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9일 마스크를 쓴 한 남자가 텅 빈 뉴욕 맨해튼 5번가를 걷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3월 29일 마스크를 쓴 한 남자가 텅 빈 뉴욕 맨해튼 5번가를 걷고 있다. ⓒphoto 뉴시스

‘하이퍼볼릭 디스카운팅(hyperbolic discounting)’이란 단어는 행동경제학의 기초가 된다. 먼 미래보다는 가까운 미래에 더 큰 가치를 두는 심리를 뜻하는 말이다. 만약 내일 8만원을 얻을 수 있고 일주일 뒤에 10만원을 얻을 수 있다면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까. 일주일 뒤 10만원을 얻는 게 합리적인 것 같지만 의외로 당장의 8만원을 선택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훗날의 큰 보상보다 당장의 작은 보상을 택한다면 하이퍼볼릭 디스카운팅이 작동한 셈이다.

이런 경향은 낯선 게 아니다.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 갖고 있는 심리인데, 유독 강한 사람들이 있다. 2014년 뇌과학 전문 학술지 뉴로이미지(NeuroImage)에 실린 논문은 당장의 보상을 강하게 원하는 사람들이 갖는 특징을 설명했다. 크게 두 가지 특성이 두드러졌다. 하나는 ‘양심’이다. 대체적으로 비양심적인 사람들이 당장의 보상을 원하는 경우가 강했다. 두 번째는 정서적 불안정이다. 감정적으로 불안한 사람들이 당장의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컸다. “신경질적이거나 예민한 사람은 당장의 8만원을, 양심적인 사람들은 일주일 뒤의 10만원을 선택할 것이다”로 정리할 수 있다.

이런 심리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설명할 때 하나의 잣대가 될 수 있다. 뉴로이미지의 연구 방법론은 2019년 다시 한번 등장한다. 미 시사지 디애틀랜틱은 2019년 정치학자 두 명의 사례를 전했다. 이들은 60명의 학자들에게 뉴로이미지 연구에 사용한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트럼프의 성격을 평가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결과를 모아봤더니 트럼프 대통령은 양심과 정서적 안정성에서 매우 낮은 평가를 얻었다. 하이퍼볼릭 디스카운팅이 강한 부류란 얘기이고 미래에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해 당장의 이익을 미루는 데 참을성이 없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의 정책을 보면 수긍이 가는 부분이 있다. 주한미군 방위비 문제도 그런 사례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존 방위비 분담금의 5배가 넘는 50억달러를 한국에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국 내에서도 우려가 나오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상태다. “분담금 협상 타결이 지연될수록 미국에 의문을 품는 동맹국과 경쟁자들에게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는 장기적 결과는 50억달러라는 단기적 숫자보다 뒷순위로 밀려난 상태다.

“왜 재선 가능성 스스로 떨어뜨리나”

코로나19를 대하는 자세라고 다를까. 트럼프는 그동안 바이러스로 생기는 공중보건 문제를 정치적 후순위로 둬왔다. 이런 판단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의 말을 정리해 보면 “재선할 거면 저러면 안 되는 거잖아”였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데이비드 레온하르트도 그중 하나다. 그는 “트럼프가 바이러스를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길 거부한 것 중 가장 이상한 점은 그 판단이 그의 재선 가능성을 현저하게 떨어뜨리고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트럼프가 가장 신경 써야 할 것은 오늘의 지지율이 아니라 미국인들의 11월 투표 때 지지율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이 코로나19 위협을 경고한 시점부터 이 혼란을 억제하기 위해 광범위한 조치를 취했다면 여름이 지나 미국인들이 투표장에 나가는 늦가을쯤에는 경제가 반등하는 시나리오도 가능했을 텐데 이해할 수 없다는 게 레온하르트의 주장이다. 그 역시 트럼프가 무엇을 두려워한 건지 안다. “단기적으로는 경제와 그의 인기에 타격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당장의 결과는 재선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부활절(4월 12일) 이전에 경제를 정상화하기 위해 코로나19 관련 지침을 완화할 수 있다”는 발언 때문에 논란이 일어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폭스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부활절까지는 이 나라가 (경제활동을) 재개하도록 하고 싶다”고 말했고 “우리는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말하는 지침이란 사회적 거리 두기와 관련된 것들로 정부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제시한 것이다. 10명 이상의 모임은 피하고 레스토랑 외식이나 여행 등을 자제하자는 구체적인 사항들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기한을 설정한 건 흥미를 끄는 지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금까지 결정을 내리기 전 기한을 설정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이었다. 협상에서 기한을 정해놓으면 자신의 입장을 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부활절을 마감 시한으로 정했다. 주가 폭락과 경제 침체로 상당히 조바심이 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이었던 경제, 특히 실업률이 이제는 단번에 약점으로 바뀔 확률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는 재선을 위해서 중장기 국가 보건 대책보다는 당장의 경제지표가 중요하다는 뉘앙스를 여러 번 내비쳐왔다. 워싱턴포스트는 부활절 경제 재개 언급이 나오자 “트럼프 대통령이 감염 전문가보다 경제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경제 퍼스트, 코로나 세컨드’의 길을 택한 셈이었는데 결국 코로나19보다 재선용 선거 대책을 우선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당장의 이익을 선택한 이 결정은 공화당 내부에서도 공감을 얻지 못했다. 탄핵 문제부터 대법관 지명까지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며 스피커가 되어준 린지 그레이엄 공화당 상원의원도 부활절 재개 결정에는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우리가 바이러스를 통제하지 않는 이상 경제가 기능하는 일은 없다”고 그는 트위터에 남겼다.

학계도 우려하긴 마찬가지다. 마이클 미나 하버드 공중보건대 교수는 “우리는 가능한 위험요인을 어떻게든 틀어막으며 조심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지금 이 순간에 어떤 위험이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가 뭐래도 ‘우린 상관없어’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염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방정부는 일제히 시기상조라고 반발했으며 일부 언론들은 대통령이 가을 대선을 앞두고 도박을 벌인다고 비난했다.

지난 3월 30일 미 해군 병원함 USNS 컴포트가 뉴욕항에 정박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3월 30일 미 해군 병원함 USNS 컴포트가 뉴욕항에 정박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전쟁통 같은 뉴욕 상황에 깨달음

그런데 갑자기 경제 퍼스트, 코로나 세컨드가 서로 자리를 바꾸었다. 지난 3월 29일(현지시각)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가능한 한 집에 머물라는 백악관 지침을 4월 30일까지로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그는 “앞으로 2주, 모든 사람이 보다 강력하게 백악관의 가이드라인을 준수하는 게 중요하다. 당신이 더 잘할수록 이 끔찍한 악몽은 더 빨리 끝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제는 ‘코로나 퍼스트, 경제 세컨드’가 됐다.

왜 바뀌었을까. 앤서니 파우치 미 국립 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장의 설득이 먹혔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는 1984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때 연구소장을 맡은 뒤 6명의 대통령들과 함께 일할 정도로 롱런한 전설적 인물이다. 그가 다룬 전염병만 에이즈부터 에볼라까지 수십 년을 관통해 있다. 파우치는 전염병을 가볍게 여기는 대통령의 발언에 반박하는 인물이었고 트럼프 지지층은 파우치가 “위험을 너무 과도하게 가정한다”며 공격하곤 했다. 코로나 정국에서 보수 언론의 주된 먹잇감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의 시뮬레이션이 먹혔다. 지난 3월 29일 대통령 집무실에서 “미국에서 최대 24만명이 죽을 수 있다”는 예측 모델을 보고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수용했다. 그전에 뉴욕의 상황도 트럼프의 마음을 돌리는 데 한몫했다. 미 인터넷매체 악시오스는 “뉴욕 병원의 코로나19 치료 현장을 보고 트럼프가 부활절에 관한 뜻을 접었다”고 보도했다. 마치 전쟁통 같은 뉴욕의 상황을 TV 화면을 통해 본 뒤 이게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번 결정에는 또 다른 통계가 사용됐다고 한다. 백악관 참모들이 제시한 유권자 통계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유권자들이 이른 경제활동 재개로 직장에 조기 복귀하는 것보다 봉쇄조치 유지를 압도적으로 선호한다는 여론조사를 보여주었다”고 전했다.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코로나19가 주는 부정적 영향을 제한하기 위해 현재의 고통을 참아도 좋다고 받아들이는 중이다. 그런 미국민의 장기적 희망이 정치인 트럼프에게는 단기적 이익으로 역할할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부활절 계획을 접는 게 정치적으로 유리했다.

지난 3월 31일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 코로나19 사태 대응책을 밝히고 있는 앤서니 파우치 미 국립 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장. ⓒphoto 뉴시스
지난 3월 31일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 코로나19 사태 대응책을 밝히고 있는 앤서니 파우치 미 국립 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장. ⓒphoto 뉴시스

20만명이 죽고 200만명을 구한 대통령?

부활절 계획을 접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연장하면서도 그의 발언에는 정치 캠페인이 숨어들었다. 지난 3월 29일 기자회견에서 트럼프는 220만명이란 숫자를 언급했다. “사망률이 2주 안에 최고조에 달할 수 있다. 적절한 조처를 하지 않는다면 220만명이 사망할 수 있다는 예측 모델이 있다”고 운을 뗐다. “어떤 사람들은 220만명의 사망자, 그것보다 더 높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말한 대로 하면 10만~20만명으로 줄어들 수 있다. 그 정도로 유지될 수 있다면 아주 잘한 일(good job)이 될 것이다.”

20만명도 많은데 220만명을 도입한 걸 두고 정치 마케팅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디애틀랜틱은 “트럼프 대통령이 11월 대선을 위해 새로운 계획을 발견했다. 220만명 중 20만명의 미국인이 죽고 대신 200만명을 구했다는 걸 자랑한다면 많은 미국인들이 그를 영웅으로 여길 것”이라고 꼬집었다.

어느 나라든 위기 때일수록 국민들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친다.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은 코로나19 부실 대응 논란에도 상승세를 타고 있다. 지난 3월 29일 워싱턴포스트(WP)와 ABC방송이 공개한 여론조사를 보면 트럼프 대통령은 바이든 전 부통령의 양자 가상대결에서 45% 대 47%, 단 2%포인트 차로 지고 있는 것으로 나왔다. 한 달 전 같은 조사에서는 7%포인트 차로 뒤지고 있었다. 매일매일 코로나 사령관을 자임하며 미디어에 등장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다만 위기가 반드시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다. 1980년 11월 대선에서 재선에 도전하던 지미 카터 대통령이 패했던 건 위기관리를 제대로 못해서였다. 1979년 11월 발생한 주이란 미국대사관 인질 사건이 해결된 건 사건 발생 1년3개월 만인 1981년 1월에서야 가능했다. 인질 사건을 거치면서 카터 대통령 지지율은 급락했고 대선에서는 치명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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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권 국제·IT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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