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총리가 지난 5월 4일 기자회견을 통해 코로나19로 인한 긴급사태를 5월 말까지 연장한다고 선언했다. 이날 아베 총리의 기자회견 장면이 도쿄 시내의 대형 모니터를 통해 중계되고 있다. ⓒphoto 뉴시스
아베 총리가 지난 5월 4일 기자회견을 통해 코로나19로 인한 긴급사태를 5월 말까지 연장한다고 선언했다. 이날 아베 총리의 기자회견 장면이 도쿄 시내의 대형 모니터를 통해 중계되고 있다. ⓒphoto 뉴시스

5월 초 현재 일본 전역의 코로나19 환자는 1만6000여명 선이다. 전 세계에서 코로나19 양성 판정 환자가 400만명, 사망자가 30만명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감염자가 많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일본 열도는 안도감보다는 불안감과 우려가 섞인 공기(空氣)가 지배하고 있다. 5월 말까지 연장된 긴급사태 조치가 6월까지 다시 연장될지 모른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왜 그럴까.

코로나19 검사 독일·이탈리아의 10분의 1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은 코로나19 사태에 대응하기 위한 자문기구를 운영 중이다. ‘전문가 회의’로 명명된 이 기구에는 감염증 및 보건 전문가들이 포진해 있다. 이 기구는 지난 5월 4일 코로나19 긴급사태 조치를 연장하기에 앞서 열린 회의에서 정부의 대응을 질타했다. 코로나19 감염 여부를 판정하는 PCR검사가 다른 주요 국가에 비해 두드러지게 적다는 점이 지적됐다. 이에 따르면, 일본의 10만명당 PCR검사 수는 188건에 불과하다. 독일, 이탈리아는 10만명당 3000건을 웃돌며 싱가포르는 1708건, 한국은 1198건이다.

코로나19 검사 건수가 독일, 이탈리아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기에 일본은 거대한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PCR검사 건수가 적기 때문에 감염자가 적은 것 아니냐”는 우려가 끊이지 않는다. 실제로 다수의 일본인 전문가들은 아베 내각이 PCR검사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은 것을 비판하며 “최소한 10만명의 감염자가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도쿄에서 만나는 일본인들은 한결같이 이 같은 불안감에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다.

이런 분위기가 공개적으로 표출된 것은 지난 5월 4일 아베 총리의 기자회견에서였다. 인터넷 매체 ‘비디오뉴스’의 진보 데쓰오(神保哲生) 대표는 생방송으로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속사포 같은 질문을 쏟아냈다. “총리는 PCR검사를 하루 2만건으로 늘리겠다는 식의 말을 하지만 아직 1만건을 넘은 적이 없다. 마치 남의 일같이 말하는데 그것은 진심으로 늘리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진심으로 늘리려고 했는데 정말로 늘지 않았던 것인가?”

아베 총리가 한 달 전부터 하루 PCR검사 능력을 2만건까지 확대하겠다고 여러 차례 공언했지만 실현되고 있지 않은 것을 파고든 것이다. 물론 아베 총리는 이에 대해 강하게 반박했다. “진심으로 (검사 건수를 늘릴) 의욕이 없었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나는 여러 차례 검사 능력을 키워 간다고 했었고, 실제로 그 능력은 올라가고 있다”고 했다. 일본에서 아베 총리의 이런 답변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아베의 판단 잘못과 무너진 보건강국

현재 일본을 감싸는 불안한 공기의 진원지는 아베 총리라고 할 수 있다. 도쿄 소식통들에 따르면 아베 총리는 이번 사태를 처음부터 오판했다. 전 세계적으로 감염자가 수백만 명에 육박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채 가벼운 바이러스로 치부했다. 경계령을 발동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이 때문에 사태 초기에 총리 관저(官邸)로부터는 “독감보다 약간 더 심각한 수준이다. 중국처럼 위생수준이 낮은 나라가 문제이지 일본은 크게 걱정할 필요 없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이는 일본 방송, 신문의 상당수 관계자들에게도 그대로 전달됐다. 일본인들이 다른 나라 국민보다 경각심을 늦게 가진 데는 총리 관저의 이런 판단이 큰 영향을 미쳤다.

아베 총리의 이 같은 인식은 지난 2월 초에 대규모 감염이 발생한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 사태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승객, 승무원 3711명이 탄 크루즈선을 봉쇄하는 데만 급급했을 뿐 근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이 배에서만 712명의 감염자가 발생했다.

아베 총리는 결정적으로 오는 7월 개최 예정이던 도쿄올림픽을 인명보다 우선시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전 세계에서 코로나19 희생자가 속출하는 동안에도 도쿄올림픽 개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지난 3월 말에야 여론에 밀려 도쿄올림픽을 내년으로 연기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후에도 말만 앞설 뿐 국민을 감동시키는 대책은 나오지 않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사람 간 접촉을 대폭 줄이는 긴급사태 조치는 코로나19가 널리 퍼진 지난 4월 7일에야 나왔다. 지금도 PCR검사를 급격하게 늘릴 경우, 병실 부족 등 의료 붕괴가 가속화한다는 이유로 소극적인 입장은 변함이 없어 보인다.

일본은 이번 사태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보건강국(保健强國)으로 인정받아 왔다. 최고의 방역 수준을 갖추고 있다고 자부해 왔다. 덕분에 2003년 사스, 2015년 메르스 사태 때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이 탓에 변종 바이러스가 생겨날 경우의 대응에 대해선 준비가 미흡했다. 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코로나19 사태가 시작되고 나니 곳곳에서 마스크, 인공호흡기, 가운 등의 장비 부족 현상으로 의료 붕괴가 현실화하기 시작했다. 사이타마현에서는 양성 판정을 받은 환자가 병실 부족으로 자택에서 요양하다가 사망하는 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 조사 결과 코로나19 중증환자를 치료하는 집중치료실(ICU) 병상 수는 전국에 5709개로 다른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인구 10만명당 ICU 병상 수는 미국 35개, 독일은 30개가량이지만 일본은 약 5개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4월부터 감염자가 급속히 늘면서 의료장비가 부족해지자 일본의 병원에서는 세탁소 비닐, 쓰레기봉투를 이용해 의료용 가운을 만들어 입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은 “의료 시스템이 이렇게까지 속수무책이었는지 몰랐다”라고 낙담하는 분위기다.

폐 끼치기 싫어하는 문화의 부작용

의료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일본 사회의 독특한 문화도 이번 사태에서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주변에 폐를 끼치는 것을 싫어하고 경계한다. 다른 목소리를 냈다가 따돌림당할 것을 두려워해 ‘소리 지르지 않는 문화’가 위기 상황에서는 약점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자신으로 인해 사회 전체에 불안을 일으키고 싶어 하지 않고, ‘전체(全體)’를 따라가는 문화가 위험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분석한다.

위기 상황에서도 규칙, 매뉴얼만 찾는 현상은 이번에도 나타났다. 한국은 예상치 못한 사태를 맞아 어디에도 없었던 ‘드라이브 스루’ 검사방식을 며칠 만에 만들었지만 일본은 기존의 매뉴얼에만 갇혀 이런 방안을 생각하지 못했다.

일본의 코로나19 사태는 조만간 ‘확대냐 수습이냐’의 변곡점을 맞게 된다. 어떤 방향으로 결론 나더라도 예상치 못한 위기에 취약한 일본 시스템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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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원 조선일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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