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하직원들에 대한 갑질 논란을 일으킨 영국의 파텔 내무장관. 총리감으로 거론되던 인도계 4선 하원의원이다. ⓒphoto 뉴시스
부하직원들에 대한 갑질 논란을 일으킨 영국의 파텔 내무장관. 총리감으로 거론되던 인도계 4선 하원의원이다. ⓒphoto 뉴시스

영어에는 정확하게 우리말의 ‘갑질’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다. ‘jobworth’라는 단어가 있긴 한데 ‘완장질’이라는 뜻에 더 가깝다. 사실 완장질에 가장 적합한 영어 단어는 ‘power trip’이라고 따로 있다. 그러나 두 단어 모두 광의로 해석해야 우리말의 ‘갑질’에 가까운 뜻이 된다. 결국 우리말의 갑질에 해당하는 정확한 영어 단어는 없다고 봐야 한다. 이를 가지고 영국 사회에는 ‘갑질이 전혀 없다’라고 말할 근거는 되지 못하지만 실제 영국 사회에서는 갑질이 드물다. 물론 관료들이 법과 절차를 너무 엄격하게 고집하는 ‘지나친 관료적 형식주의’를 이르는 ‘red tape’라는 표현이 있긴 하다. 하지만 우리가 통상적으로 쓰는 갑질의 의미와는 좀 다르다.

이인자 사무차관 몰아내려 흑색선전

민간기업에서도 드문 갑질 사례가 최근 영국 중앙행정부처 내에서 벌어져 영국 조야가 시끄럽다. 그것도 주요 장관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내무부 장관(Secretary of State for the Home Department)의 갑질 사건이니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장래 총리감으로 거론되는 인도계 영국인 여성 4선 하원의원인 프리티 파텔 장관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부하직원들을 상대로 학대 수준의 갑질을 했다는 사건이다. 장관의 갑질 대상은 휘하 직업 관료로는 최고봉인 33년 경력의 필립 루트남 사무차관(permanent secretary)이었다.

루트남 차관은 지난 2월 29일 사표를 내면서 그동안 장관이 자신을 몰아내기 위해 언론을 이용해 벌인 각종 공작을 폭로했다. 차관의 폭로는 조용히 사표 쓰고 물러나던 영국 정관계의 통례로 보면 거의 동반 투신자살 수준의 초유 자폭이었다. 동시에 차관은 정부를 상대로 간접해고(constructive dismissal) 소송을 걸었다. 차관 사표 사건이 터지자 언론들은 파텔 장관의 부하 직원들에 대한 과거와 현재의 갑질 사례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했다. 물론 장관은 자신에게 몰리고 있는 차관 관련 공작 혐의와 갑질 논란을 근거 없다고 부정했다.

영국 언론은 루트남의 사임을 ‘전대미문의 극적 사임(unprecedented dramatic resignation)’이라고 표현했다. 이미 파국이 충분히 예상된 상태여서 전혀 돌발적인 사건은 아니라고도 보도했다. 영국 대표 대중지 더선(The Sun)은 이미 지난 3월 28일 자에 ‘내무부 최고위 관료가 내무부 장관에게 표명한 엄청난 브렉시트 업무량 염려를 두고 둘 사이에 충돌 폭발’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는데 이로 인해 내무부가 폭풍전야라는 것을 천하가 다 아는 상태에서 사건이 터졌다.

파텔 장관은 도대체 무슨 공작을 했다는 말일까. 지난 2월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파텔의 ‘작전 일지’를 가디언지가 날짜별로 열거했는데 일단 지난 2월 20일 자 타임지에 파텔 장관 측근이 기자들에게 비보도를 전제로 전한 루트남에 대한 혹평이 보도되었다. 이에 따르면 장관 측근은 “내무부는 현재 마비상태(dysfunctional)이고, 차관은 해고당해야 할 뿐 아니라 연금마저도 박탈당해야 한다”라고 혹독하게 비난했다.

2월 23일 자 텔레그라프에는 “차관은 장관의 모든 정책에 하도 부정적이어서 별명이 ‘닥터 노(Dr. Noㆍ007 제임스 본드 영화의 악인 중 한 명)’라고 불린다”는 평가도 등장했다. 또 “장관의 정책 제시에 거의 70%는 ‘재판에 질 아이디어’라고 부정적으로만 대응했다”는 기사도 나왔다. 또 “차관은 소신이 분명하고 강한 여자와는 도저히 일을 같이 못 하는 너무나 지나치게 신중하고 전형적인 형식주의에 물든 특권의식의 구체제 관료”라는 지적도 등장했다. 루트남 차관은 사지드 자비드 남성 장관(전 재무부 장관으로 재무부 장관 직전 내무부 장관을 1년3개월 역임)과는 잘 맞았는데 후임 여성 장관들과는 계속 불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특히 파텔 장관 전전임인 러드 장관을 10개월 만에 사임하게 만든 음모의 주인공이라는 폭로도 나왔다.

루트남 차관 사임 바로 전날인 2월 28일에는 더선지 칼럼이 ‘루트남 차관은 뉴 필립 하몬드 이요르(Philip Hammond Eeyoreㆍ필립 하몬드는 테리사 메이 정부에서 재무부 장관을 지낸 보수당 중진으로 항상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반응을 자주 보인 정치인, 이요르는 영국 동화 ‘곰돌이 푸’에 나오는 항상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당나귀)다’라는 장관 측근의 비난을 인용하기도 했다. 이 같은 일련의 보도들을 보면 파텔 장관이 작정하고 언론을 통해 사임 압력 공작을 벌인 셈이다. 이런 일련의 언론 공작을 차관이 모를 리가 없었다. 결국 2월 28일 더선지 기사 제목처럼 ‘충돌이 폭발’했다.

왜 파텔 장관이 굳이 이런 방법을 써서 사임 압력을 가했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냥 인사이동을 시키거나 해고하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국 중앙행정부 차관, 특히 사무차관 자리는 장관은 물론 총리도 함부로 할 수 없다. 그래서 과거에도 장관이 고분고분하지 않은 수하 고위 공무원을 길들일 때는 언론을 이용해 악의적인 정보를 흘리는 방법을 썼다. 이를 일러 영국 언론은 ‘브리핑(briefing)’이라고 한다.

존슨 총리는 파텔 장관 지지

차관의 폭로에도 불구하고 파텔 장관은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난 3월 4일 보리스 존슨 총리는 파텔 장관을 해임하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그녀를 지지한다. 그녀를 전적으로 믿는다’고 옹호하면서 사임 압력을 막아줬다. 그러나 사건의 비중에 비춰 전례 없이 긴 5일 장고 후의 반응이라 이런 결론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내부 진통을 겪을 만큼 곤혹스러운 사건인 듯하다는 것이 언론의 추측이다. 특히 이 사건이 차관 사임으로 망신만 당하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데 존슨 정부의 고민이 있다. 간접해고 소송이 진행되면 영국 정부 권력 핵심 인사들이 법정에 출두해서 선서하고 증언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영국 권력의 핵심 일인자인 도미니크 커밍스 총리 수석보좌관은 물론 존슨 총리 본인도 법정에 출두해 증언해야 하니 보통 일이 아니다. 거기다가 소송 당사자가 권력의 핵심 인사들이어서 증언과 증거가 모두 민감한 사안이기도 하다. 결국 언론 표현대로 ‘내의를 만천하에 내걸어 말려야(likes airing its laundry in public)’ 하는 존슨 총리 정부로서는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 곤혹스러운 일은 존슨 총리의 최측근 장관으로 인한 위기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데 있다. 내각의 이인자이자 총리 영순위로 꼽히는 재무부 장관이 항명성 사임을 해서 총리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 지 딱 2주일밖에 안 돼 또 따른 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12일 브렉시트 완수를 내건 도박성 조기총선에서 사전 예상을 뒤집고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후 새로 짠 내각 진용이 지난 2월 13일 사지드 자비드 재무장관 사임으로 일단 흔들렸고, 그로부터 2주일 만에 또다시 사건이 터졌다. 자비드 재무장관은 자신의 직속보좌관 5명의 자리가 없어지면서 총리특별보좌관 팀으로 흡수되는 수뇌부 개혁안을 거부하고 사임했다. 물론 자비드 장관은 유임된다는 것이 개혁안의 조건이었지만 재무부 정책브레인들이 영국 정부 최고 실세인 도미닉 커밍스 총리 수석보좌관의 통제로 들어가는 식의 권력다툼에서 진 결과다. 자비드 장관은 “자존심 있는 장관이라면 누구도 그런 조건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영국 고위 정치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감정적인 사임사를 남기고 사퇴했다.

파텔 장관과 루트남 차관 둘 사이의 충돌은 관점에 따라 강한 신념의 정치인 장관이 야망을 펼치려 하자 관료로 뼈가 굵은 능구렁이 사무차관이 계속 저지를 해서 생긴 사건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래서 파텔 장관을 옹호하는 여론도 있다. 그러나 부하에게 계속되어온 학대성 갑질로 인해 현재 영국 언론과 정계의 여론은 파텔 편이 아니다. 특히 파텔의 갑질은 이번 내무부 장관 때만이 아니다. 그전 행정부 직책을 맡았을 때도 그녀가 직속 하급부하들을 괴롭힌 일은 원래 유명했다. 노동연금부 고용차관일 때 파텔의 학대로 음독자살을 시도한 직원에게 정부가 2만5000파운드의 보상을 해준 적도 있었다. 국제개발부 장관 시절에도 ‘직원 얼굴이 보기 싫다’는 이유로 해고했다고 동료들이 말한 적이 있다. 이들 모두 이번 루트남 소송건에 나와서 증언하겠다고 약속했다.

인도계 여성 4선 의원은 ‘마녀 상사’였다

국제개발부 장관 시절 그녀에 대한 부하 직원들의 악평을 언론이 모아놓은 것을 보면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회의 중 참석자를 일부러 모욕하고 아주 공격적인 이메일을 밤중에 보냈다. 도저히 맞출 수 없는 시한을 주고 보고서를 만들어 내라는 일이 다반사였다. 거칠고 요구가 많은 장관은 물론 잘못된 것이 아니다. 개인에 따라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는 것과는 다르다. 그녀는 그 선을 넘기를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무례와 몰상식으로 부처 내에서 욕을 많이 먹었다. 직원을 다루는 일로 그보다도 더 증오를 받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정말 역겨웠다(She was just vile). 그녀가 장관으로 있던 때는 국제개발부의 가장 극심한 암흑기였다.” 파텔이 국제개발부 장관에서 물러났을 때 부처 내에서는 ‘딩동! 마녀가 죽었다(Ding Dong! The Witch is Dead!)’라는 오즈의 마법사 영화에 나오는 노래가 자동으로 터져 나왔다고 직원들은 기억했다.

직원들이 기억하는 악평은 이 밖에도 많다. “그녀는 그걸 즐기거나 옳다고 느끼는 듯했다. 공무원들이 무사안일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악쓰고 욕하고 무시하고 무리한 요구를 하고 같은 요구를 계속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행동을 당연시했다.” 또 파텔은 수시로 “왜 여기 있는 모든 직원이 더럽게도 쓸모없는가(Why is everyone so fucking useless?)”라고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고 한다. “꺼져(get lost), 내 앞에서 사라져(get out of my face)”라고 악을 쓰면서 아무런 이유 없이 공격 성향을 드러내고 걸핏하면 직원을 해고시켰다는 증언도 있다. 성탄절 날 수석홍보관을 해임하라고 루트남 차관에게 지시했으나 성탄절이라고 거절한 사건도 기자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이 정도의 욕설이나 고함과 행악은 정말 영국 사회에서는 드문 일이다. 개인 회사에서는 물론 관공서 같은 공적 기관에서는 더더욱 볼 수 없다. 심지어 영국 드라마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의 튜더(Tudor) 시대극에서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그만큼 영국 사회에서 이런 정도의 악질 상관은 개인 기업에서조차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다. 그러니 파텔의 부하 직원들이 받았을 충격과 고통은 당해 보지 않은 영국인들은 믿기지 않을 만큼 충격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파텔에 대한 일반 여론이 나쁠 수밖에 없다.

그러면 파텔은 왜 이렇게 행동했을까. 일단 그녀의 야망과 과다한 업무량이 원인이라는 분석이 많다. 현재 영국 내무부는 가장 일이 많은 부처이다. 브렉시트 마무리가 12월 말까지 끝나야 하는 2020년은 거의 전시(戰時) 수준이다. 단 10개월 사이에 새로운 이민 및 비자 등의 입출국 관련 제도, 국경 관리, 320만명의 영국 내 유럽 국민 문제에 관련된 제도 및 법령 정비, 테러 범죄 문제를 비롯한 안전보장과 관련해 유럽과의 협정도 준비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목표 달성을 위한 정치인 장관의 무리한 요구를 이해해야 한다는 동정론도 있다. 동시에 루트남 차관의 지나치게 신중한 태도를 비난하는 여론도 있다.

그러나 실무 책임자인 차관은 이런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를 소홀하게 준비할 수도 없으니 당연히 장관에게 ‘염려’를 계속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존슨 총리가 오는 12월 말로 끝내야 하는 브렉시트 시한을 절대 연장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탓에 업무 압박은 실제 공무원들이 져야 한다. 내무부 공무원 전원의 입장을 대변해야 하는 사무차관으로서는 당연히 고충과 걱정을 장관에게 가감 없이 전해야 했다. 그러나 정치인 장관은 존슨 총리의 뜻도 있고 자신도 장관으로서 기한 내에 일을 완수했다는 실적을 내어 스타로 등장하고 싶은 욕망과 야망이 없을 수 없다. 그런데 나이 든 고위 관료가 드러내 놓고 사사건건 안 된다고 딴지를 걸고 나오자 참던 노여움을 폭발시킨 셈이다.

파텔 장관과 맞서다 사표를 쓴 루트남 사무차관. ⓒphoto 뉴시스
파텔 장관과 맞서다 사표를 쓴 루트남 사무차관. ⓒphoto 뉴시스

정치인 장관의 개혁에 저항한 터줏대감

물론 존슨 총리 입장에서는 파텔이 자신의 정책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존슨 총리가 재선하고 난 뒤 첫 취임 일성이 바로 ‘행정부(White Hall) 개혁(shake up)’이었다. “정신 차려라, 그렇지 않으면 수주 내로 해임하겠다”가 일성이었다. 존슨 자신이 정치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고위 관료들의 무사안일과 복지부동을 이번 기회에 손보겠다는 각오를 밝힌 셈이다. 외무장관 시절에도 고위 관료들의 텃세에 부딪혀 일을 처리하지 못한 경험을 많이 토로했던 존슨이었다. 그래서 행정부 개혁 특히 고위 관료들을 정리해서 새 피를 수혈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였다.

실제 루트남 차관 사건이 나기 딱 일주일 전인 2월 23일 테리사 메이 정부에서 브렉시트 장관을 했던 데이비드 데이비스 하원의원이 BBC에 나와 존슨 총리가 가장 중요한 사무차관 3명의 살생부(hit list)를 가지고 있다고 폭로하는 일도 있었다. 3명은 영국 정부의 가장 중요 부서인 재무부, 외교부, 내무부에서 잔뼈가 굵은 정통 관료들이다. 해당 자리에서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을 지낸 안방마님들이다. 3명 모두 영국 최고의 명문대학교인 케임브리지대를 졸업했고 특히 이번 사건의 주인공인 루트남 차관은 영국 최고의 사립중고등학교인 덜위치칼리지를 나온 후 케임브리지대와 하버드대에서 수학한 금수저 출신 전문 관료이다. 이들 정통 관료들의 연봉은 총리 연봉(하원의원 세비 8만1932파운드 + 총리 수당 7만9468파운드=16만1400 파운드ㆍ 2억4200만원)보다 많은 17만5000파운드나 된다. 하지만 이런 살생부 루머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사임을 한 루트남 전 차관 말고는 아직 모두 자리를 지키고 있다. 브렉시트 마무리 협상과 예기치 않은 코로나19 사태 등으로 고위 관료들을 자르지 않고 현상유지를 선택한 상황에서 가장 업무량이 많은 내무부에서 제일 먼저 사고가 터진 셈이다.

영국 정부의 사무차관 권한은 장관과 맞먹는다. 내무부 사무차관의 경우 내무부 내의 모든 정책 수립 및 실행은 물론 직원들의 건강, 안전, 복지까지 책임지는 최고위 직위이다. 영국의 장관은 전원 하원의원이 맡지만 사실 장관은 장관실에서 결제하고 실무를 일일이 챙길 시간이 없다. 영국 의회는 부활절, 여름, 성탄 휴가를 빼고 나면 항상 열려 있어 장관은 거의 매일 의회에 가 있어야 한다. 거기다가 수시로 총리 관저에서 열리는 내각회의에도 참석해야 한다. 직원들 입장에서는 장관은 왔다가 가는 과객이고 차관은 계속 있는 실질적인 주인이다. 그래서 3만5000명 내무부 직원들에게는 차관이 실질적인 최고 상관이다. 영국 정부의 차관은 한번 자리를 잡으면 10년은 계속 유임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장관에게 사무차관은 쉽게 대할 수 있는 부하가 아니고 장관이 마음대로 거취를 결정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다.

거의 모든 내무부 업무를 해결하는 것도 결국 차관들 몫이다. 특히 내무부는 오랫동안 ‘장관들의 야망의 무덤(a graveyard for ministerial ambitions)’ 혹은 ‘광채 나는 관(glittering coffin)’이라는 악명으로 불려왔다. 내무부 장관을 끝으로 정치 생명이 끝난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최근 20년간 2년 이상 재임한 장관은 6년을 버틴 뒤 바로 총리로 올라선 메이 총리밖에 없다. 그 어려운 자리에서 오랫동안 잘 버티면서 성공적인 실적을 쌓은 덕분에 메이는 총리 물망에 제일 먼저 올랐다는 평이다. 가장 일도 많고 공무원 숫자도 많다 보니 탈도 많고 말도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잘해 봐야 본전이라는 말이 나오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성공적으로 끝내면 장래가 보장되는 ‘양 날의 검’ 같은 자리이다.

누가 와도 변하지 않는 보수적 내무 관료들

내무부 관료들은 보수적이기로도 유명하다. ‘과거 지향적인 폐쇄사회라 내무부 장관으로 누가 와도 정책이 변화하지 않기로 정평이 나 있다’고 내무부 전문 기자가 칼럼에 쓸 정도다. 심지어는 이런 농담도 있다. “신임장관이 와서 왜 범죄가 안 줄어드느냐고 하니 ‘경제가 좋아서 그렇다’고 했다. ‘경제가 좋은데 왜 범죄가 느느냐’고 하니 ‘경제가 좋아서 사람들이 좋은 것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훔칠 게 많아서’라는 답이 관료로부터 돌아왔다. 그래서 장관은 ‘그럼 경제가 나쁘면 범죄가 줄어들겠네’ 했더니만 ‘아니다, 경제가 나쁘면 뭔가 훔쳐야 사니 범죄가 늘 수밖에 없다’는 대답이었다.” 어떤 식으로 해도 범죄를 줄일 수 없다는 신념 같은 것이 내무부 내에 존재하더라는 노동당 출신 전직 내무부 장관의 토로다.

이런 내무부를 파텔 장관이 개혁하려다가 반발에 부딪힌 셈이다. 장관의 측근은 “루트남 차관은 어떤 일을 직접 말로 하지 않고도 못하게 막는 데는 선수이다. 안 된다고는 절대 하지 않는다. 그냥 ‘으응 그런데 장관님, 그건 대단히 용감한 일입니다’라고만 한다”라고 비난했다. 그래서 더선지 기자는 사건 전날인 2월 28일 자 칼럼에 내무부 관계자가 이번 사태를 ‘위험관리인과 극단적인 개혁주의자의 대형 문화충돌(a big clash of cultures, a risk manager versus a radical reformer)’로 평했다고 썼다. 이 기자는 분열의 금이 곧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바로 그다음 날 사건이 터졌다.

사실 영국의 장관들은 전원 하원의원 출신이긴 하지만 행정부 일에 통달해 있다. 초선 때부터 행정부 일에 관여하는 데다 여당 소속이라면 초선부터 말석 차관급으로 행정부 일을 접할 수도 있다. 야당이라도 그림자 내각에서 행정부 업무를 접할 수 있다. 장관의 최소 자격인 3선 하원의원의 경우 거의 10년 이상의 행정부 경력이 있던 셈이다. 해서 장관으로 임명될 때는 행정부 돌아가는 일을 거의 꿰찰 정도다. 의회에서 각료 자리인 맨 앞자리(front bench)에 앉아 야당 의원들로부터 질의를 받을 때는 모든 질의를 장관이 알아서 대답한다. 주변에 보좌관이나 직원이 없어 도움을 받을 수 없으니 자신이 업무 파악을 완벽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4선의 파텔 장관은 내무부를 장악하는 데 사실상 실패했다. 결국 새 정부의 정책을 국정에 강력하게 반영하기 위해서는 가장 큰 장애물인 사무차관부터 갈아야겠다는 결심에 다다르게 된다.

사태는 아직 진행형이다. 재판도 진행형이지만 행정부 개혁을 둘러싼 존슨 총리와 휘하 장관들, 그리고 행정부 관료들과 힘겨루기도 흥밋거리다. 장관과 차관의 불화는 결국 ‘결과를 중시하는 길거리 정치인과 과정을 중시하는 책상물림 관리의 충돌’ ‘유색인종 이민자 출신의 삼류대학 졸업자와 영국 백인 중산층 출신의 명문대 졸업 영국 지배계급 간의 충돌’로 봐도 재미있을 듯하다. 영국 언론은 이번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를 파텔 장관 자신이라고 본다. 가디언 기자는 “수년 전만 해도 장래 총리감으로 파텔이 반드시 오르내렸는데 이제는 ‘웨스트민스터에서 가장 불화를 일으키는 의원 중 한 명’이라는 평이다”라고 차관이 사임하는 날 칼럼에 썼다. 파텔의 이런 행태를 두고 기자들은 능력보다 너무 과한 자리가 주어진 탓에 자기제어를 못 하게 된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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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하 재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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