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회견 중인 고이즈미 신지로. ⓒphoto 유튜브 캡처
기자회견 중인 고이즈미 신지로. ⓒphoto 유튜브 캡처

지난해 9월 11일 일본 도쿄 지요다구에 있는 환경성(環境省)에서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郎) 환경상, 한국으로 치자면 환경부 장관의 취임 기자회견이 열렸다. 그는 취임 전,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났던 일본 후쿠시마현(県)의 오염된 토양을 후쿠시마현 밖으로 이동해 처리할 수 있는 제염처리장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프리랜서 기자가 “반드시 현 밖으로 옮길 수 있다고 약속한다면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달라고 질문했다. 고이즈미 환경상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일본 애니메이션 주인공이나 지을 법한 표정으로 싱긋 웃으면서 덧붙였다. “그것이 약속이니까.”

이 장면은 요즘 한국 온라인 커뮤니티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이른바 ‘펀쿨섹좌’ 밈(meme·인터넷에서 유행하는 패러디 요소)을 대표하는 모습이다. 펀쿨섹좌란 고이즈미 신지로 환경상을 가리키는 단어다. 고이즈미 환경상은 취임 직후인 지난해 9월 22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 기후변화정상회의 전날 가진 기자회견에서 “기후변화와 같은 큰 규모의 문제를 다룰 때에는 즐겁고(fun) 쿨하고(cool) 섹시해야(sexy) 한다”고 발언했다. 다음 날 고이즈미 환경상을 만난 일본 기자가 “어떤 의미에서 즐겁고 쿨하고 섹시한 대책을 말하는 것인지” 물어봤다. 고이즈미 환경상이 답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는 것 자체가 섹시하지 않네요.”

이 발언들에서 나온 단어 ‘펀(fun)’ ‘쿨(cool)’ ‘섹시(sexy)’를 각각 한 글자씩 따서 붙인 별명이 ‘펀쿨섹좌’다. ‘좌’는 인터넷에서 누군가를 치켜세울 때 쓰는 접미어다.

‘펀쿨섹좌’의 대표적인 발언 몇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는 뉴욕에서 있었던 기후변화정상회의 기자회견에서 한 발언이다. 고이즈미 환경상은 일본의 변화 역시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또다시 모호한 발언을 했다.

“지금처럼이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지금처럼이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네티즌들의 패러디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이어진다. 한 야구팬은 트위터에서 “삼성이 2 대 9로 지고 있다는 것은, KT가 9 대 2로 이기고 있다는 뜻입니다”라고 말했다. 한 배달 애플리케이션 사용자는 “그래도 맛있습니다. 그것이 치킨이니까”라는 리뷰를 남겼다. 단호한 긍정 표현이 필요할 때는 고이즈미 환경상이 취임 기자회견에서 보여줬던 미소 짓는 장면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펀쿨섹좌’의 밈이 인기를 얻은 이유는 단지 그의 발언이 모호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해 한·일 관계를 악화시킬 정도로 힘을 얻었던 불매운동과 코로나19 사태로 미묘해진 일본에 대한 인식도 한몫을 했다. 실제로 펀쿨섹좌의 발언이 패러디될 때면 그가 아버지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의 뒤를 이은 세습 정치인이라는 사실, 잇따른 실언에도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는 일본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 같은 배경지식이 함께 거론되곤 한다.

더구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펀쿨섹좌의 발언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이 종종 보여줬던 모호한 화법을 연상시킨다는 의견이 줄을 잇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구치소 수감번호를 따 ‘503’이라고 지칭하는 것처럼 펀쿨섹좌 밈은 정치인에 대한 조롱 섞인 유머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펀쿨섹좌 밈을 보고 웃을 수 있으려면 어느 정도의 반일 감정과 정치인, 특히 분명하지 않은 발언을 하는 정치인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가 함께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래서 펀쿨섹좌 밈에는 항상 같은 댓글이 달린다. “부디 그가 일본 총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일본 정치를 유머로 소비하고 싶은 마음과 반일 감정이 뒤섞여 나온 반응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펀쿨섹좌에 대한 여론은 날로 나빠지고 있다. 한때 차기 총리로까지 언급되던 고이즈미는 잇따른 구설수에 오르내리며 점차 인기가 가라앉고 있다. 지난 4월 25일 일본의 경제 매체 ‘산케이비즈’의 기사 제목이 이런 분위기를 보여준다.

‘고이즈미 신지로 환경상, 존재감 저하로 조정 역부족, 총리로 가는 길에 도달하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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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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