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5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전인대에 참석한 시진핑 주석(왼쪽)과 리커창 총리. ⓒphoto 연합
지난 5월 25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전인대에 참석한 시진핑 주석(왼쪽)과 리커창 총리. ⓒphoto 연합

지난 5월 28일 오후 4시10분 베이징 인민대회당 3층 금색(金色) 대청에서 특이한 광경이 벌어졌다. 제13기 전인대(全人大) 3차회의를 마감하는 리커창(李克强) 총리의 내외신 기자회견장에 기자들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리 총리 앞에는 몇 대의 방송용 촬영 카메라와 대형 TV스크린 2개만 있을 뿐이었다. 같은 시각 인민대회당 내 미디어센터에서도 똑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수백 명의 기자단 앞에 대형 스크린 한 대만 있고 화면에는 리 총리가 등장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화상 내외신 기자회견이 시작된 것이다. 미디어센터에 모인 기자가 질문을 하면 대형 스크린을 통해 그것을 본 이 총리가 답변을 하고, 기자들은 스크린을 통해 그 답변을 보면서 메모하는 방식이다. 물론 이 초유의 기자회견은 중국 총리의 코로나19 감염을 막기 위한 조치였으며 사전에 기자들의 양해를 구해 진행됐다.

그러나 특이한 기자회견은 내외신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 까닭은 회견에서 나온 리 총리의 ‘폭탄발언’ 때문이었다. 회견장에 들어선 리 총리는 먼저 “매체의 친구들이 특수한 시기에 특수한 곤란을 극복하고 중국의 양회(전인대와 정협)에 대해 보도한 것에 감사한다”면서 “코로나19 역병 때문에 우리가 화상회의 방식으로 기자회견을 하지만, 이로 인한 거리가 우리들의 소통에 영향을 주지는 못할 것”이라고 입을 뗐다.

10명 기자의 질의응답이 끝나고, 11번째 질문자로 나선 중국 인민일보 기자가 “올해는 빈곤 탈출의 결정적인 해인데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많은 가구의 소득이 하락하고 심지어 일부 인민은 다시 빈곤상태로 돌아가고 있다”면서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기본 민생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리 총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중국은 인구가 많은 개발도상국으로서 1인당 연간 가처분소득이 3만위안(약 515만원)이다. 그러나 6억의 중저소득층과 그 이하 집단이 있고, 그들의 월평균 수입은 1000위안(약 17만1000원) 안팎이다. 1000위안으로는 중급 도시에서 집세를 내기도 어렵다. 게다가 코로나19 팬데믹까지 맞았다. 코로나19가 지나가면 민생이 가장 중요하다.”

리커창의 폭탄발언, 시진핑 목표에 찬물 끼얹다

리 총리의 발언에 기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중국 인구 14억 가운데 6억이 월 1000위안의 저소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충격적인 현실을 총리가 직접 세계 언론 앞에서 밝혔기 때문이다. 리 총리의 발언이 놀라운 까닭은 또 있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8년 전 취임 당시 내세운 ‘두 개의 백년 목표(兩個百年目標)’ 중 하나가 공산당 창당 100주년인 내년(2021년)까지 ‘전면적 샤오캉(小康·삶에 여유가 있는 수준) 사회’를 실현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올해 농촌의 빈곤 문제를 완전히 퇴치하겠다는 것이 시 주석의 목표다. 이날 기자회견은 결과적으로, 국가주석이 내년까지 ‘국민 모두가 잘사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선포한 마당에 총리가 나서 “아직 멀었다”고 찬물을 끼얹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리 총리의 발언에 중국인들조차 깜짝 놀랐지만, 그가 말한 ‘팩트’는 경제전문가들에 의해 뒷받침됐다. 지난 6월 3일 중국사회과학원 부원장 겸 경제학자인 차이팡(蔡昉)은 한 보고회에서 “중국의 모든 가정을 수입에 따라 5등분 했을 때, 최하층 20%의 월평균 수입은 580위안(약 10만원)이며, 중하층 20%는 1300위안(약 22만3000원) 정도다. 둘을 합치면 전체인구(14억)의 40%로서, 결국 6억명의 월수입이 1000위안 내외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탕민(湯敏) 중국 국무원 참사 역시 지난 6월 11일 ‘중국 경제 상황 간담회’에서 “지금 중국의 소비는 주로 3억명의 중산층에서 나온다. 그들의 1인 평균소득은 한국과 비슷하고, 규모는 미국 전체 인구와도 비슷하다. 하지만 이들을 뺀 11억 인구의 소득은 낮다. 10억명이 아직 비행기를 타보지 못했고, 5억명이 양변기를 사용해보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중국이 겉으로는 ‘경제의 거인’처럼 비쳤지만, 실은 거대 빈곤층을 안고 있는 개발도상국이란 점을 강조한 것이다.

노점상 경제로 하룻밤 새 10만개 일자리 창조

리 총리는 회견에서 실업대책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중국에는 9억의 노동력이 있다. 이들이 취업하지 못하면 9억개의 밥 먹는 입(口)이 있을 뿐이지만, 이들이 취업하면 거대한 재부를 창조할 수 있는 9억쌍의 손(手·노동력)이 된다”고 말했다. 리 총리는 “우리는 새로운 일자리를 계속 창조해야 한다. 그동안 산업의 업그레이드와 정보기술혁명을 통한 신산업 분야에서 1억개의 일자리를, 노동력 투입이 적은 인터넷 기반의 ‘영공(零工)경제’에서 2억개의 일자리를 만들었다. 올해는 874만명의 대학 졸업생과 퇴역군인이 쏟아진다. 이들의 일자리를 만들고 자리 잡게 하는 데 착실히 정책을 펼칠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이어 “2주 전 서부의 한 도시에서 현지 사정을 감안하여 3만6000개의 이동상점(流動商販·노점상)을 설치했더니 결과적으로 하룻밤 사이에 10만개의 일자리가 생겼다는 보도를 봤다”면서 ‘노점상 경제(地攤經濟)’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리 총리가 언급한 서부 도시는 청두(成都)로 추정되고 있다.

리 총리의 발언을 전후로 중국 대도시에서는 노점상(地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서부의 청두와 충칭(重慶)을 비롯, 우한(武漢)과 상하이(上海), 칭다오(靑島)에 이어 베이징(北京)까지 번지고 있다. 베이징에서는 노점상 밀집지역 109곳의 위치를 알려주는 ‘베이징 노점상 지도’가 주민들 사이에 인기를 끌고 있다. 산시성(陝西省) 북부의 소도시인 위린(楡林)시는 시 중심지 834곳에 임시 노점거리를 지정해주었다. 산둥(山東) 장시(江西)성 등 일부 지방정부도 지금까지 도시 미관을 위해 강력히 단속해오던 노점상을 임시로 합법화해 영업시간과 지점을 지정하기도 했다. 노점상 개설이 폭발하자, 이동 매장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만능 장사 트럭’을 개발한 자동차 업체 우링(五菱)의 주가가 3일 사이에 120% 폭등했다. 전인대가 끝난 뒤 리 총리는 6월 1일 산둥성(山東省) 옌타이(煙台)의 주택가 노점거리를 방문해, 감자두부야채볶음 요리를 판매하는 노점상을 찾아 “노점상 경제는 중요한 일자리의 근원으로서 중국 경제의 활기”라고 강조해 힘을 실어주었다.

‘노점상 경제’를 둘러싼 권력투쟁?

문제는 전국 대도시에서 노점상들이 거리를 점령하고 교통에 혼란을 초래하자 이에 대한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은 지난 6월 4일 중문판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선전부가 주요 관영 매체에 ‘노점상 경제’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보도했다. 또 국영 중앙방송(CCTV)은 6월 7일 논평을 통해 “노점상 경제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맹목적으로 이를 추구할 경우 뜻하는 바와 정반대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베이징일보 역시 시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노점상 경제가 도로점거와 교통마비, 짝퉁판매, 소음발생 등의 사회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매체들의 부정적 보도가 잇따르자 ‘노점상 경제’를 둘러싸고 시진핑과 리커창의 갈등이 불거진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돌았다.

그러나 지난 6월 17일 현재 필자가 확인해본 결과, 중국 검색 사이트인 바이두(百度)에서 ‘노점상 경제’란 단어는 최근의 소식까지 여전히 검색되고 있다. 또 리커창 총리의 발언과 그 의미, 노점상 영업시간과 방법 등을 소개하는 정보가 넘쳐났다. 중국 포털사이트 왕이(網易)의 6월 17일 자 보도에 따르면, 중국 각 도시의 소방 당국이 노점상을 대상으로 소방안전교육을 실시하고, 화재 시 신속한 진화를 위한 대책을 수립하는 등 ‘노점상 경제’의 안전한 항해를 돕는 대책마련에 나섰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볼 때, ‘리커창은 노점상을 옹호하고, 시진핑은 이를 막는다’는 식의 권력투쟁설은 사실이 아니다. 중국 지도부 내에서는 적어도 경제 활력을 되살리기 위한 노점상 경제의 효용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인민노선’으로 시진핑에 반격 시작한 리커창

그렇지만 최근 리커창의 언행에서 미묘한 상징성이 감지되는 것도 사실이다. 우선 외신 보도에 따르면, 리 총리의 ‘노점상 경제’ 발언은 시 주석과의 사전 양해하에 나온 것이 아니라는 지적이 있다. CCTV가 “노점상 경제가 만병통치가 아니다”라고 논평한 것도 이를 시사한다. CCTV는 당 선전부의 통제를 받는 조직으로, 시진핑의 직접 영향권에 있다. 하지만 시진핑이 최고권력자라고 해도 리 총리 발언 이후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되고 있는 노점상을 전면 차단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전국적인 노점상과 실업자의 반발을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리 총리의 발언에서도 시 주석과 묘하게 대비되는 용어들이 등장한다. 가령 옌타이 노점상을 방문한 자리에서 리 총리는 “국가는 인민이 만드는 것이다(國家是人民組成的). 인민이 살기 좋아져야 국가도 비로소 좋아진다(人民好了 國家才能好)”라고 말했다. 시진핑이 ‘공산당’의 통치와 ‘샤오캉’이란 국가 목표를 강조한다면, 리커창은 ‘인민’의 중요성과 ‘6억 빈곤인구의 삶’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식 표현을 빌리자면, 리커창 노선이 ‘사람이 먼저’라면, 시진핑은 ‘당이 먼저’이다. 리 총리의 인민 중심 노선은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리 총리가 노점상을 격려하는 뉴스 아래에 달린 댓글 중에서 “총리의 말이 백성의 마음속에까지 닿고 있다”는 댓글에 416개의 추천이 있었다.

리 총리의 이러한 과감한 행보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무엇보다 총리로서 남은 2년 반의 임기(2022년 말) 동안 할 말은 하는 총리가 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2012년 지도부 교체 과정에서 리커창은 시진핑과 라이벌 구도까지 형성했던 인물이다. 그런 리커창이 지난 7년 동안 시 주석의 권세에 눌려 할 말도 제대로 못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임기 동안 목소리를 내지 못하면 자신을 지탱해준 세력(후진타오 전 주석과 공청단)의 발언권이 크게 약화될지도 모른다. 여기에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시진핑 권력의 누수현상도 리 총리의 재기에 한몫한 것 같다.

미국과의 경제 전쟁, 코로나19 사태 초기 시진핑의 무능, 코로나19 전개 과정에서의 진실 은폐와 왜곡, 국제사회의 비판과 고립, 홍콩 사태의 악화와 대만의 반중 노선 등이 시진핑의 발목을 잡고 있다. 하늘을 찌를 듯하던 시진핑의 권력도 한풀 꺾인 기세가 역력하다. 이러한 정책 결정 과정에서 시진핑이 저지른 실수와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리커창이다. 또 중국 안팎에서 시진핑의 퇴진을 촉구하는 지식인과 기업인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리커창에게 유리한 환경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다.

현재의 공산당 권력구조에서 리 총리가 시 주석의 권위에 도전하기는 어렵다. ‘시·리 권력투쟁설’은 현재로선 현실과 거리가 있다. 그러나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리 총리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분명하다. 리 총리는 2022년 말 권력 교체기에 대비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때 시 주석이 관례를 깨고 3연임으로 가느냐 아니면 차세대에 물려주느냐를 결정해야 한다. 그때를 내다보며, 리커창은 과거 마오쩌둥이 했던 것처럼 ‘인민’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중국에서 공산당이란 배를 뒤엎을 수 있는 힘은 ‘인민’에게만 있다.

지해범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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