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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4호] 2020.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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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핀란드서 지켜 본 기본소득 실험… 최종 보고서의 결론은?

▲ 헬싱키의 거리 풍경. photo 셔터스톡
핀란드는 혁신(Innovation)의 나라다. 인구 550만명밖에 안 되는 소국이지만 세계 최초로 주도한 혁신적 정책이 꽤 많다. 세계 최초로 여성에게 피선거권 부여, 세계 최초 원자력 고준위방폐장 건설(1906년), 세계 최초 모든 초등학생에게 학교 급식 무료 제공(1948년) 등 과감한 정책을 실행하여 좋은 선례를 만들어가는 블루오션의 나라다. 그런 핀란드가 또 한 번 일을 크게 벌였다.
   
   국가 차원으로는 세계 최초로 ‘기본소득’ 실험을 단행한 것이다.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 계획이 처음 발표된 것은 2015년이었다. 30년간 핀란드에서 살아온 필자는 그때 핀란드 언론이 아닌 한국 신문 기사로 그 소식을 처음 접했다. 핀란드보다 다른 나라에서 이 뉴스가 더 대서특필됐다.
   
   당시 한국 기사 제목은 ‘핀란드, 전 국민에게 기본소득 100만원 일괄 지급 결정’이었다. 부랴부랴 핀란드 뉴스를 검색하며 진짜 매달 100만원 공돈이 생기는 줄 알고 잠시 흥분했던 기억이 난다.
   
   알고 보니 이 기사는 소위 말하는 가짜뉴스였다. 우리나라 언론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전 세계 언론에서 일제히 핀란드가 당장 국민 모두에게 100만원씩 매달 기본소득을 지불하는 것처럼 보도했고, 이 보도에 가장 놀란 것은 물론 당사자인 핀란드였다.
   
   
   장기 실업자 2000명에게 매달 75만원
   
   오해를 풀기 위해 핀란드 정부는 자신들의 계획을 좀 더 자세히 알렸다. 액수와 대상자는 결정된 것이 없다고 했다. 그렇게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은 처음부터 조금 삐걱거리기는 했지만 전 세계가 주목하는 화려한 출발을 했다. 그 후 핀란드는 임의로 선정된 장기 실업자 2000명을 대상으로 2017년 초부터 2년 동안 매달 560유로(약 75만원)를 지급했다.
   
   세계 각국 언론은 기본소득 실험을 단행한 핀란드에 다시 한번 주목했다. 기본소득을 받았던 핀란드의 한 남성은 당시 외국 언론과 인터뷰를 무려 수백 번이나 했다고 한다. 이것만 봐도 기본소득 실험에 보인 세계 각국의 관심도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핀란드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는 사실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하지만 핀란드의 소수 정당인 공산당과 녹색당 소속 정치인들만이 ‘변방’에서 외치는 잘 들리지 않는 소리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핀란드의 중도우파 연합정권이 기본소득 정책에 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핀란드 내부에서도 정부의 갑작스러운 발표에 의외라는 반응이 많았다. 소수의 극좌파 정당이 수십 년간 밀었던 정책을 핀란드 중도우파 정권이 덥석 잡은 격이니 말이다.
   
   당시 핀란드 경제 상황을 보면 이해가 조금 더 잘될 것 같다. 유럽의 ‘New Sick Man(새로운 환자)’이라는 다소 치욕적인 별명까지 얻을 정도로 핀란드 경제가 어려웠다. 수년간 유로존에서 몰락하는 경제로 환자 취급을 받던 ‘Old Sick Man(오래된 환자)’ 그리스와 거의 같은 수준으로 경제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중국의 덩샤오핑이 말했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즉 경제 부흥이 공산주의나 자본주의의 이념보다 더 중요하다는 실용주의 경제론)처럼 좌파, 우파 상관없이 경제만 제대로 잡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상황이었다.
   
   핀란드 경제를 수렁으로 빠뜨린 주요 원인으로는 핀란드의 대표 기업이었던 노키아의 몰락, 경쟁력을 잃은 높은 인건비, 러시아와의 부진한 무역과 함께 핀란드 정부가 짊어진 막대한 사회보장 비용 등이 꼽혔다. 핀란드는 당시 국내총생산(GDP) 대비 사회복지 비용이 31%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2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핀란드는 이제 그 커다란 복지 정부에 ‘기본소득’으로 단순화된 복지를 적용, 복지 비용과 복지 관련 행정 비용 축소를 꾀했다. 기본소득은 보통 복지의 확대로 해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미 세금을 복지에 많이 할당하고 있는 기존의 복지국가에서는 기본소득 액수에 따라 자칫 ‘복지의 축소’가 될 수도 있다. 기본소득은 알면 알수록 그 개념이 단순하지 않다.
   
   
   외신이 ‘실패’로 타전한 작년 중간보고서
   
   복지 비용 축소보다 핀란드 정부가 기본소득 실험에서 얻고 싶었던 더 큰 성과는 기본소득이 핀란드의 높은 실업률을 잡아줄 실마리가 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상도 직업인은 철저히 배제하고 장기 실업자로만 제한했다. 핀란드의 기존 실업자금은 수령하려면 조건이 많이 붙고 내야 하는 서류도 많다. 자칫 서류가 미비하거나 아르바이트를 해서 수입이 생기면 금액이 깎이는 일도 다반사였고, 강제로 참여해야 하는 이벤트나 강좌도 있어서 편안하게 앉아서 돈을 받는 개념은 아니다. 핀란드 정부는 기본소득 액수를 기존의 실업자금과 비슷하게 책정했지만 강제성은 다 없앴다. 감시하고 쪼면서 돈을 주기보다는 자유롭게 무조건적인 돈을 줄 때 취업 동기가 더 강화되는지 핀란드 정부는 확인하고 싶었다. 채찍은 거두고 당근만 받아먹게 된 말은 과연 더 잘 달렸을까.
   
   기본소득 실험이 다 끝나고 1년 후인 2019년, 중간보고서가 발표됐다. 통제 그룹과 비교했을 때 아무런 조건 없이 560유로를 받은 기본소득 수혜자 그룹의 취업률은 실망스럽게도 더 높지 않았다. 당시 핀란드 정부는 “아직 최종보고서가 발표되지 않은 시점’이라면서 ‘실패’나 ‘성공’이라는 단어 사용을 자제하고 말을 아꼈다. 하지만 많은 외신은 “기본소득 실험 결과 실패”라는 부정적 기사를 온 세계에 타전했다. 그런데 보고서에는 절망 속 마치 한 줄기 빛처럼 긍정적인 문구도 포함돼 있었다. 취업률은 늘지 않았지만, 기본소득이 수혜자의 스트레스를 줄여주고 정신건강을 향상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당근을 먹게 된 말은 더 빨리 달리지는 않았지만 더 행복하게 달렸던 것 같다.
   
   핀란드 국민들 사이에서도 최근까지 기본소득은 비현실적인 정책이라는 비난이 많았다. 전통적으로 노동을 신성시하는 핀란드 사람들에게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공짜로 주는 돈은 잘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념인 것 같다. 핀란드에서는 정부로부터 각종 보조금을 받을 때 각종 증빙서류와 정당한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 이유와 조건 없이 주는 눈먼 돈은 별로 없다. 기본소득 관련, 핀란드 여론조사를 봐도 정부로부터 생활지원금을 받았거나 고용이 불안정한 프리랜서 혹은 실업자들은 기본소득에 대체로 찬성하지만, 자본가층이나 우파 정당 정치인 그리고 부유층, 안정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기본소득에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래서 보통 찬성이 절반을 넘기지 못한다.
   
   2020년 5월 초, 세계가 코로나19로 발칵 뒤집혀 있던 때에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 최종 평가보고서가 드디어 발표됐다. 지난 1차 보고서와 취업률 수치에서는 변한 것이 없지만 기본소득 수혜자의 정신건강 부문에 대해 좀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깊게 파고들었다. 수혜자와의 심층 인터뷰를 통해 작성된 이 보고서에는 직장을 찾는 데는 실패했지만, 스트레스와 우울감 그리고 외로움이 줄어들어 정신건강이 전반적으로 향상되었다고 적혀 있다. 또한 사회에 대한 신뢰감도 높아졌으며 생활의 활력과 함께 자신감도 높아졌고 자기주도적 삶도 영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일부 수혜자들은 자원봉사 활동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으며, 기본소득의 도움을 받아 그들의 꿈을 실현할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2019년 중간보고서를 발표했을 때의 소극적 태도와는 달리, 핀란드 정부는 이번에는 기본소득 실험이 실패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다. 이런 실험을 국가 차원에서 단행했다는 것, 또 실험 결과를 얻은 것 자체가 벌써 큰 성과라는 것이다. 핀란드 정부가 애초에 원했던 고용증진 효과는 거두지 못했지만, 참가자들의 정신건강 향상이라는 뜻밖의 결과를 얻게 된 것도 의미가 크다고 했다. 정신이 건강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장기적으로 보면 직장을 얻을 확률도 더 높다며 결국은 간접적 고용증진 효과도 있을 것이라고 관련 연구자는 강조했다.
   
   사실 기본소득의 핵심이 최근에는 고용창출보다는 수혜자의 정신건강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 전반적 추세다. 핀란드 외에 다른 곳(미국 알래스카주, 캐나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케냐, 네덜란드 등)에서도 기본소득 실험이나 실행을 통해 얻은 결론이 핀란드의 보고서와 거의 비슷하다. 기본소득은 취업률을 높이는 가시적 효과는 약하지만, 경제적 안정이 정신적 안정으로까지 이어져 삶에 대한 만족도를 전반적으로 제고시켜 준다는 것이 속속 증명되고 있다.
   
   “When you are secure and free, you feel better.(안전하고 자유롭다고 느낄 때, 기분이 더 좋아집니다.)”
   
   
   고용창출보다 수혜자의 정신건강이 핵심
   
▲ 기본소득 수혜자인 기자 출신 투오마스 무라야가 쓴 ‘기본소득 실험실의 동물’ 표지.
핀란드에서 기본소득을 받았던 투오마스 무라야씨가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기본소득 실험 기간 중 그는 그토록 원하는 정규직은 찾지 못했지만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았으며 책도 2권이나 쓸 수 있었다. 그는 원래 오랫동안 핀란드 한 유력 지방지의 벨기에 브뤼셀 주둔 EU 담당 특파원으로 일했었다. 몇 년 전 신문사가 해외파견 특파원을 대폭 축소하는 구조조정을 하며 직장을 잃고 실업자가 됐다. 나이도 좀 있고 언론계가 전반적으로 인원을 축소하는 분위기여서 장기 실업에 빠지게 되었다. 잡지에 프리랜서로 글을 기고하며 돈을 벌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실업자 사무소에 보고하는 것이 꽤 성가신 일이었다고 한다. 혹시 서류가 미비할 경우에는 실업자금 수령이 늦어지거나 끊기는 경우까지 생겨 곤란함을 느낀 적도 많았다. ‘이력서 만들기’ 등 그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을 반복하는 구직 코스에도 강제적으로 참여해야 했다. 안 그러면 실업자금이 중단되기 때문이다.
   
   이런 나날을 보내던 중 기본소득 실험 수혜자로 선정됐다는 ‘기쁜’ 편지를 받게 되었고, 그 후 2년 동안 그는 더 많은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기간 중 구직활동과 더불어 저술활동에도 전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쓴 두 권의 책 중 한 권이 기본소득과 관련한 책이었다. 기자 출신인 그는 자신의 경험만이 아니라 다른 기본소득 수혜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책을 완성했다. 책 제목은 ‘Perustulokoe-eläin’, 번역하면 ‘기본소득 실험실의 동물’이다. 그는 기본소득이 수혜자들에게 끼쳤던 영향에 대해 1인칭 시점과 3인칭 시점을 적절히 배분해 써내려 갔다. 자신처럼 정신건강이 향상된 경우, 기본소득을 통해 ‘꿈’을 실현시켜 자영업자로 출발한 사람들의 이야기 등 기본소득 실험실에서 벌어진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냈다. ‘실험실 동물’로 지낸 2년 동안 그는 행복했고 그가 인터뷰했던 다른 사람들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의 책에 등장하는 몇 명은 필자가 직접 만나본 사람도 있어서 더 반가웠다.
   
   유하 야르비넨씨는 원래 창문틀을 만들어 팔던 자영업자였다. 사업이 파산한 후 꽤 오랫동안 실업 상태에 있었다. 직업을 찾기 어려운 시골에 거주하면서 실업자금을 받았다. 자칫 다른 소득이 생기면 실업자금이 줄어들거나 쉽게 끊기기 때문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게다가 6명의 자녀를 키우고 있는 그로서는 모험보다 안정이 더 필요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조건적인 기본소득 560유로를 받게 됐다는 편지를 정부로부터 받고 그는 새로운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사실 그는 자신이 기본소득 수혜자로 뽑히길 바라며 매일 편지함을 열어봤다고 한다. 기본소득을 받는 동안 그는 핀란드 전통 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서 만든 그만의 독창적인 북을 인터넷을 통해 적극적으로 팔 수 있게 되었다.(이전에는 실업자금이 줄어들까봐 판매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집 옆 작업실에서는 북 만들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아트비엔비(Art BnB)’라는 특이한 콘셉트의 워크숍도 개최하기 시작했다. 세계 유수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유명 인사가 된 그를 찾아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핀란드 시골로 모여들었다. 현재 그는 페이스북 팔로어만 1000명이 넘는다. 기본소득은 자신의 꿈이었던 전통 북 장인 자영업자의 길을 열어주었다.
   
   
   실업자에서 실업가가 된 30대 여성
   
   30대 후반 여성인 시니 마르티넨씨도 기본소득을 해피엔딩으로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몇 년 전 조국 핀란드에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핀란드 내부 상황과 맞물려 생각보다 쉽게 직업을 찾을 수 없었다. 원래 사회정의와 난민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구직활동을 하면서도 꾸준히 관련 자원봉사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기본소득 실험을 앞두고 있던 2016년 필자가 그녀를 처음 만난 장소도 헬싱키 난민센터다. 그날 자원봉사를 해야 한다며 그녀는 인터뷰 장소를 그곳으로 정했다. 그후 오랫동안 그녀를 만나지 못했지만, 기본소득이 그녀를 어떻게 바꿔놓았을지 가끔씩 궁금했다. 그러다 투오마스 무라야씨의 책을 통해 시니 마르티넨씨가 동료 2명과 함께 레스토랑을 창업한 사실을 알게 됐다. 그 레스토랑은 헬싱키의 한 지역에서 이미 꽤 알려진 인기 레스토랑이 되었다.
   
   올해 초, 레스토랑을 방문해서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 필자는 감탄과 감동을 동시에 맛보았다. 자신도 실업자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청년 실업자를 고용해서 레스토랑에서 열심히 훈련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옆에서 밀착 교육을 담당하고 인생 코칭까지 해주고 있었다. ‘실업자’에서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실업가’로의 성공적 대변신이었다. 그녀는 기본소득이 그녀의 이런 변신의 조력자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필자가 서면으로 인터뷰한 30대 여성 미라 야스카리씨도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던 자신에게 기본소득이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정규 직장은 찾지 못했지만 기본소득을 받으며 스트레스가 줄어들고 우울증 증상이 완화됐다. 또한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경험하며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직업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됐다. 이런 다양한 경험이 현재 구직활동에 큰 도움이 된다며 기본소득은 득이 많은 제도라고 거듭 강조했다.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 최종보고서를 바라보는 긍정적 시선은 핀란드 정부의 아전인수 격 평가만은 아니다. 2019년 중간보고서 발표 시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 결과를 부정적으로 다뤘던 많은 외신도 최종보고서에 대해서는 훨씬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 이유는 보고서에 긍정적 내용이 더 상세하게 추가된 것도 관련이 있겠지만 불과 1년 만에 코로나19 사태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인 것 같다.
   
   세계 각국은 급속히 퍼지는 코로나19 전염병으로 건강만 위협받고 있지 않다. 경제활동도 장기간 통제되고 마비되며 고통당하는 국민이 늘어나자 각국은 대책 마련에 부심하게 되었다. 그동안 기본소득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던 많은 정상급 정치인이 갑자기 이 정국을 타개할 적절한 정책으로 기본소득을 꼽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프란치스코 교황까지 지난 부활절 미사에서 “지금이 기본소득 제도를 고려할 적절한 시간일지도 모른다”며 기본소득에 대해 언급했다.
   
   코로나19 사태가 한창 피크를 이루었던 몇 주간, 구글에서 ‘basic income(기본소득)’이라는 검색 건수가 한때 폭발적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기본소득은 불과 몇 달 만에 비현실적인 담론에서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떠올랐다. 재난기본소득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싱가포르, 대만 등에서는 국민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자체별로 재난지원금을 지원해서 큰 환영을 받았다. 재난지원금은 일시적으로만 주어지지만 실제로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 일부 국가에서는 이번 기회를 통해 기본소득 개념의 지원금을 정기적으로 국민에게 지급할 것을 고려 중이라고 한다.
   
   
   코로나19에서 살아남을 방탄조끼
   
   지금까지 기본소득은 공장 자동화 등의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노동력 감소가 가져온 기술 실업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됐다. 하지만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많은 사람이 잠정적 실업에 빠지거나 자영업자 혹은 중소기업인까지 어려움에 빠지게 되면서 ‘전염병 실업’에도 기본소득이 좋은 약이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세계적인 경제학자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최근 국내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코로나19 정국을 ‘전쟁’에 비유했다. 이 전쟁에서 전방에 몰린 사람은 서민과 빈민이며, 후방에 있는 사람들은 돈이 많은 부자라고 일갈했다. 가난한 사람에게 이 전쟁에서 병만큼 무서운 것은 직장을 잃고 소득을 잃는 것이다. 기본소득은 이런 이들에게 전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탄조끼 혹은 탄환과 무기가 될 수 있다.
   
   기본소득의 지지자로 유명한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의 경제정책 학과장인 베른하르트 노이메카(Bernhard Neumärker) 교수는 현 코로나19 시국과 기본소득과의 관계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제 생각에는 전통적이며 구태의연한 복지국가 모델로는 현 위기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발전과 위기가 함께 공존하는 디지털 시대에 기본소득은 현 시장경제에 맞는 몇 안 되는 지속가능하며 유망한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 못 한다”는 말이 먹히던 시대는 가고 있다. 정규직 중심의 완전고용이 깨진 사회에서 더 이상 이런 프로파간다를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사람은 더 이상 노동력의 원천이 아니다. 4차 산업혁명은 부르주아 계급마저 제외시킨 자본만의 단독 혁명, 다시 말해 사람이 빠진 산업혁명이다. 테슬라 CEO엘런 머스크가 얘기했듯 정부가 국민에게 임금을 주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인간의 지난한 노력으로 만들어진 테크노피아는 인류에게 자가당착적 역폭풍을 일으키고 있다. 어렵게 이루어낸 테크노피아가 암울한 디스토피아로 변하지 않으려면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최소한의 경제적 안정을 보장해줄 수 있는 기본소득이 아닐까.
   
   기본소득이 잘 실현되려면 재원 확보만큼 중요한 조건이 있다. 일과 여가, 인생과 소득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세계관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4차 산업혁명으로 근대 산업사회를 이끌었던 노동 패러다임은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노동 중심적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과도기적 단계에 머물러 있다.
   
   워라밸(work-life balance·일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 신조어)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우리는 일과 삶을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다. 소위 ‘일’이란 임금노동으로 한정적으로만 생각한다. 이제는 이런 노동 중심적 패러다임을 벗어나 일의 개념을 넓히고 바꿔야 할 때다.
   
   코로나19 사태로 필자도 예전보다 ‘일’이 많이 줄어들어 집에서 솥뚜껑 운전하며 지내는 날이 늘어났다. 아침 먹고 치우고 돌아서면 또 점심 그리고 저녁. 이렇게 식사만 제대로 챙겨도 하루가 훌쩍 지나간다. 핀란드에서는 그동안 레스토랑도 몇 달간 문을 닫아 외식도 불가능했다. 신기하게도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들 돌보고 이것저것 하다 보면 지루하다기보다는 오히려 하루 24시간이 모자란다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19 사태가 있기 전 몇 달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스포츠 마사지까지 받아가며 일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는 가사일도 대충했고 아이들에게도 관심을 많이 기울이지 못했다. 요즘 친구들이 안부를 물으면 “하는 일은 별로 없는데, 시간이 너무 잘 가네”라고 대답하곤 한다. 그러다 어느 날 “유레카!” 내가 지금 하는 일이 비록 임금노동은 아니지만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돈 버는 일을 하지 않을 뿐이지 나는 생활에 필요한 일에 더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산주의에 이르는 자본주의적 길”
   
   자본주의를 무너뜨리고 공산주의를 꿈꾸던 칼 마르크스가 이상적으로 그리던 사회는 일과 생활이 일치하는 사회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가 원하던 사회는 그가 원했던 공산주의 혁명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의 저자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기본소득이야말로 공산주의에 이르는 자본주의적 길”이라는 역설적이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발언을 했다.
   
   핀란드 기본실험 최종보고서를 봐도 일부 기본소득 수혜자들이 기본소득 덕분에 도움이 필요한 가족과 이웃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으며 친지에게 베푸는 봉사활동을 ‘일’로 엄연히 규정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들은 임금노동보다 이런 봉사활동이 더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기업에서 임금을 받는 일만 일이 아니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일, ‘양육’이나 ‘가사’ 같은 집안일, 서로 돕는 지역사회 활동도 모두 다 우리의 삶에 필요한 일이다. 기업에서 주어지는 노동이 사라져도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은 많이 남아 있다.
   
   2020년 6월 현재, 세계인들은 기본소득의 필요성에 있어서는 이전보다 더 많이 공감하는 것 같다. 나라마다 이를 실현해가는 방법은 다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요즘 전 국민 고용보험이 기본소득과 함께 많이 논의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핀란드 내부에서도 기본소득 실험을 더 확대해 다시 실시하자는 의견도 있고, 음의 소득세(Negative income tax·고소득자에게는 세금을 징수하고 저소득자에게는 보조금을 주는 제도)를 제안하는 목소리도 꽤 높다.
   
   ‘국제기본소득네트워크’의 창시자인 벨기에 경제학자 필립 반 파레이스(Philippe Van Parijs) 교수는 기본소득은 점진적으로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뒷문으로 슬쩍’ 들어올 수밖에 없는 제도라고 말했다. 모두에게 최소한의 삶을 보장해 준다는 원칙을 견지하고 그 방향을 향해 길을 잃지 않고 계속 나아간다면 기본소득이 그의 말처럼 언젠가 뒷문으로 슬쩍 들어와 우리의 안방을 차지할 날이 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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