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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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후 신부가 신랑의 성(姓)을 따라서 개명하는 것이 일반화된 일본에서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는 걸까. 지난 1월 20일 시작된 일본 정기 국회에서 화제가 된 것은 야당 대표의 ‘선택적 부부별성(夫婦別姓)제’ 도입 주장이었다. 이때 자민당 여성 의원이 이를 비난하는 야유를 하면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일본 제2야당인 국민민주당의 다마키 유이치로(玉木雄一郎) 대표는 지난 1월 22일 중의원 ‘대표질의’ 때 결혼율 제고를 위해 선택적 부부별성제를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행 일본 민법 750조는 일본인끼리 결혼을 하면 남편 또는 아내의 성을 따른다고 규정돼 있다. 이에 근거해 일본에선 기혼여성 95% 이상이 남편의 성을 쓰고 있는데, 이를 개정해야 결혼율은 물론 출산율도 증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젊은 남성이 교제 중인 여성으로부터 ‘성을 바꾸어야 하기 때문에 결혼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며 이같이 제안했다. “법률적으로 부부동성제를 택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일본밖에 없어서 결혼에 장애가 되고 있다”고도 했다. 그는 “부부별성제로 결혼율을 올리는 것이 저출산 국난(國難) 돌파 대책”이라며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에게 이와 관련한 입장을 질의했다.

다마키 대표가 연설을 하는 도중 갑자기 자민당 의석에서 여성 목소리로 “부부별성제가 문제라면 결혼하지 않아도 돼”라는 ‘야지(일본 정치권에서 주로 쓰이는 말로 야유를 의미)’가 나왔다. 이를 들은 다마키 대표는 야유 내용을 공개하며 이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그러자 일본의 신문·방송 기자들이 나서서 선택적 부부별성제 주장에 대해 야유한 여성 의원을 찾아냈다. 문제의 의원은 자민당의 스기타 미오(杉田水脈) 의원으로 지목됐다. 올해 53세로 자민당 여성국 차장을 맡고 있는 재선의원이었다. 일본 기자들은 스기타 의원으로부터 해명을 들으려 했지만 그는 아무런 입장표명을 하지 않은 채 도망 다니기를 1주일 넘게 반복하고 있다. 그는 1월 28일에도 기자들로부터 관련 질문을 받았지만 “말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죄송하다”라고 하며 빠져나갔다.

지난 1월 22일 열린 일본 정기 국회에서 부부별성제 반대 발언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킨 자민당의 스기타 미오 의원. ⓒphoto 아사히신문
지난 1월 22일 열린 일본 정기 국회에서 부부별성제 반대 발언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킨 자민당의 스기타 미오 의원. ⓒphoto 아사히신문

저출산 대책으로 부부별성제 부각

정치적 호재를 만난 야당은 이에 대한 자민당 차원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논란이 확산되고 있음에도 자민당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자민당은 이번 사건이 동료 의원에 대한 비방, 중상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러자 아베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아사히신문이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부각시키고 나섰다. 아사히신문은 지난 1월 25~26일 정기 여론조사를 실시하면서 선택적 부부별성제에 대한 질문을 포함시켰다. 그 결과 선택적 부부별성제에 대해 찬성 69%, 반대 24%로 나와 자민당이 여론의 직격탄을 맞고 있는 것이 드러났다. 부부별성제에 대한 아사히신문의 2015년 12월 조사에서는 찬성 49%, 반대 40%였다. 2017년 4월 조사에서는 찬성 58%, 반대 37%였는데 이번 논란을 겪으면서 격차가 크게 벌어진 것이다. 이번 조사에서 부부별성제에 대해선 자민당 지지층에서도 63%가 찬성했다. 반대는 31%에 불과했다. 남성도 66%가 찬성했다. 50대 이하 여성은 80% 이상이 찬성이라고 답변했다.

야당 대표의 연설과 자민당 여성 의원의 야유가 촉발시킨 부부동성제는 메이지(明治) 정부의 근대화 유산이다. 메이지 정부는 1898년 영미계 국가의 부부동성제를 그대로 받아들여 이를 법제화했다. 최근 서구에서는 여권(女權)이 신장되면서 선택적 부부별성제가 보편화됐다. 하지만 한번 정한 것을 잘 바꾸지 않는 일본에서는 사회적 문화로 정착됐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2015년 “부부동성제는 일본 사회에 정착된 것으로 가족의 호칭을 통일하는 것은 합리성이 있다”며 합헌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최근 일본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면서 부부동성제에 대한 문제제기가 거세지기 시작했다. 여성이 결혼하면 운전면허증, 예금통장 등을 모두 새 이름으로 갱신해야 하는 데 대한 불만이 커졌다. 이혼율 증가와 함께 재혼하면 다시 성을 바꿔야 하는 것에 대해 문제가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부부별성제 도입이 결혼율 제고로 즉각 연결되지는 않지만, 이 같은 문제로 결혼을 주저하는 여성에겐 유인책이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것이 현실이다. 일본에서 부부동성제로 인해 결혼을 망설였다는 여성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2018년 니혼TV가 부부동성제를 꺼리는 여성이 ‘사실혼’ 관계로 지내는 것을 선호한다는 특집방송을 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지난해 참의원 선거에서는 야당뿐만 아니라 연립여당인 공명당도 부부별성제 도입을 주장했다. 하지만 보수성향의 자민당은 사실상 반대 입장이다. 아베 총리는 지난 1월 22일 다마키 대표의 질의에 대해 “부부동성제는 일본의 가족제도와 깊이 관련이 있다. 국민 사이에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므로 신중하게 대응하겠다”며 사실상 거부의사를 밝혔다.

최근 자민당은 세금으로 진행되는 행사에 당 핵심부의 후원회 인사들을 대거 초청한 ‘벚꽃을 보는 모임’ 스캔들, 중국 기업으로부터 불법자금을 받은 카지노 스캔들로 인해 곤경에 처해 있는데 이번 사건까지 터져서 곤혹스러운 분위기다. 일부 여성들이 부부동성제 때문에 결혼을 꺼리고 있는 상황에서 당 소속 여성 의원이 이를 지지하는 야유를 한 것이 알려지면서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야당이 연일 이를 물고 늘어지자 아베 신조 총리가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국회 대책위원회에 이에 대한 대응을 맡기고 싶다”고 언급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이번 사건은 일본 정국을 흔드는 대형 이슈는 아니지만, 여성과 젊은층 사이에 자민당의 고루한 이미지를 더욱 강하게 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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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원 조선일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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