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쭐랑롱꼰대학교 부설 백신 연구센터에서 한 연구원이 실험용 코로나19 백신을 들고 있다. ⓒphoto 뉴시스
태국 쭐랑롱꼰대학교 부설 백신 연구센터에서 한 연구원이 실험용 코로나19 백신을 들고 있다. ⓒphoto 뉴시스

2009년 흔히 ‘돼지독감’이라고 부르던 신형 인플루엔자A(H1N1)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의 이야기다. 전 세계 3만여명이 이 전염병에 걸린 것으로 확인되자 세계보건기구(WHO)는 2009년 6월 11일 팬데믹을 선언했다. 팬데믹 초기, 몇몇 선진국은 H1N1 백신을 연구하고 있는 다국적 제약회사들과 미리 계약을 맺었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백신은 10억~20억개로 추정됐다. 특히 미국은 3곳의 제약사와 계약을 맺으며 6억개를 선주문했다. 미국 인구가 약 3억명이니 모든 미국인이 두 차례 접종받을 수 있는 분량이었다. 당시 전문가들이 새로운 전염병에 내성을 갖기 위해서는 한 번의 백신 접종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백신이 등장해 H1N1이 완화되는 기미가 보이자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은 여전히 전염병에 고통받으며 후순위로 밀려나 있는 나라들을 위해 백신을 기부하겠다고 발표했다. 여기에는 백신의 효능도 한몫했다. 전문가들이 세운 가설과 다르게 한 번만 맞아도 유효한 면역력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예상보다 여유분이 생기면서 기부를 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겼다. 미국 외에도 기부에 동참한 나라들은 영국, 호주, 프랑스, 이탈리아, 노르웨이, 스위스 등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국가였다. 백신이 부유한 나라로만 향하는 것을 고심해오던 WHO 관계자들은 환영 논평을 내며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美, 아스트라제네카와 백신 3억회분 계약

10여년이 흘렀지만 백신의 불균형한 공급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 과제로 남았다. 바이러스는 국경을 가리지 않지만 백신은 국가마다 접근 정도가 다르다. 이전에도 부국(富國) 뒤에 올 차례를 마냥 기다려야 했던 빈국(貧國)은 코로나19가 창궐하는 지금도 백신 대기표를 뽑고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WHO에 따르면 전 세계 141개 연구팀이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착수했고 후보군에 오른 13개는 이미 인간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에 들어갔다. 올해 안에 추가적으로 임상을 실시할 것으로 보이는 백신 후보만 50여개에 달한다. 몇몇 후보들은 이미 임상시험에서 유의미한 결과를 얻고 있다. 특히 수요가 높은 건 옥스퍼드대의 제너연구소와 영국의 다국적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가 개발 중인 ‘AZD1222’로 불리는 백신이다.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세계 곳곳에서 3만명이 참여하는 3상 임상시험에 들어갔다. 원활하게 흘러간다면 9~10월께 개발을 완료할 것으로 점쳐지는데 이미 여러 나라에서 이 백신을 확보하겠다며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 선매입을 요구하는 국가들은 모두 선진국이다.

지난 5월 7일 영국 정부는 옥스퍼드대-아스트라제네카의 연구에 7900만달러를 지원하기로 했다. 지원의 대가는 백신 3000만회분으로 알록 샤르마 영국 기업부 장관은 이미 “영국인들이 최초의 백신을 맞게 될 것이다”라고 공언했다. 미국 역시 이곳과 연을 맺었다. 미국 정부는 이미 존슨앤드존슨, 모더나, 사노피 등 글로벌 제약사와 백신 개발을 지원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고 5월 21일 아스트라제네카와 최대 12억달러의 계약을 맺으면서 백신 3억회 분량을 확보했다. 미국인들 전원이 한 번씩 맞을 수 있는 양이다.

유럽연합(EU)은 개별적으로 물량을 확보하는 국가들이 많아지는 건 유해한 경쟁이라고 판단했다. 특히 회원국 간 재정 격차가 존재하기에 EU 내 결속을 해칠 수도 있고 백신 가격 협상 테이블에서도 불리하다고 봤다. 그래서 ‘포괄적 백신동맹’이라는 위원회를 만들어 여기에 협상권을 위임하기로 했다. EU 내 백신 보급을 담당하는 이 조직 역시 6월 15일 아스트라제네카와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2020년 말까지 4억회 분량의 백신을 받기로 했다.

백신을 개발하는 일은 엄청나게 비싼 작업으로 무엇보다 실패의 위험이 크다. 연구원들이 희망을 걸고 있는 물질이 막상 마지막 임상시험에서 무의미해질 수도 있고 심지어 인체에 치명적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도 있다. 슈피겔은 “과거 있었던 모든 백신 프로젝트 중 약 6% 정도만이 시장에 진출했다”고 전했다. 코로나19 백신도 이 흐름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141개의 백신 연구 중 선택받은 일부는 운 좋게 백신으로 승인될 수 있지만 모든 프로젝트가 실패하는 경우의 수도 분명 나올 수 있다. 불확실성이 큰 실험인데도 부유한 나라들은 이미 나오지도 않은 약을 주문하고 있고 백신 승인을 받기도 전에 배달을 기대하고 있다.

만약 코로나19 백신이 등장해 전 세계적으로 승인되면 기본적으로 60억개 이상의 약병이 필요하다. 1회 접종이 아니라 추가 접종이 필요하다면 120억개가 넘는 백신이 확보돼야 세계가 평화로워질 수 있다. 게다가 백신은 택배 배달하듯 전달할 수 없다. 모든 백신은 제조 시점부터 사용 시점까지 정확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시설이 있어야 효과적인 상태를 유지한다.

이 정도 양을 만들고 정교한 방법으로 전달하려면 앞으로 수년이 걸릴 수도 있는 문제다. 사람들의 수요를 이내 충족할 수 없다면 결국에는 어려운 질문과 마주해야 한다. 누가 먼저 공급받을 것인지를 물을 수밖에 없고 이 문제는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3월 2일(현지시각) 백악관에서 코로나19와 관련해 제약회사 임원들과 회담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3월 2일(현지시각) 백악관에서 코로나19와 관련해 제약회사 임원들과 회담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글로벌 제약사 “백신 수익금 걷지 않겠다”

백신 공급에서 최대 변수는 미국이다. 지난 5월 15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만든 ‘초고속 개발팀(Operation Warp Speed)’은 백악관의 조바심을 보여주는 조직이다. 무려 100억달러의 예산을 확보한 이 팀은 수십억달러의 돈을 미국 제약회사들에 쏟아붓고 있고, 미군을 포함해 수많은 연구기관을 개발 프로젝트에 동참시키고 있다. 목표는 단 하나다. 2021년 초까지 효과적이고 안전한 백신을 개발해 미국인들이 우선 접종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한 특례도 발동했다. 백신 개발은 검증 과정이 많아 수년이 걸리는 게 보통이지만 이를 단 수개월로 대폭 줄이려고 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접근법이 너무 성급하다고 비판하지만 정치적으로 백신이 너무나 필요한 백악관은 오히려 11월 대선 시간표에 맞춰 결과물을 내놓으라고 재촉 중이다. 초고속 개발팀과 업무를 나눈 미국 보건복지부는 개발 대신 확보가 목표다. 아스트라제네카와 계약을 맺은 것처럼 세계 도처에서 백신을 구하기 위해 막대한 달러를 흔들며 계약서를 내밀고 있다.

트럼프 정부의 백신 전략은 ‘트럼프 주의’를 그대로 따른다. 백신 역시 ‘미국 우선주의’ 전략이다. 세스 버클리 세계백신면역연합(GAVI) 대표는 이런 움직임을 우려하고 있다. GAVI는 개발도상국에 백신을 공급하는 단체다. 그는 “몇몇 국가가 백신을 맞는다고 하더라도 다른 지역에서 활발하게 발병이 일어난다면 세계는 결국 원상태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이런 미국식 선점은 가난한 나라에는 비극이다. 인권단체나 국제기구가 우려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영국 너필드 생명윤리위원회(Nuffield Councilon Bioethics)의 아르주 아메드 연구원은 AP통신과 가진 인터뷰에서 “더 이상 선의에만 의존할 수 없다. 에이즈 치료제도 저소득 국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데 10년이나 걸렸다”고 말했다. 위니 비아니마 유엔에이즈계획(UNAIDS) 사무국장도 기자회견에서 “아프리카 국가들은 지금 줄의 맨 뒤에 서 있을 형편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런 우려 때문인지 백신 개발에 도전하는 제약회사들은 코로나19로 고통받는 저소득 국가로부터는 수익을 걷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아스트라제네카는 인도 혈청연구소(SIIPL)와 계약을 맺고 저소득 국가나 개발도상국을 위해 4억회분의 백신을 2020년 말까지 준비하기로 했다. 존슨앤드존슨은 가난한 나라에 백신을 판매하는 일로 이득을 얻지 않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하지만 ‘백신’이라는 단어 하나로 회사의 가치가 수십억달러나 상승하는 일을 이미 목격한 상황에서 제약회사들이 그 약속을 얼마나 지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10년 가까이 단 하나의 제품도 제대로 출시하지 않은 모더나가 백신 개발을 언급하자마자 시가총액 300억달러 규모의 기업이 된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미 더 많은 백신을 비축하려는 각국 정부와 다양한 사전 거래를 성사한 제약회사들이 많다.

팬데믹 끝내려면 저소득 국가도 백신 맞아야

가장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겠다는 대의명분을 따른다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백신에 관한 기술적 정보를 공유하면 된다. 생산기지를 갖춘 모든 국가에서 백신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좀 더 이른 시간 안에 팬데믹을 진정시킬 수 있다. WHO는 지난 5월 중순 열린 총회에서 코로나19 백신이 개발되면 인류의 공공재처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여기에는 모든 국가가 백신과 의약품에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가 포함됐고 이런 목적을 위해서라면 국제 특허권이 제한될 수 있다고 명시했다.

만약 필요하다면 각국 정부가 지적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한 규칙을 무시하고 백신을 복제하는 것도 허용했다. EU가 중심이 돼 내세운 ‘자발적 특허 공유(pool)’ 방식이 적용된 건데 정부가 책정한 저렴한 가격으로 빠르게 백신을 보급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주요 제약사를 거느린 미국이 이 부분에 반대하면서 WHO의 국제적 결속은 흐트러진 채 끝났다.

걱정이 많다 보니 가난한 나라가 맨 끝으로 밀리게 하지 않겠다는 선의의 다짐은 지금도 이뤄진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지난 6월 17일 “팬데믹과의 전쟁에서 이기심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코로나19 초기 EU 회원국들 사이에 벌어졌던 일들은 꽤 이기적이었다. 중국에서 이탈리아로 향하던 마스크가 체코에서 압수되자 이탈리아와 체코 사이에서는 외교 갈등이 빚어질 뻔했다. 프랑스는 자국에 본사를 둔 스웨덴 업체가 이탈리아와 스페인에 판매한 마스크 400만장을 압수했다가 스웨덴 정부의 항의를 받는 등 진통을 겪어야 했다. 팬데믹 초기 벌어진 의약품과 마스크, 인공호흡기 등을 둘러싼 쟁탈전은 전통적 동맹 관계까지 흔들었다. 감염병 억제와 백신 개발을 위한 국제 비영리단체인 전염병대비혁신연합(CEPI)의 제인 할튼 회장은 “효과적인 백신이 나오는 즉시 많은 나라에서 자국민들이 먼저 맞아야 한다는 정치적 압력이 증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백신에 관해서 각국이 2009년과 다르게 행동할 거라 믿을 만한 이유는 전혀 없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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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권 국제·IT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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