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아베 총리가 지난 4월 17일 기자회견장에서 마스크를 벗고 있다. ⓒphoto 뉴시스
일본 아베 총리가 지난 4월 17일 기자회견장에서 마스크를 벗고 있다. ⓒphoto 뉴시스

4·15 총선에서 여권(與圈)이 180석을 확보하며 압승한 것이 알려진 지난 4월 16일 아침. 평소 친하게 지내는 일본의 언론인이 급히 연락해왔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느냐. 그 배경은 무엇이냐.”

이후 며칠간은 일본의 정치인, 공무원들로부터 여러 차례 같은 질문을 받았다. 그만큼 이번 총선 결과는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충격이었다.

일본 사회에서는 총선에서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를 강조하는 보수세력이 선전해주기를 바라는 분위기가 있었다. 여당이 승리하면 다시 한·일 관계가 악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적지 않았다. 실제로 아사히신문은 총선 결과를 전하면서 “1965년의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해결이 끝났다고 하는 일본 측에 대해 문재인 정권이 보다 강경한 자세로 임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NHK는 “대일 여론 악화와 더불어 2년 후 대선(大選)을 향한 야당과의 대립이 첨예해지면 (문재인 정부가) 일본에 저자세를 취하는 것으로 보이는 정책을 펴기는 점점 어려워진다”고 분석했다. 청와대가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구심력 강해진 한국 정권에 대한 기대

4·15 총선 후 일본 사회에서는 한·일 관계 비관론이 커지고 있지만, 주목할 만한 다른 흐름도 있다. 문 대통령이 총선 압승으로 커진 정치적 구심력을 한·일 관계 개선에 사용하기 바란다는 제안이 그것이다.

일본의 4대 일간지 중의 하나인 마이니치신문의 지난 4월 18일 사설 제목은 ‘한국 여당의 압승, 강한 정권 기반을 전향적으로’였다. 이 사설은 “문 대통령은 임기 후반에 강한 집권 기반을 얻은 것을 대일(對日) 정책에도 긍정적으로 활용하기 바란다”는 입장을 밝혔다. “과거 (한국) 정권에서는 구심력이 상실되는 임기 말이 되면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에는 구심력이 강한 정권으로서 난제(難題)에도 임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도 같은 날 ‘선거 (승리)를 일·한 관계 개선 호기(好機)로’라는 제목의 사설을 게재했다. “임기를 2년여 남겨둔 문 대통령은 구심력을 유지할 전망”이라며 “자신에 대한 훈풍을 싸늘해진 한·일 관계를 바로잡는 지렛대로 삼기 바란다”고 했다. 이와 함께 “양국 간 꼬인 실타래를 풀려면 완전하고 최종적인 해결을 명기한 일·한 청구권협정에 따른 해결이 바람직하다”며 “문 대통령에게 대국적인 판단을 요청한다”고도 했다. 두 신문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문 대통령의 구심력을 언급하며 양국 관계 개선에 나서달라고 한 것은 흥미롭다.

일본의 일부 ‘코리안 와처(한국 전문가)’들도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시즈오카현립대의 오쿠조노 히데키(奧園秀樹) 교수는 30여년 전 연세대 유학 후 한·일 관계를 밀착해서 연구해왔다. 그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이번 총선 압승으로 문 대통령의 집권 후반기 정치적 구심력이 커지는 것이 한·일 관계에 반드시 마이너스는 아니다”라고 분석했다. “구심력이 강한 정권이 양국에 있다면 합의를 하기 쉽다”며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여당과 대립하고 지지층의 반발을 사더라도 한국 대통령으로서의 중장기적인 결단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해야 한다”고 했다. 도쿄대 한국학연구센터장을 지낸 기미야 다다시(木宮正史) 교수도 비슷한 입장을 피력했다. 그는 ‘총선 압승, 한·일 관계 개선의 기회다’라는 칼럼에서 “한국이 조금 더 일본의 힘을 재평가하고 일본을 설득하고 그 힘을 이용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라며 “코로나19라는 공통의 위기와 한국 총선 결과는 한·일 관계를 재검토할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을 되새겼으면 한다”고 했다.

일본의 지식사회에서 이 같은 주장을 하고 나온 배경 중의 하나는 문 대통령의 3·1절 기념사다. 문 대통령은 올해 3·1절 기념식 연설에서 “일본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며 “함께 위기를 이겨내고 미래지향적 협력 관계를 위해 같이 노력하자”고 했다. 당시는 4·15 총선을 앞두고 일본에 대결적인 발언을 할 것이라는 예측이 많은 상황이어서 의외라는 평가가 일본에서 나왔었다. 이는 그가 지난해 3·1절 기념사에서 “친일 잔재 청산은 (우리가) 너무나 오래 미뤄둔 숙제”라고 한 발언과는 대비되는 것이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문 대통령이 임기 후반에 대일정책 방향을 수정하려는 시그널이 아니냐고 관측했다.

일본서 주목하는 문 대통령의 3·1절 기념사

대법원의 징용 배상 판결에 대해 ‘3권 분립’을 강조하며 이를 따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보여온 문 대통령이 반일(反日) 입장을 수정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그럼에도 정치적 지지 기반이 커진 문 대통령이 한·일 관계 개선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가정한다면 올해 양국 관계의 변수는 아베 총리가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일본의 코로나19 감염자 수는 4월 들어서 1만명을 넘기며 연일 치솟고 있는 데 비해 아베 총리의 리더십은 빠르게 추락하고 있다. 크루즈선 다이아몬드프린세스호 처리, 도쿄올림픽 연기 결정, 긴급사태 선포 등의 중요한 장면에서 아베 총리는 한발 늦거나 여론에 떠밀려 결단을 내리는 모습을 보여왔다. 불량 마스크 배포, 생활지원금 지급 정책 변경 등으로 우왕좌왕하면서 그의 지지율은 곤두박질치고 있다. “국가 책임자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면 최선의 방책까지 국민이 받아들이지 않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다”(니혼게이자이신문 사설)는 비판도 나왔다. 2012년 12월 2차 집권 후 최악의 위기를 맞은 아베 총리가 한·일 관계 개선을 정책의 우선순위에 둘 가능성은 현재로선 희박해 보인다. 수차례 경험했던 것처럼 그가 역으로 한·일 관계를 희생양 삼아서 자신의 지지를 회복하려 할지도 모른다.

코로나19 사태는 한·일 양국이 서로 도와야 하는 중요한 이웃국가임을 상기시켜줬지만 국가 차원에서 사실상 아무런 협력 움직임이 없는 것도 한·일 관계 개선의 전망이 밝지 않음을 보여준다.

최근 아사히신문 주필을 지낸 후나바시 요이치(船橋洋一) 아시아·퍼시픽이니셔티브(API) 이사장을 만났을 때 한·일 관계에 대해 질문하자 짧고도 강력한 답이 돌아왔다. “(코로나19 사태로)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일본과 한국은 서로 싸울 여유가 없다. (양국이 현 상황에서 대립하는 것은) 사치다. 사치.”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후나바시 이사장의 메시지에 귀 기울여 보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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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원 조선일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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