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0일(현지시각)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선 유세행사가 열린 오클라호마주 털사의 BOK센터에 주로 백인으로 구성된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이 모여 환호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6월 20일(현지시각)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선 유세행사가 열린 오클라호마주 털사의 BOK센터에 주로 백인으로 구성된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이 모여 환호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1973년 10월 16일 뉴욕타임스 1면 하단에 실린 기사에는 뉴욕 브루클린, 퀸스, 스테이튼 아일랜드 등지에 1만7000여채의 아파트를 가진 회사의 CEO가 미 법무부에 고소당한 내용이 실렸다. 법무부는 브루클린 연방 법원에 이 회사가 소유한 39개 건물이 공정주택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아파트를 매수하려는 흑인에게 살 수 없다고 거짓으로 안내하거나 흑인 세입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일들이 문제가 됐다. 인종을 가려가며 임대사업을 벌인 혐의로 소송에 걸린 사람이 당시 27세 청년 사업가로 활동 중이던 트럼프 매니지먼트사의 대표인 도널드 트럼프였다.

젊은 트럼프는 뉴욕타임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부당하다고 말했다. “법무부는 정말 터무니없어요. 우리는 결코 차별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결코 차별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그러면서 오히려 법무부가 복지 혜택을 받는 사람들에게 임대하라고 강요했다며 공격했다. 인종차별을 극구 부인하던 트럼프 매니지먼트사는 1975년 법무부와 합의를 맺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2년간 매주 모든 아파트의 공실 목록을 관계기관에 제출한다.’ 이랬던 이유는 입주자 중 흑인 비율이 10% 미만인 곳에 뉴욕시가 직접 적격 임대 지원자를 추천하기 위해서였다. 합의를 맺으면서 약속한 게 있었는데 법무부는 트럼프 매니지먼트사의 과거 인종차별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기로 했다. “이번 합의가 유죄 인정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란 게 트럼프의 공식 입장이었다.

인종차별 전략적 활용

50년 가까이 지난 과거 기사는 트럼프 대통령이 인종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해하기 위한 참고자료가 된다. 그는 조지 플로이드 사망으로 미국이 시끄러운 이때도 인종을 둘러싼 논쟁을 거둬들이지 않는다. 지난 6월 28일 백인 남성이 주먹을 흔들며 “화이트 파워(백인의 힘)”라고 외치는 동영상을 트위터에 공유해 논란이 일자 3시간 만에 이를 삭제했다. 그리곤 하루 뒤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고급 주택가에서 총을 겨누고 있는 백인 부부가 등장하는 뉴스 영상을 리트윗해 문제를 일으켰다. 총을 겨눈 대상이 흑인 시위대였다.

미국의 인종차별은 미국의 이미지를 손상해왔던 주요 이슈다. 하지만 전임자들과 달리 현직 대통령이 이런 악영향을 무시하거나 오히려 도발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일이다. 임기 내내 인종차별의 신호를 내보내는 대통령도 그간 보지 못했다. 일부는 트럼프가 살아온 궤적이라는, 개인적 차원에서 원인을 찾는다. 신시아 슈나이더 조지타운대 교수는 “트럼프는 인종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는 게 미국적 행위라는 점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백인 우월주의자들 중에도 좋은 사람들이 있다”며 그들을 격려하는 건 트럼프 대통령에게 평범한 일이다. 워싱턴포스트가 전한 사례 중에는 비공개회의에서 “왜 이런 거지 같은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미국으로 오는 거냐”며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오려는 이민자들을 험담하는 트럼프의 모습이 등장했다. 그러면서 “노르웨이 등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미국으로 데려와야 한다”며 해법을 제안하기도 했다. 백인 중심의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은 환영하면서도 흑인이 많은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은 싫어하는 트럼프의 편견이 작동했다는 해석이 뒤따랐다.

트럼프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 전략적으로도 인종차별을 활용해왔다. 트럼프 대통령의 언행은 목적이 분명한데 폴 프라이머 프린스턴대 교수는 이걸 ‘정체성 정치’라고 정의한다. 그는 “트럼프는 불만을 느끼는 백인 유권자 집단과 놀고 있다. 그가 목표로 삼고 활용하려는 정체성 집단이 그들이다”고 말한다. 프라이머 교수에 따르면 트럼프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는 백인 지지자들의 인종적 원망을 충족하기 위해 이뤄진다. 소수집단에 대한 탄압도 필요하다면 멈출 수 없다. 백인의 유산이 사라지는 걸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야만 한다.

때로는 자신의 의도를 교묘히 숨겨 전달할 때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난 절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말해왔다. 오히려 “당신이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인종차별이 적은 사람이 나”라고 반복해 강조한다. 전혀 인종차별적이지 않다는 트럼프 대통령이 택한 방식은 지지층만 알아듣게끔 메시지를 보내는 거다. ‘도그휘슬 폴리틱스’의 저자인 이안 해니 로페즈 UC버클리 법대 교수는 “인종 이야기로 쉽게 흥분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자극하는 것이 인종 문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도 되도록 트럼프 측에서는 고안해 말한다”고 지적한다. ‘도그휘슬’이란 개 호루라기인데 초음파 신호를 발산해 개는 반응해도 사람은 들을 수 없다. ‘도그휘슬 폴리틱스’란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그들만 알아들을 수 있게끔 메시지를 전달하는 커뮤니케이션 방법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6월 10일(현지시각) 워싱턴 백악관에서 흑인 지도자들과 깜짝 면담을 가졌다. ⓒphoto 뉴시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6월 10일(현지시각) 워싱턴 백악관에서 흑인 지도자들과 깜짝 면담을 가졌다. ⓒphoto 뉴시스

가난한 백인들의 반란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됐을 때부터 그가 사용한 방법이 있다. 2016년 7월 전당대회 단상에 선 당시 트럼프 대선후보는 범죄율이 낮았던 시기인데도 범죄에 대한 두려움을 언급하며 자신을 법과 질서의 수호자로 자처했다. 이런 정치적 수사는 범죄와 폭력을 퇴치하기 위한 결의처럼 보이지만 특정 인종을 언급하지 않았을 뿐 백인 지지층을 향해 내뱉는 인종적 호소로 들렸다. 범죄와 복지는 도그휘슬로 종종 활용된다. 범죄를 언급함으로써 흑인들이 미국 도시에서 혼란과 폭력을 일으키기 때문에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며 백인 유권자들을 귀 기울이게 한다. 복지제도의 악용을 호소하며 흑인들이 복지제도를 활용해 납세자들의 돈을 낭비한다고 암암리에 자극할 수도 있다. 평범한 얘기 속에 감춰져 있을 뿐, 근본적으로는 인종적 분노를 바탕으로 삼는 트럼프의 전략이다.

조지 플로이드 사망 이후 인종 문제는 코로나19와 함께 11월 대선을 앞두고 선명한 쟁점이 됐다. 미 전역이 갈등으로 상처 입는데도 트럼프 대통령은 봉합보단 불쏘시개 노릇을 맡았다. 사회적 이슈를 두고 대통령이 내놓는 메시지는 정치적 계산을 끝낸 뒤 나온다. 인종 갈등이 극한으로 치닫는 이때 전략적으로 인종 갈등을 이용한다고 보는 이유다. 그만큼 판세가 현직 대통령에게 비관적이다. 새롭진 않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 자신이 이겼던 방법이 떠오를 만한 상황이다. 트럼프가 최근 올린 트윗은 이랬다. “침묵하는 다수는 건강히 잘 있다. 우리는 선거에서 압승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말하는 침묵하는 다수는 당연히 백인이다. 퓨리서치센터가 6월 16~22일 실시한 전국 여론조사에서 유일하게 그가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에게 이긴 인종이 백인이었다. 53%의 지지를 얻어 45%를 얻은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보다 앞섰다. 흑인의 지지세는 무시할 정도로 미미했다. 바이든 후보는 89%의 흑인 지지를 확보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고작 7%를 얻었을 뿐이다. 2016년 대다수의 사람들이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승리를 예측했을 때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침묵했던 백인을 다시 결집하는 게 그가 세운 목표다.

트럼프 정부가 들어선 뒤 트럼프 지지자들을 해석하려는 시도가 활발하게 벌어졌다. 2016년 6월 퓨리서치센터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공화당 내 트럼프 지지자들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로 꼽힌 건 ‘미국의 가치를 위협하는 이주민의 증가’였다. 상위 3개 선택지 중 나머지 2개도 ‘무슬림 범죄 증가’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유색인종의 문제’가 꼽혔다. 경제 문제는 선택 기준으로서 영향력이 미미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원인을 찾으며 ‘가난한 백인들의 반란’이라는 분석이 언론을 통해 소개됐지만 캐시 J. 코헨 시카고대 교수팀은 약간 다른 견해를 내놨다. “트럼프를 지지한 백인 유권자들이 그를 지지하지 않은 백인 유권자들보다 경제적으로 불안한 상황에 처하지 않았다”는 게 보고서의 핵심이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백인 지지층은 당시 86%가 직업을 갖고 있었고 소득 역시 적지 않았는데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은 백인 유권자와 엇비슷한 경제 수준을 누리고 있었다. 오히려 이들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표를 던진 이유로 꼽은 건 ‘백인 취약성’이었다. 백인들이 다른 인종과 비교해 우위를 빼앗기고 있다는 인식을 뜻하는데 이 백인 취약성을 가장 자극하는 요소가 인종적 분노였다.

로렌 콜링우드 UC리버사이드 부교수가 내놓은 분석도 비슷했다. 2016년 선거를 앞두고 샘플 조사를 해보니 미국 백인의 58%가 인종적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클린턴 후보를 지지하는 백인 중 인종적 분노자는 40% 정도로 평균 아래지만 트럼프 지지자는 약 81%가 인종적 분노를 표현하고 있었다. 트럼프를 지지한 백인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인종적 배타성을 갖고 있다는 해석을 할 수 있다.

61%가 반대하는 트럼프의 인종 정책

트럼프 지지자들이 인종적 분노에 격하게 반응했다는 연구는 또 있다. 2017년 미국 콜게이트대와 미네소타대 합동연구팀은 700여명의 백인을 대상으로 정부 모기지 지원 프로그램에 대한 지지도를 조사했다. “최근 주택담보대출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정부의 제안들이 있다”며 프로그램의 세부사항이 담긴 소책자를 보여줬다. 다만 표지를 두 가지 버전으로 만들었는데 같은 집 앞에서 하나는 백인이 서 있었고. 다른 하나는 흑인이 서 있었다. 결과가 흥미로웠다.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백인들은 흑인의 이미지가 나온 책자를 보자 반대 여론이 높았고 수혜자를 탓하는 경향이 강했다. 반대로 이들이 백인이 등장한 책자를 받아들었을 때는 정부의 지원 프로그램에 더 많은 지지를 보냈다. 반면 클린턴 지지자들은 두 가지 책자에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연구팀은 “트럼프 지지자들은 근본적으로 인종적 단서에 다른 방식으로 대응한다”고 결론 내렸다.

스스로는 믿고 싶지 않겠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바이든 후보보다 인기가 떨어진다. 게다가 최근 뉴욕타임스-시에나 대학의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61%는 트럼프 대통령의 인종 갈등 대처 방식에 반대를 표명했다. 그런데도 그는 4년 전 자신을 정치적 성공으로 이끌었던 분열적 주제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또 한 번 전장(戰場)을 만들기로 했다. ‘인종’이라는 키워드에 예민한 자신의 팬들을 자극해 정치적 생존을 모색하는 전략을 택했는데 앞선 연구들을 보면 나름 과학적인 접근일 수 있겠다. 다만 미국 사회가 인종 문제에서만큼은 분수령을 맞고 있는 순간이란 게 4년 전과 다를 뿐이다.

김회권 국제·IT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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