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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호] 2020.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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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통신]내가 경험한 사회주의, 소련 10년 생활기… 지상천국은 왜 망했을까

런던= 권석하  재영칼럼니스트 johankwon@gmail.com

▲ 1991년 8월 19일 고르바초프 정권을 무너뜨린 8월 쿠데타를 반기는 모스크바 시민들. photo 뉴시스
필자는 1980년대 중반부터 거의 10년간 소련에서 살았다. 한국과 소련이 수교하기 전부터 모스크바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상사 주재원으로, 나중에는 무역과 제조업에 종사하는 개인 사업자로 ‘붉은 제국’의 수도에 살면서 우리 사회 일부 인사들이 아직 환상을 갖고 있는 사회주의의 실상과 본질을 낱낱이 체험한 적이 있었다.
   
   당시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의 상황은 조금 심하게 말하면 목불인견의 수준이었다. 당시 소련인이 부엌에서 친구들끼리 보드카를 마시며 하던 정치 관련 농담 중 백미는 ‘사회주의 6대 모순’이었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1. 모두 월급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일하지 않는다.
   2. 아무도 일을 안 하는데 생산목표는 항상 초과달성한다.
   3. 생산목표는 초과달성인데 상점에는 항상 물건이 없다.
   4. 상점에는 물건이 하나도 없는데 사람들의 집에는 없는 게 없다.
   5. 없는 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항상 불만에 차 있다.
   6. 사람들이 항상 불만에 차 있는데도 투표는 항상 공산당에 대한 100% 찬성으로 나온다.
   
   당시 소련 사회를 가장 잘 묘사한 농담(anecdote)이었는데 사회주의에 대한 통찰력도 담겨 있다고 본다. 이 6가지 농담을 하나씩 풀어보자. 우선 조항 1.
   
   당시 소련에서는 개인 기업이 존재하지 않기에 국민 모두가 국가 공무원이었고, 월급을 국가로부터 받는 철밥통이니 일을 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었다. 몸이 아프다고 자주 결근하고 조퇴해도 해고당하지 않았다. 결국 반정부적인 태도만 취하지 않으면 평생 직장은 정말 영원히 지속될 수 있었다.
   
   
   생산량 달성 위해 기계 성능 약하게 조작
   
   조항 2를 보자.
   
   당시 소련에서는 공장에 기계가 들어오면 바로 기계가 성능을 최대로 발휘하지 않도록 손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기계 수명이 20년이라면 수명이 다할 때쯤 제품 생산 능력이 100%에 도달하도록 조정해 놓는 식이다. 이유는 처음부터 기계 능력을 최대 한도로 맞춰놓으면 매년 올라가는 생산목표 초과달성을 이룰 수 없어서다. 생산목표를 조금씩 늘려가면서 매년 목표 초과달성 대기록을 세우는 듯 보이게 해야 공장장은 물론 공장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종업원은 놀고먹어도 생산량은 항상 초과달성할 수밖에 없으니 공장장 좋고 종업원 좋고 누구 하나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조항 3은 어떨까.
   
   공장에서 생산된 물품이 상점에 나타나면 무슨 물건이든 매점매석이 일어나서 언제나 물건이 모자라기 마련이었다. 소련인들은 시내를 다니다가 상점 앞에 줄이 있으면 뭘 파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줄부터 섰다. 그리고는 앞사람에게 뭘 파는지 물어본다. 당장 필요한 물건이 아니라도 일단 사놓고 본다. 나중에 이웃이나 친척에게 필요한지 물어보고 나눠 주든지, 아니면 암시장에서 팔아도 되니 말이다. 그래서 정작 필요로 하는 사람이 구하려면 물건이 모자라는 현상이 일상이 되었다. 실제 당시 소련 국가경제계획기구(GOSPLAN)가 전 국민이 사용하고도 충분히 남도록 공급 계획을 세워놓고 생산했기에 이론상으로는 물건이 모자랄 수가 없었다. 예를 들면 칫솔 소비량이 국민 일인당 1년에 3개라면 여러 가지를 감안해 국민 1인당 5개가 돌아가도록 생산하게 한다. 그런데 위와 같은 줄서기와 매점매석이 일어나니 물건이 항상 모자랐다.
   
   당시 소련인들 사이에서는 “물건이 보일 때 자기 식구가 필요한 물건만 사는 인간은 반사회적인 인간”이라는 말도 있었다. 자기 식구만이 아니라 친척, 친지, 친구들이 필요로 할지 모르니 무조건 확보해서 주위 사람을 챙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의가 아니라 의무였다. 항상 물자가 모자라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주 이기적인 인간으로 취급받았다. 그러고는 저녁 먹고 앉아서 주위 사람들에게 전화를 한다. 내가 오늘 시내 나갔다가 이런 물건을 샀는데 필요하지 않느냐는 내용의 전화다. 당시 모스크바 시내 전화는 무료였다. 그래서 모스크바에서는 저녁 늦게 급한 일로 전화통화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모두들 그런 식으로 전화를 해대고 전화 건 김에 수다를 떨다 보니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집전화는 저녁에 항상 통화 중이었다. 그런 전화를 통해 내가 친구에게 물건을 받는 신세를 지면 나도 그런 방식으로 갚아야 했다. 물론 친지들 사이에는 원가로 물건을 주고받는다.
   
   
   저녁 식사 후 전화통 불나는 이유
   
   조항 4는 당연한 결과다.
   
   이런 방식으로 모든 물건의 수급이 이루어지니 항상 물건은 모자라도 사람들의 집에는 없는 물건이 없었다. 어느 집이나 서랍과 장롱에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그 물건들은 물물교환을 하든지 팔아서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한 수단이었다. 서로 양보해서 자신이 필요한 물건만 사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지만 항상 물건이 모자란다는 인식이 소련인들로 하여금 필요 없이 각자 집에 물건을 쟁여놓게 만들었다.
   
   조항 5는 좀 깊은 분석이 필요하다.
   
   소련인들은 실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건을 가지고 있거나 구할 수 있어 특별한 불편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전체에 대한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우선 물질적인 불만부터 보자. 당시 소련 제품은 기본적인 욕구만 충족시킨 용도이지 남들과 다른 물건을 갖고 싶다는 인간의 근본 욕구를 무시한 제품들이었다. 당시 필자 아파트의 변기 뚜껑 여닫는 연결 부분의 부품이 부서진 일이 있었다. 운전기사에게 부탁을 했더니 알았다고 하고는 그냥 나가려고 했다. 필자가 “부서진 부속품을 들고 나가야 규격에 맞는 걸 구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이상하게 쳐다봤다. 실상을 알고 보니 전국 아파트의 변기 규격이 똑같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다는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인간의 욕구에 맞추어 디자인과 규격이 다른 물건을 만들지 않는 철저한 소비에트 시스템의 철학이 바로 거기에 들어 있었다. 인간의 이기심과 허영을 죄악시해서 거기에 맞추는 물건 생산을 고려하지 않는 사회주의식 도덕관이 그 안에 녹아 있었다.
   
   물론 소련에도 필요로 하는 모든 물건이 존재했다. 비록 서구인의 눈으로 보면 조악하고 허접한 물건들이었지만 말이다. 소련은 지구 육지의 약 7분의 1을 차지한 대국이었지만 모든 곳에 전화, 전기, 포장도로가 갖춰져 있을 정도로 기본은 완벽한 나라였다. 당시 소련은 중공과는 달리 굶어 죽는 사람이 일단 없었다. 그러나 인간은 기본 욕구만 충족되어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아무리 소련이 외부와 격리되어 있었다고 해도 당시 소련인은 서구에 어떤 문화와 문물이 존재하는지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필자가 처음 소련을 방문한 1980년 중반에는 모스크바에서 택시를 하루 전세 낼 경우 말보로 담배 한 보루면 족했다. 당시 서방에서 유행하던 리바이스 청바지 하나면 한 달 민박이 가능했다면 믿겠는가. 그만큼 소련인은 서방 물건들에 목말라 있었다.
   
   거기다가 사회 전반의 불공평 문제도 있었다. 소련인들은 당원을 비롯한 지배계층과 자신들의 삶의 차이에 대한 불만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모든 노동자가 평등하다는 지배계층의 언행 불일치와 위선에 진저리 치고 있었다. 소련 남자들은 그런 불만을 결국 보드카로 풀었다. 소련이 당시 미국을 유일하게 이긴 건 50%가 넘는 이혼율이라는 농담도 있었다. 이혼 사유가 거의 남편의 알코올 문제였다.
   
   
▲ 1989년 모스크바에 처음 문을 연 맥도날드 매장 앞의 인파들. photo gminder.com

   감자 생산 20%만 소비자 손에
   
   조항 6의 ‘100% 찬성’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고 보고 물품 부족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을 해 보자. 당시 소련에서는 공산품은 어떤 방식으로든 모두들 구했지만 식품 특히 채소 문제가 상당히 심각했다. 밀 같은 기본 식량은 흉년이 들어 문제가 생기면 정부가 외국에서 어떻게든 수입해 메워 주었지만 신선도가 관건인 채소는 달랐다. 현지에서 생산된 농산품이 각 가정에 도달하는 비율이 20%밖에 안 된다는 통계도 있었는데 감자를 예로 들어 보자. 일단 감자 농장은 자신들의 목표 생산량만 채워 캐서 쌓아 놓으면 임무가 끝난다. 소비지까지의 운송은 자신들 책임이 아니다. 결국 생산 후 운송되기 전까지 20%의 감자가 상한다. 운송기관은 농장으로부터 도시 인근 집하장에 자신들에게 할당된 수량을 옮겨 놓기만 하면 된다. 운송 중 썩든 말든 자신들 소관이 아니다. 여기서 다시 20%가 상하거나 사라진다. 감자를 받은 집하창고 역시 보관만 할 뿐이지 시내 상점으로의 배송과 분배 책임은 없다. 보관 중인 감자의 상태도 자신들 책임이 아니다. 여기서 다시 20%가 상하거나 사라진다. 소매점으로의 배달과 분배, 운송을 책임지는 다른 기관이 다시 개입해 드디어 상점에 도달하지만 이 과정에서도 다시 20%가 상하거나 사라지거나 한다. 결국 농장에서 생산한 100t의 감자 중 20t만이 상점에 도착해 소비자 손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사라진다’는 말의 뜻은 누군가가 훔쳐가거나 갖고 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소련법에는 종업원이 퇴근할 때 몸수색이 불법이었다. 그래서 사무실용품을 집에 들고 가거나, 자신들의 공장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갖고 가는 일은 이상한 게 아니었다. 필자가 처음 모스크바 사무실에서 하던 일 중 하나가 화장실 물 잠그고 쓸데없이 켜져 있던 전등을 끄는 일이었다. 소련 직원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국가가 비용을 지불하는데 왜 그걸 신경 쓰느냐는 투였다. 이와 관련한 농담도 있다. 주정뱅이 둘이 보드카를 마시다가 한 주정뱅이가 말했다. “우리 소련은 정말 위대한 나라야.” 그러자 다른 주정뱅이가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투로 쳐다봤다. 그러자 첫 주정뱅이가 다시 “온 국민이 10월혁명 이후 국가를 이렇게 오랫동안 훔쳐먹어도 망하지 않고 있으니 말일세”라고 답했다.
   
   당시 소련인들은 학교 공부를 마치면 전공에 따라 별다른 선택권 없이 대개 직장이 정해졌다. 이직이라는 개념도 없는 그야말로 평생직장이었다. 해서 직장은 바로 한 개인의 삶이기도 했다. 친척을 제외한 모든 인간관계는 학교와 직장이 기본인데, 이 두 개가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또 직장은 월급과 함께 삶의 모든 사항을 해결해 주는 곳이었다. 휴가를 간다면 항공권, 휴양지 숙소까지 회사에서 마련해 주었다. 대개의 소련 기관들은 휴양지에 직영숙소를 갖고 있었고 호텔 일부를 임대해서 직원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부족한 생필품이나 소비재를 회사나 공장 단위로 구해서 배급해 주기도 했다. 그래서 공장 창고에는 자신들이 생산하는 제품 원료 말고도 별별 소비 제품이 다 있었다. 생산공장과 직거래를 통해 직원용으로 물물교환한 물품이었다. 공장장의 능력은 직원들을 위해 이런 준비를 잘하는 걸로 평가받았다.
   
   가장이나 개인으로서의 능력도 이런 식으로 평가받았다. 예를 들면 아들이 결혼할 때 피로연을 크게 열어야 하는데 식당 예약이 어려우면 자기의 권한을 식당 매니저의 예약 권한과 맞교환한다. 이때는 식당에 전화해서 내가 어디 가구점 매니저 누구인데 이래저래 해서 식당을 좀 빌려야 한다고 얘기하면 된다. 나중에 그 식당 매니저는 자신이 가구가 필요하다는 요구를 해와 자기가 베푼 편의를 되찾아간다. 이런 권력이 없는 일반인은 친지나 친척 누구의 힘을 빌려야 하는데, 그 신세를 갚을 방법이 없으면 비참해지고 그래서 사회에 대한 불만이 쌓인다.
   
   
▲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마지막 서기장. photo 뉴시스

   예약 힘든 식당 가 보면 텅텅
   
   당시 소련에서 식당 예약이 왜 그렇게 어려웠는지도 사회주의 제도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식당 예약을 누구에게 부탁하거나, 정문 경비에게 뒷돈을 주고 예약이 어려운 식당에 간신히 들어가 보면 식탁이 반이 비워진 채 영업이 끝날 때까지 손님이 들어오지 않는다. 약이 올라 항의를 하면 주방 인원의 반이 휴가와 병가로 자리를 비워 손님도 딱 그만큼만 받는다는 답이 돌아온다. 더 일해도 보상이 없고 그럴 이유도 의무도 없으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또 식당은 원가의 일정 이상으로는 식사비를 못 받게 되어 있었다. 식품재료비 포함 직원 월급 등의 경비를 더해 일정금액 이상은 식사비로 못 받는다는 원칙이 있었다. 거기다가 사용 안 한 식재료의 용도나 행방을 누구도 묻지 않으니 직원 결근을 핑계로 식탁을 비우면 일 안 해서 좋고, 남은 식자재를 암시장에 팔아 수익을 챙길 수 있어서 좋았다.
   
   농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소련 농부들은 감자 수확철이 왔는데도 비가 오면 수확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8시간만 일하면 끝이었다. 그게 법이었다. 소련의 감자 수확철인 가을에는 유난히 비가 많이 온다. 결국 감자가 비가 와서 썩어가도 소련 농부는 수확하지 않았다. 비 오는 날은 노동을 할 의무가 없어서였다. 당국이 궁여지책으로 인근 대도시 사무실 및 공장 근로자와 학생들을 동원해서 감자를 캐는데 정작 농부들은 손 놓고 집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도시 노동자들은 비 오는 날 해 보지도 않던 감자 캐는 일을 추가 보수도 없이 하라니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결국 정부가 급하게 감자 캐는 기계를 만들어 투입했으나 그것도 잘못 만들어 캐는 만큼의 감자가 기계에 의해 땅에서 부서지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볼셰비키 혁명 전에는 식량수출국이던 나라가 소련 탄생 이후 세계 최고의 식량수입국이 되었다. 당시 소련인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감자를 비롯한 채소 60%가 개인 텃밭에서 생산되었다. 당시 농장의 일부를 농부들이 개인 용도로 경작하는 게 허용되었고, 도시 노동자들은 근교에 다차(dacha)라는 조그만 주말 별장을 갖고 있었다. 소련인들 모두 자신만의 텃밭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8시간 일과가 끝나면 유난히 긴 여름날을 자신의 텃밭에서 채소를 키우면서 겨울을 대비했다. 그런데 문제는 농부들이 가을이 되어 비가 오면 집단농장 수확은 하지 않고 자기 텃밭 작물만 수확한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인간에게 이기심은 숨 쉬는 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절감했다.
   
   그러던 소련이 다시 러시아로 돌아온 다음인 2000년 이후 미국의 곡물수출국 1위 지위를 위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2020년에는 식량수출국 1위로 올라선다는 것이 실제 러시아 정부의 계획이기도 하다. 이런 놀라운 성장은 러시아 민간 기업에 토지 경작을 허용했을 뿐 아니라 서방 곡물 메이저들에도 투자는 물론 직접 경영과 생산까지 허용한 덕분이다.
   
   
   쿠바와 석유·설탕 맞교환?
   
   소련이 해체되던 1991년 이후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위한 경제 발전을 추진하려고 서방 여기저기로 돈을 빌리러 다녔다. 당시 소련이 외국으로부터 받을 채권과 채무 비율은 2.5배로 채권이 더 많았다. 문제는 소련이 돈을 받을 국가가 모두 위성국이었거나 후진국이었다는 점이다. 실제 서방 경제학자들은 소련 경제를 망친 제일 큰 원인 중 하나가 능력은 생각하지 않고 후진국과 위성국에 무상원조를 해준 탓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물론 소련은 자신들은 절대 무상원조를 해 준 적이 없다고 강변했다. 서방 학자들은 소련이 쿠바와 설탕·석유 교환무역을 하면서 석유 1t과 설탕 1t을 맞교환했으니 그 가격 차이만큼 무상원조를 한 셈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소련은 석유 100t 생산을 위해 노동자 100명이 100시간 일했고 쿠바도 설탕 100t을 위해 노동자 100명이 100시간 일했으니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으로 맞교환했다는 반론을 폈다. 이런 원칙을 그대로 적용한 사회여서 당시 소련은 병원 의사보다 버스운전사 월급이 더 많았다. 버스기사에게는 위험수당이 붙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소련 의사에게 치료를 제대로 받으려면 당연히 뒷돈을 주어야 했다.
   
   결국 지상천국을 만들겠다는 카를 마르크스의 ‘동일노동 동일임금(equal pay for equal work)’과 ‘각자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 만큼 누린다(From each according to his ability, to each according to his needs)’는 정말 천사들의 목소리 같은 철학이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허황한 주장이었는지 필자의 경험과 소련 역사가 그대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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