의 최고 우방 미국의 전쟁 상황 분석도 영국에 불리했다. 영국 입장에서 포클랜드전쟁은 패전 확률이 승전 확률보다 훨씬 더 높았다. 오랜 항해와 긴 병참 길이, 겨울로 들어가는 기후, 공중 엄호 능력 부족, 부족한 장비 등 영국의 승전 가능성은 정말 낮았다. 뭔가 하나만 잘못되어도 패전할 가능성이 짙었다.

“그날 밤 우리는 정말 몰랐다”

그럼에도 영국 정부는 일단 단호하게 전투선단을 출동시켜 전쟁에 응하면서 동시에 미국의 중재로 아르헨티나와 협상에 들어갔다. 그 결과 외무장관 프랜시스 핌이 아르헨티나와 합의한 안을 대처에게 보여줬는데 대처는 일거에 이를 파기해버렸다. 대처의 표현으로는 중재안이 “우리의 완전 항복(compete sell-out) 문서” “결국 아르헨티나에 섬을 넘겨주는 안”이라는 것이었다. 실제 핌 외무장관은 당시 미국의 입장을 받아들여 이 중재안을 만들었는데 당시 미국은 ‘영국이 만족할 만한 군사적인 해결책을 얻어낼 능력은 의심스럽고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영국을 향한 국제 지지가 금방 사라질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당시 핌 장관은 대처에게 “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승전으로 얻는 소득을 비교하면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얻기 위해 던져주는 대가는 소소하다”고 권했다. 결국 포클랜드를 현실적인 계산을 해서 냉정하게 포기하자는 권유였는데 어찌 보면 당시로선 지극히 합리적인 건의였다.

2012년 포클랜드전쟁 30년 뒤 공개된 서류에 의하면 대처도 당시 엄청난 걱정을 했다. 전투가 승리로 끝난 지 한 달 뒤 열린 ‘포클랜드전쟁 평가위원회’에서의 발언을 보면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대처는 “3월 31일 이미 아르헨티나의 침공이 임박하다는 첩보 보고를 받았는데 내 생애에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절박했던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날 밤 우리가 포클랜드를 다시 탈환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았다. 정말 아무도. 우리는 몰랐었다. 정말 우리는 몰랐었다.(That night no-one could tell me whether we could retake the Falklands - no-one. We did not know - we did not know.)”

결국 혼자서 결정을 내려야 했던 위기의 순간에 지도자의 어려움과 고독함을 토로한 것이다. 아르헨티나 침공에 대한 책임을 지고 영국군 출군 후 바로 사퇴한 전직 외무장관 캐링턴 경도 아르헨티나가 그런 비정상적이고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것으로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평가위원회에서 증언했다. 궁지에 몰려 다른 선택이 없었던 아르헨티나 군사정부의 비정상적인 판단과 결정이 전쟁으로 이어졌다는 말이다. 비합리적인 사람들의 생각을 합리적인 사람들이 읽을 수가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아르헨티나도 당시 제대로 준비를 한 상태에서 침공한 것은 아니었다. 거의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예컨대 남반구의 4월은 겨울이 시작하는 시점인데도 1만명을 동원하면서 장기 주둔할 숙소도 준비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식량도, 군복도 제대로 없었다. 아르헨티나 군대는 전투기간 동안 거의 먹지도 입지도 못하면서 전투를 했다. 모든 면에서 영국군보다 유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패전한 가장 큰 이유를 전문가들은 저하된 장병들의 사기에서 찾는다. 전투 준비도 제대로 안되고, 전투할 의욕도 없는 군인들을 갑자기 겨울이 닥쳐오는 외딴섬으로 밀어넣는 짓은 정상적인 국가라면 하지 않을 일이었다는 말이다.

포클랜드전쟁을 승리로 이끈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2013년 사망한 직후 집 앞에 추모 사진과 화환들이 놓여 있다. ⓒphoto 뉴시스
포클랜드전쟁을 승리로 이끈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2013년 사망한 직후 집 앞에 추모 사진과 화환들이 놓여 있다. ⓒphoto 뉴시스

아르헨티나가 도발한 이유

아르헨티나가 전쟁을 시작한 가장 큰 이유는 영국이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다. 자신들이 포클랜드를 점령하면 최고로 악화됐던 영국의 당시 정치·경제 상황으로 미뤄 절대 군사적으로는 반응하지 않으리라고 오판했다. 아르헨티나로서는 이런 오판을 할 만했다. 1981년 영국은 남대서양의 유일한 작전 전함이었던 앤듀어런스호를 철수시켰는데, 이것도 아르헨티나의 오판을 부른 요소 중 하나다. 전쟁 전 5년간 영국은 포클랜드섬에 대한 특별한 의지 표현을 한 적이 전혀 없었다. 이런 영국의 모호한 태도가 아르헨티나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유리한 판단 착오를 하게끔 만들었다. 아르헨티나의 또 다른 중대한 판단 착오는 미국이 자신들을 적극적으로 돕지는 못해도 최소한 중립을 지킬 걸로 오해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미국은 중재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바로 영국 편으로 돌아섰다. 아르헨티나의 패전에는 이런 미국의 태도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전략가들은 지적한다.

영국 정부가 비상사태를 예상하지 못하고 완전히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영국 국방부는 아르헨티나의 공격이 있기 딱 1주일 전인 3월 26일 아르헨티나의 전면 공격에 대한 격퇴 계획안을 대처에게 제출했다. 이에 대해 대처는 “비상대책안은 항상 만들어야 하는 것이 진리이지만 우리가 그걸 만들자마자 일이 터졌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런 비상대책안이 있었기에 영국은 침공 3일 만에 전투선단을 바로 투입할 수 있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막상 군인들을 실은 전함들이 출항하기 시작하자 당초 전쟁을 반대하던 사람들마저도 분위기가 바뀌었다. 평소 애국심에 냉담했던 사람들마저 여왕과 국가가 어쩌고 하면서 감격해했다. 매번 함정들이 항구를 나서면 사람들이 몰려 나와 유니언잭을 흔들고 감격해서 울기도 했다. 대처를 비난하던 사람들도 대처가 단호하고 과감하게 응전을 하자 칭찬으로 돌아섰다.

시작부터 끝까지 포클랜드전쟁은 영국인의 관심 한가운데 있었다. 출정하던 날 아침 여론조사에 따르면, 88%의 영국인이 ‘섬 주민을 도와야 한다’고 했고, 70%는 ‘필요하다면 아르헨티나 전함을 침몰시켜야 한다’고 했다. 또 41%는 ‘정부는 바로 공격을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2주 후 여론조사 결과는 더 극적으로 바뀌었다. 영국인의 3분의 1이 ‘아르헨티나 본토를 공습해야 한다’고까지 답했고, 심지어 20%는 ‘아르헨티나 본국에 침공해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거의 전 국민이 대처의 포클랜드전쟁 수행을 지지한 셈이다.

사실 영국은 당시 최악의 상태여서 전쟁을 벌일 상황이 도저히 아니었다. 1979년 총선에서 노동당 정부로부터 정권을 뺏은 후 4년 차를 맞고 있던 대처의 보수당 정권은 중증 영국병과 악전고투 중이었다. 당시 언론의 표현대로 영국은 극심한 경제불황의 한복판에서 ‘지치고, 갈라지고, 불행한 국가’였다. 특히 경제는 대공황 이후 최고로 가라앉고 있었다. 실업률은 12.5%(2019년 10월은 3.8%)에 달했고 실업자는 300만명(2019년 10월은 128만명)을 넘었다. 수많은 공장은 불황과 노동조합 파업으로 문을 닫았다. 1981년 북아일랜드 독립운동 수감자 10명이 단식투쟁으로 사망하는 일이 벌어져 아일랜드공화국군(IRA) 주도의 테러가 영국 본토로 번져 민심도 흉흉했다. 보수당은 집권당임에도 불구하고 여론조사에서 사회자유당 연합과 노동당에 밀려 지지율 3위의 신세였다. 당시 대처 정부는 2차 대전 이후 가장 인기 없는 정권으로 다음 총선에서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전망이 나왔다.

전쟁의 승리는 대처의 승리

당시 영국인들도 1982년 이전 10년간 짙어진 영국병으로 이미 희망을 잃은 지 오래였다. 산업기반은 다 무너져 더 무너질 것도 없었고 ‘날이 갈수록 더 가난해지는 나라’ ‘유럽 국가들마저 무시하는 나라’라는 손가락질을 받는 처지였다. 오죽했으면 포클랜드 침공 직후 한 영국 언론이 ‘수치(羞恥)의 정점을 찍었다. 왜소한 영국의 더할 나위 없는 확인(the crowning humiliation, a crushing confirmation of Britain’s insignificance)’이라는 논평까지 냈을까. 그야말로 포클랜드전쟁은 영국에는 거의 설상가상의 재앙이었다. 포클랜드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는 영국이 결국 대영제국의 마지막을 ‘완벽하게’ 창피스럽게 장식하고 끝낸다는 예상도 많았다.

하지만 영국은 최악의 상태에서 벌어진 포클랜드전쟁에서 예상과 달리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전투 시작 한 달도 안돼 영국 군인들의 영웅적인 전투와 아르헨티나군의 작전 실패로 인해 아르헨티나의 패색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1982년 6월 14일 포클랜드 수도 스탠리 주둔 아르헨티나군 여단장이 영국군에 항복하면서 종전이 됐다. 영국 역사학자들은 만일 영국이 포클랜드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면 지금 어떤 모습일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포클랜드전쟁을 통해 영국은 과거의 영광을 다시 찾았다는 의미에서 영국을 포클랜드전쟁 이전과 이후로 가르는 역사학자도 있다. 한 역사 웹사이트는 ‘1982년 남대서양에서의 영국 승리는 제국과 산업기반과 사기마저 잃어버린 나라에 전환점을 만들어주었다(The British victory in the South Atlantic in 1982 was a transformative moment for a nation that had lost its empire, its industrial base and its mojo)’라고 표현했다.

확실하게 승전 이후 영국은 바뀌기 시작했다. 한 유명 언론인이 “그동안 너무 많은 실패만 보도해서 지치고 있었는데 이제 성공을 말하려니 미안하고 부끄럽다. 그러나 신이 난다”라고 할 정도였다. 영국 신문 스탠더드지는 ‘위대함이 영국에 다시 돌아왔다(The Great is back in Britain)’면서 ‘영국 국명(Great Britain)이 다시 제 이름을 찾았다’는 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승전은 대처의 정치적 승리이기도 했다. 한 노동자는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2차 대전 승전 이후 나는 한번도 노동당 아닌 당을 찍은 적이 없지만 대처는 이제 보수당이 아니다. 그녀는 우리와 같은 서민층 출신이다. 그녀는 영웅이다”라고 말했다. 당시 대처 측근들도 대처 칭찬으로 입이 아플 정도였다. “한번 결정되자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Once a decision was reached she did not look back)” “전쟁 기간 동안 대처는 재임 중 어느 때보다 긴장하고 완벽하게 일을 처리했다”는 등 찬사가 이어졌다.

이런 승기를 놓칠 대처도 아니었다. 전쟁 승리의 열기가 가라앉을 때쯤인 1983년 1월 8일 대처는 5일 일정으로 포클랜드를 ‘영웅 자격’으로 방문해서 언론의 각광을 받았다. 자신의 2기 정권을 위한 총선이 열리기 딱 5개월 전이었다. 포클랜드섬에 주둔하는 군인들을 위문하고 주민들을 만난다는 이유였지만, 전쟁 승리의 기억을 다시 유권자들에게 불러일으키려는 속셈이었다. 실제 대처는 그 여세를 몰아 총선에서 이전 의석보다 무려 38석 많은 397석을 얻는 대승을 거두었다. 반면 노동당은 209석을 얻어 1916년 이후 최악의 참패를 맛보았다.

최고의 위기를 부흥의 기회로

대처 정부는 총선 승리를 기반으로 이후 두 번의 총선에서 더 승리하면서 영국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의회 과반수(325석)보다 72석이나 더 많은 의석을 가진 대처가 추진하는 정책을 야당이 막을 방법이 없었다. 적자 국영기업 민영화, 적자 탄광 폐쇄, 퍼주기 식의 사회복지제도 개혁, 공공서비스 개혁, 노동조합 개혁, 금융제도 개방, 법인세 및 소득세 인하, 공공예산 지출 삭감, 공공서민주택 사유화 등 국론분열이 보통 심각하지 않을 정책들을 노동조합과 야당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였다. 포클랜드전쟁 승리를 통해 지도력을 인정받은 대처는 여론의 압도적 지지를 업고 거의 모든 정책을 거침없이 실행했다. 대처로서는 포클랜드전쟁이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이렇게 영국은 포클랜드전쟁이라는 국가 최고의 위기를 국가 부흥의 기회로 만들었다. 그 비결은 평소 모든 위기에 대비해 국가적 준비를 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국토 침해는 협상 대상도 아니고 실지회복만이 최종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국정 철학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위기 상황에서 주저하지 않고 단호하게 대응한 정치인의 지도력을 믿고 힘을 실어준 국민들이 있었다. 이렇게 전쟁을 피하지 않고 승전으로 이끈 국민이기에 ‘해가 지지 않는 제국, 패전해 보지 않은 제국(Never Sunset Empire, Never Defeated Empire)’이라는 말을 한때 들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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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하 재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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