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1일 런던 시각 밤 11시(EU 시각 12시)로 브렉시트(Brexit)가 드디어 이루어졌다. 1973년 1월 1일 회원국이 된 이후 37년 만에 영국은 유럽연합(EU)에서 탈퇴해 더 이상 EU 소속 국가가 아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영국은 아직 완전하게 EU와 이혼한 상태가 아니다. 더 이상 같은 집에 머물 수 없을 정도로 불화가 심해져 간단한 짐을 챙겨 일단 집을 나간 것에 불과하다. EU가 그나마 영국을 으르고 달래서 무단가출(노딜 탈퇴·No Deal Brexit)은 막고 평화로운 별거를 이루었다.
그러나 진짜 이혼소송은 이제 시작된다. 첨예한 이해다툼과 감정싸움으로 고함이 오고 갈 단계는 지금부터다. 제대로 이혼이 되려면 재산분배는 물론 상대방에 대한 위자료와 자녀 친권, 면접권 판결도 받아야 한다. 여기서 재산분배는 유럽투자은행(EIB·European Investment Bank)과 같은 EU금융기관의 주식과 관련된 것을 비롯해 각종 기구에 출자한 영국의 이해 정리 절차를 말한다. 위자료는 영국이 먼저 이혼의 원인을 제공한 가해자 입장이니 그동안 EU로부터 받은 혜택을 반환하는 의미의 금액 정산이다.
위자료 금액은 약 300억파운드(46조여원)로, 2020년 영국 정부예산인 8400억파운드(1289조원)의 약 3.5%에 해당한다. 영국은 2022년까지 EU에 거의 모든 금액을 지불해야 한다. 다음은 자녀 친권과 면접권에 해당하는 교역협정, 어업, 농업, 금융, 정보, 안보 문제 등 해결하지 않고는 절대 넘어갈 수 없는 각종 세부 사안들이다. 각국 국민들의 직접적인 이해가 달려 있어 협정 하나라도 절대 소홀히 할 수 없다.
노딜 브렉시트 되나
문제는 이 모든 협상이 2020년 12월 31일까지 끝나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때까지 협상이 끝나지 않으면 영국의 무단가출인 노딜 브렉시트가 재현될 판이다. 브렉시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하는 이유이다. 정상적인 합의이혼이 연말까지 끝나려면 유럽 27개국(EU27) 의회와 유럽연합 의회의 인준을 위해 10월, 늦어도 11월에는 합의안이 나와야 한다. 그런데 양측 이해가 첨예하게 얽힌 난제들이 산적해 있어 기간 내 합의가 거의 불가능할 거라는 예상이다. 실제 협상은 양측의 내부 준비와 정비를 마친 3월 초나 되어야 가능하다. 실제 협상 기간은 8개월밖에 안된다는 얘기다. EU는 2월 첫 주 영국과의 상세한 협상 방침을 작성, 27개 회원국에 설명하고 2월 내에 동의를 받은 후 3월부터 영국과 협상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영국이 EU 회원국이기 때문에 협상에서 일종의 특혜를 받고 있었다. EU는 이제부터는 영국을 완벽한 비회원국으로 보고 협상을 시작하겠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EU는 최근 회원국 담당 외교관들을 모아 11차례 35시간에 걸쳐 세미나를 가졌다. 명목은 협상안을 회원국 실무 책임자급 200명에게 설명해 이해를 구하는 자리였지만, 실제는 협상에 앞서 단결을 다지는 목적이었다. 각국의 이해가 조금씩 달라 영국과의 협상에서 적전(敵前) 분열을 피해 통일된 목소리를 내기 위한 내부단속 절차인 셈이다.
영국 언론 보도에 따르면 여기서 논의된 EU의 협상 원칙은 간단하다. 영국에 다른 어떤 나라에도 준 적이 없는 전대미문의 무관세, 무쿼터의 거의 자유무역 국가의 자격을 준다. 대신 EU는 영국에 환경 관련 규정, 노동자와 소비자 권리, 정부 보조 제한 등의 몇 가지 중요한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이를 일러 EU는 ‘양보 불가의 유럽연합의 원칙(imperishable EU principles)’이라고 설명했다. EU가 가장 걱정하는 사태는 고삐 풀린 영국의 망동(妄動)이다. 영국 회사들이 EU의 견제를 벗어나 유리한 조건에서 생산하고 판매할 경우 EU 회사들은 영국 회사와 경쟁할 수 없게 된다는 우려 속에 나온 조건이 바로 ‘양보 불가의 원칙’이다. EU와 영국 회사들이 동일한 조건에서 경쟁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를 일러 EU는 ‘기울지 않은 경기장(the level playing field)’이라고 이름했다. 균등한 경쟁 조건의 사업환경을 말한다.
그러나 EU의 지나친 간섭과 규제가 탈퇴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인 영국으로서는 곤혹스러운 조건이다. EU는 만일 영국이 브렉시트 협정을 부정하거나 침해하는 사례가 생기면 벌금을 부과한다는 조항을 포함시킬 방침이다. 해당 사례가 생길 경우, ‘적당한 기간-벌금-경고’ 절차를 거쳐 시정이 안 될 경우 모든 협정을 정지, 파기한다는 방침이다. 영국 우익언론 데일리익스프레스는 이를 ‘최후통첩(ultimatum)’이라고 표현했다. 자유무역의 특혜를 주는 EU로서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조건이니 최후통첩이라는 표현이 틀리지 않는다.
EU와 영국은 이해 분쟁 해결을 위한 독립적인 중재기관 설치를 논의할 예정이다. 기관 설치에는 이론이 없지만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지는 논란이 예상된다. 이 중재기관은 어떤 안건을 유럽사법재판소로 가지고 갈 것인지를 결정한다. 그러나 그 결정에 영국이 따를지는 알 수 없다. 사실 영국의 EU 탈퇴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유럽사법재판소(ECJ)와 유럽인권재판소(European Court of Human Right)의 영국 사법권에 대한 우위적인 지위 문제였다. 양 법원의 결정은 구속력이 있는 최종 결정이기 때문에 무조건 따라야 했다. 심지어 영국 대법원의 결정도 뒤집는 사례가 상당했다. 그래서 ‘EU 회의주의자들이 가장 질색하던 문제’가 바로 이 두 법정이었다. 양 법원 문제를 어떻게 결정하느냐도 다른 사안에 비해 결코 쉽지 않다.
EU27의 각오
2016년 브렉시트 투표 통과 이후 영국 및 유럽 언론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체리피킹(cherry picking)’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골라 빼먹는 ‘곶감 빼먹기’를 말한다. 영국 회사들은 앞으로 EU는 물론이고 비EU 국가들과 교역할 때 ‘새치기 부당경쟁’과 ‘무임승차’을 하면 벌금을 물어야 할 수도 있다. 새치기 부당경쟁과 무임승차는 영국 회사들이 노동조건, 공해와 같은 까다로운 EU 규제를 피함으로써 유럽 회사보다 경쟁우위에 서는 것을 뜻한다. EU는 영국이 다른 나라와 맺은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서도 딴지를 걸겠다는 의도다. 영국 회사가 비EU 국가들과의 자유무역협정으로 들여온 물자를 이용해 생산한 물건이나 서비스가 EU로 들어올 경우 경쟁이 안되기 때문이다. EU로서는 ‘기울지 않은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철저한 분쟁해결제도’를 준비해서 완벽한 협정을 맺어야 한다. 우려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양측이 합의한 협정의 ‘완전 정지와 파기 가능성(the possibility of full suspension/termination)’도 포함할 계획이다. EU는 ‘영국이 자유무역을 존중하게 하기 위해서는 EU의 엄격한 집행제도가 있어야 공정한 교역 조건이 보장된다’는 입장이다.
EU27의 각오는 단단하다. 첫 번째, 영국의 EU 탈퇴 때문에 EU 회사들이 손해 보는 일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영국이 브렉시트 효과가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차후 다른 EU회원국의 탈퇴를 막아야 한다. 프랑스 언론의 표현대로 ‘버릇이 나쁜 작은 아이’는 어떤 식으로든 손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라면 영국은 감정적인 차원의 왕따를 각오해야 한다. 과거 영국 외교의 수준으로 볼 때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영국이 유럽으로부터 집단왕따를 당한 일은 한두 번이 아니다. 영국 우익 언론들은 영국이 ‘견제와 균형’ ‘분리와 통치’를 통해 살아 남은 외교의 달인이기 때문에 이번에도 잘해낼 것이라고 자신한다. 과거 스페인과 싸울 때는 프랑스·독일과 연합하고, 독일과 싸울 때는 프랑스·스페인과 연합하고, 프랑스와 싸울 때는 스페인과 연합했다. 유럽을 각각 싸우게 만들어 영국을 넘볼 여지를 안 만들고 분할통치한 경험이 풍부하다. 이번에도 EU 27개국을 각개격파해서 서로 반목하게 만들어 영국 편에 서게 하면 된다는 식이다. 절대 영국을 상대로 EU가 합의를 못 만들어내게 하겠다는 전략이다. 과연 영국이 그를 위해 얼마나 양보를 해야 할지는 영국 외교관들의 협상 능력에 달려 있을 듯하다.
영국 재무장관 사지드 자비드는 “브렉시트 이후 영국은 브뤼셀 규정으로부터 이탈해 EU 규정을 따르지 않겠다”고 공공연히 말한다. 영국의 이해를 위해서는 EU와의 갈등도 불사하겠다는 각오이고 경고이다. 영국 데일리익스프레스는 지난 1월 21일자에서 ‘EU의 처벌-EU는 보리스 존슨의 브렉시트 이후 계획을 망치기 위한 징벌적인 제재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를 싣기도 했다. 양측 모두 속내를 숨기지 않고 양보 없는 일전을 불사하는 만큼 혈흔이 낭자한 전쟁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누가 더 상대를 필요로 하나
협상의 관건은 현 상황에서 누가 더 상대를 필요로 하는가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영국이 훨씬 불리하다. EU는 그냥 해오던 대로 하면 되지만 영국은 무(無)의 상태에서 새로 시작해야 한다. 2016년 6월 브렉시트 투표 가결 이후 1만6000명이 경비 15억파운드(2조3000억원)를 쓰면서 밤낮으로 준비해 왔다고 하지만 준비가 미흡한 것은 사실이다. 영국은 EU 이외의 국가들과는 무역협정을 하나하나 다시 맺어야 한다. 세계 20대 경제규모 국가 중 영국과 무역협정을 맺은 국가는 한국(12위), 스위스(20위)뿐이다. 기타 50여개국과 체결했다고는 하나 교역량으로 봐서 실리가 없는 숫자에 불과하다. 미국, 일본, 중국, 인도 등과는 협상이 전혀 진전이 안되고 있다. 그들은 영국이 더 급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는다. EU의 눈치도 보고 있다. 영국으로서는 미국과의 협상이 EU와의 브렉시트 협상보다 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 시점에서 한국이 너무 조급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상황들을 봤을 때 영국은 EU와의 이혼 협상에서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 2020년 12월 말까지 브렉시트 마무리 협상이 체결되지 않아 결국 노딜 브렉시트가 될 경우 누가 더 피해를 보느냐만 봐도 답은 간단하다. 교역량으로 보면 영국이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영국 수출의 50%가 EU국가들과 이루어지는 데 비해, 영국은 EU국가 총 수출금액의 10%밖에 되지 않는다. 단순 계산으로 영국이 EU에 비해 5배는 더 불리하다. 더구나 영국은 식품의 3분의 2를 EU국가로부터 사오고 있다. 만일 유럽이 아닌 나라들로부터 수입할 경우 물가상승은 물론 대규모 혼란은 피할 수 없게 된다.
EU가 가장 강하게 나올 분야는 어업과 농업 쪽의 규제이다. 영국의 대응도 만만치 않다. EU 규정 때문에 마을 앞바다에서 물고기를 못 잡는 어민들과 별로 도움도 안되는 유채꽃을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키워야 하는 농민들이 동의하지 않는 협정에 영국 정부도 합의할 수는 없다. 브렉시트 투표가 51.9 대 48.1로 통과된 가장 큰 이유는 EU의 간섭에 지친 농민과 어부들의 찬성 투표 때문이라는 분석이 거의 정설이니 말이다.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존슨 총리는 협상 타결을 자신하고 있다. 현재 영국 의회를 통과한 브렉시트법에는 타결 시한을 2020년 12월 말로 아예 못 박고 있다. 배수진을 치고 협상에 임한 셈이다. 결연한 의지를 보임으로써 협상 고지를 선점하려는 뜻이다. 영국 진보언론 가디언은 이를 “자신의 손발을 묶어 놓고 경기를 치르려고 하는 어리석은 짓이다”라고 혹평하고 있다. 협상 기한을 연장하려면 오는 7월 1일 이전에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현재 양측의 협상 자세를 봐서는 누구도 먼저 시한 연장을 말하지는 않을 것 같다. 상대적으로 느긋한 입장인 EU가 먼저 나설 리는 없다. 영국도 국내의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시한 연장을 요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브렉시트 마지막 단계에서 웃지 못할 코미디가 있었다. 데일리메일이 브렉시트 날인 1월 31일 영국의사당 웨스트민스터 빅벤 타종을 제안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도 동조했다. 영국에서는 항상 큰일이 있을 때 빅벤 타종을 했다. 그러나 존슨 총리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의회는 50만파운드(7억5000만원)나 드는 빅벤 타종 예산을 배정해 줄 수 없다고 반대했다. 결국 탈퇴파 그룹이 크라우드펀딩을 시작했다. 존슨 총리는 영국 공영방송 BBC와의 인터뷰에서 ‘빅벤 타종을 위해 돈을 모으자(Bung a bob for a Big Ben bong)’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모금에 불을 붙였다. 모금은 27만2000파운드가 모였으나 금액도 모자라고 시간도 없어 결국 종은 울리지 못하고 반대파의 비웃음만 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