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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호] 20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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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해범의 차이나워치]중국은 북한 지도자 위난(危難) 시 어떻게 행동하나?

지해범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장 hbjee@chosun.com

▲ 지난해 6월 북한을 국빈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영접을 받으며 환영인파에 인사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1994년 7월 7일 저녁 북한 최고지도자 김일성이 평양에서 160㎞ 떨어진 묘향산 별장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의사들이 달려와 병원으로 후송하려 했지만 극심한 폭우로 헬기가 뜰 수 없었다. 도로도 진흙탕으로 변해 육상 수송도 지체됐다. 의사들이 뒤늦게 그의 흉부를 절개해 심장을 소생시키려 했으나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7월 8일 새벽 2시 김일성은 사망했다. 그로부터 34시간이 지난 7월 9일 정오, 검은 상복을 입은 조선중앙TV의 아나운서는 침통한 표정으로 “조선 노동당 총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7월 8일 새벽 2시 서거하였음을 온 나라 전체 인민들에게 비통한 심정으로 알립니다”라고 전했다.
   
   김일성 사망이 극비에 부쳐진 34시간 동안, 북한 정권 내에서 그 사실을 안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7월 8일 오전 김정일은 김영남 외무상(후에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에게 “마오쩌둥과 스탈린 사망 시 중국과 소련이 어떻게 대처했는지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30분 간격으로 결과물을 재촉했다. 북한 외무성 관리들은 관련 자료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어느 누구도 지도자 사망이라는 중대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고 한다. 제네바에서 미국 측과 비핵화 협상을 벌이던 북한 대표단도 뒤늦게 소식을 접하고 서둘러 귀국했다. 당시 한국과 미국은 물론 북한의 유일한 동맹인 중국도 북한의 발표 전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한·중수교(1992)에 대한 김정일의 분노가 중국과의 고위급 상호방문과 정보교류를 전면 차단하던 시기였다.
   
   
   중, 김일성 사망에 TV 오락 프로그램까지 중단
   
   중국은 북한의 의도적 무시에도 불구하고 평양의 정치 급변 사태에 가장 신속하고도 전면적으로 대응했다. 김일성 사망 발표 당일 중국은 즉각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 명의로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와 정부, 북한 인민 앞으로 조전(弔電)을 보내 애도를 표했다. 뒤이어 중국 공산당 권력 서열 3위 이내의 지도자인 장쩌민(江澤民), 리펑(李鵬), 차오스(喬石)는 연명으로 북한 노동당과 군사위에 조전을 발송했다. 중국 측은 조전에서 ‘북한 사회주의 건설과 중·북 우호협력 관계 발전에 기여한 김일성의 업적’을 칭송하고 ‘북한이 김정일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대내 발전을 도모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중국의 조문(弔問) 외교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7월 11일 장쩌민과 후진타오를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는 베이징 시내 북한대사관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아 조화를 전달하고 영정에 허리를 굽혔다. 뒤이어 중국의 당정군(黨政軍) 간부는 물론 국방부·외교부·문화부 등 정부 각 부처들도 조화를 보냈다. 조문행렬은 7월 13일까지 이어졌다. 중국은 또 김일성 사망 발표 다음 날 정치국원 겸 당 서기처 서기 딩관건(丁關根)과 덩샤오핑 판공실 주임 왕루이린(王瑞林)을 비밀리에 평양에 특사로 파견해 조문하고 김정일 영도 아래 북한이 안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지할 것을 분명히 했다. 중국은 심지어 김일성 사망 추도대회가 열린 7월 20일 천안문광장과 인민대회당 등에 조기(弔旗)를 게양하고 TV와 라디오 방송의 모든 오락 프로그램을 중단하는 등 국민들까지 북한 최고지도자의 사망에 애도를 표하도록 유도했다. 중국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미국 견제 위해 북한 끌어안은 중국
   
   중국이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 지도자 사망 때도 하지 않던 일을 북한 지도자 사망 때 벌인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국제 상황은 미·중 관계가 갈등 단계로 접어들던 시기였다. 당시 미국은 미국 내 대만대표부의 명칭을 ‘북미사무협조위원회’에서 ‘주미 타이베이 경제문화대표처’로 변경하도록 허가했다. 이는 사실상 대만과의 관계를 격상하는 것이어서 중국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미국은 중국의 WTO(세계무역기구) 가입을 반대하여 중국의 대외발전전략에 제동을 걸었다. 중국은 이러한 미국의 압박을 돌파할 카드가 절실한 시점이었다. 위기나 혼란을 기회로 바꾸는 능력에서 중국 공산당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중국은 김일성 사망을, 한·중수교 이후 최악으로 치달은 북·중 관계를 회복할 기회로 만들고, 그것을 대미외교의 카드로 활용하기로 작정했다. 북한에 대한 중국의 ‘전략적 가치’ 평가점수가 한층 높아진 것이다. 조전과 조문, TV 오락 프로그램의 중단은 그러한 계산 위에 벌어졌다.
   
   중국은 1994년 3월 ‘중국이 북한에 제공하는 특수항목 차관에 관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사이의 협정’을 체결했다. 그로부터 4개월 후 김일성이 사망하자 중국은 대북 원유와 식량 공급량을 늘렸고, 2년 전 양국 무역에서 철폐했던 구상무역과 우호가격제를 부활시켰다. 1995년부터는 대북 원조도 재개했다. ‘고난의 행군’ 시기로 접어드는 북한 경제의 생명줄을 이어주기 위한 링거주사나 다름없었다. 또 1994~1997년 사이 북한의 극심한 식량난으로 탈북자가 수십만 명에 달하자, 중국은 동북3성 변경부대와 경찰의 경계태세를 강화하고, 탈북자를 체포해 적극 북한에 송환했다. 이는 ‘북·중 국경이 북한 붕괴를 촉진하는 통로’가 되지 않도록 하는 조치였다고 광운대 신상진 교수는 평가했다. 이러한 대북 지원과 조치들은 모두 중국이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확대하려는 전략의 일환이라는 것은 명확하다. 물론 중국의 북한 포용정책이 당장의 성과를 거두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중국의 꾸준한 노력이 쌓이자, 2000년 김정일은 마침내 중국에 마음을 열고 베이징 방문길에 올랐다.
   
   
   김정일 뇌졸중 때 중국이 걱정한 것
   
   중국은 북한 지도자의 건강 상태에도 매우 신경을 쓴다. 2008년 9월 초 미국의 언론들이 김정일의 건강이상설에 대한 뉴스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AP통신은 미 정보당국자의 말을 인용해 “김 위원장의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 아마도 뇌졸중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과 CNN도 “김 위원장이 8월 22일 쓰러졌으며 그의 치료를 위해 중국인 의사 5명이 방북했다“고 보도했다. 미국 언론의 잇따른 보도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와 언론은 김정일의 건강과 관련한 어떤 발표나 보도도 하지 않았다. 김정일의 개인정보에 대해 가장 많이 아는 중국이 그에 대해 철저히 ‘침묵’하고 ‘보호’했다. 왜 그랬을까. 그러한 중국의 행동은 대북 전략과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당시 한국과 미국에서는 ‘북한 붕괴론’과 ‘흡수통일론’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2008년 출범한 한국의 이명박 정부는 전임 노무현 정부의 중국 중시외교를 탈피하여 미국과의 동맹 강화에 주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정일의 건강 상태를 누구보다 먼저 파악한 중국으로서는 이때부터 김정일 사망 이후 북한에서 발생할 여러 가지 시나리오에 대비할 필요성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중국 공산당은 ‘포스트 김정일 시대’에 대비하는 일이 김정일의 건강 상태를 발표하는 일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보고 언론 보도를 통제했을 것이다. 만약 북한에서 권력교체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고 내부 혼란이 일어날 경우, 중국으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북한 혼란을 이유로 한국과 미국이 북한에 군사적으로 개입할 경우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 만약 중국이 그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한반도는 한·미동맹이 장악하게 될 것이고, 중국이 개입한다면 3차 대전으로 비화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중국으로서는 심대한 안보위기를 맞게 된다. 장기 경제발전전략도 치명타를 입는다.
   
   
   중국의 3대 ‘북한 안정화 전략’
   
   이러한 안보위기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중국은 2008년 하반기 ‘김정일 건강이상’을 인지한 직후부터 ‘북한 안정화’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크게 3가지 방향으로 나타났다. 첫째 북한의 안정적 권력승계를 위한 지지와 후계자 포용, 둘째 북한 비핵화 목표의 우선순위 하향 조정, 셋째 화폐개혁 실패 이후 경제위기에 처한 북한에 대한 경제 지원과 경협 강화가 그것이다. 2009년 5월 25일 북한이 2차 핵실험을 단행했을 때, 중국의 반응은 1차 핵실험 때와 크게 달랐다. 북한 1차 핵실험 때 중국은 “국제사회의 보편적 반대를 무시하고 북한이 ‘제멋대로(悍然)’ 핵실험을 실시했다”며 냉전기 적대국에 사용하던 용어로 북한을 비난했었지만, 2차 북핵 실험 때는 이 표현을 쓰지 않고 차분하게 대응했다. 북한 지도부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도 삼갔다. 2009년 6~7월 중국은 북한의 김영춘 인민무력부장과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잇따라 초청해 양국 관계를 논의했다.
   
   중국은 또 북한 2차 핵실험 직후(2009년 7월) 중앙외사영도소조(中央外事領導小組·조장 후진타오, 7월 15일 개최)와 재외공관장회의(7월 17~20일)를 잇따라 개최해 ‘북핵 문제’와 ‘북한 문제’를 분리하기로 결정했다. 북한 비핵화 실현보다 북한 안정을 중시하는 결정이었다. 중국의 이 정책 전환은 1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진 김정일의 건강 문제로부터 시작된 ‘포스트 김정일 시대’에 대한 우려와 대비의 산물이었다. 이 결정이 나온 직후 중국과 북한 간에 물밑 접촉이 활발히 전개됐다. 그해 8월 중순 우다웨이(武大偉)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북한을 방문해 6자회담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과 회담하였고, 한 달 뒤 다이빙궈(戴秉國) 국무위원도 평양을 방문해 비핵화 문제와 양자관계 회복에 관한 후진타오의 친서를 김정일에게 전달했다. 그해 10월에는 원자바오 총리까지 북한을 방문해 대대적인 경협 방안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중국이 유엔 안보리 1874호 결의안을 무시하고 북한을 지원하기로 한 것이어서 국제사회에 파문을 일으켰다. 미국의 북한 전문가인 스콧 스나이더는 원자바오의 방북에 대해, 중국이 ‘북한의 보호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응징(제재)으로부터 평양 정권을 방어해주는 ‘조력자(enabler)’가 되었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김정일은 2010년 8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중국 창춘을 방문해 후진타오와 회담을 갖는 자리에서 후계자 김정은을 중국 지도부에 소개했다. 자신이 죽으면 고아가 될 아들을 중국 지도자들에게 잘 부탁한다는 ‘탁고(托孤)’의 회동이었다.
   
   
   김정은 건강이상설에 가장 긴장한 나라는 중국?
   
   이상과 같이, 중국이 북한 지도자의 건강과 신변 문제를 보는 관점은 한국 및 서방국가와 완전히 다르다. 중국의 정책은 철저히 미국과의 패권 경쟁 및 북한(나아가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보의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중국의 대북 포용전략은, 북한 상황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대비하는 동시에 북한을 중국에 의존적으로 만드는 전략이다. 이는 북한에 비해 압도적인 군사력(핵 포함)과 경제력을 가진 중국이 대북 영향력 강화를 위해 취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지난 4월 김정은 건강이상설에 한국 못지않게 긴장한 국가는 중국이었을 것이다. 미국과의 무역전쟁과 코로나19 갈등이 고조되는 시점에 북한 지도부마저 혼란에 빠진다면, 중국에 엄청난 외교안보적 도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4월 23일 중국이 대외연락부 고위관리를 포함한 대표단을 북한에 파견한 것도 대북 위기 관리 차원으로 보인다. ‘김정은의 잠적’은 역설적으로 북한의 전략적 가치를 중국에 재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북한 관계는 때론 이혼 직전의 부부처럼 위태로워 보이지만, 상호 국가이익을 위해 오늘도 부부(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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