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전철역의 출근 인파. ⓒphoto 연합
도쿄 전철역의 출근 인파. ⓒphoto 연합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코로나19 사태가 변화를 싫어하는 보수적인 일본 사회를 변화시키는 걸까. 최근 일본 사회에는 지난 4월 코로나19 긴급사태 발령으로 시작된 재택근무를 ‘뉴노멀(새로운 표준)’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일본 경제계는 그동안 디지털화가 진행된 다른 선진국과는 달리 ‘같은 장소에 모여 함께 일을 하는 방식’을 선호해왔다. 하지만 코로나19 집단감염을 막기 위해 굳이 출근하지 않으면서 생산성을 올리는 방안을 채택하는 기업들이 속속 늘어나고 있다.

일본에서 재택근무의 선두주자는 전자업체 히타치(日立)제작소다. 히타치는 지난 5월 말 긴급사태 해제 후에도 가능하면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근무하는 것을 당분간 표준으로 삼기로 했다. 재택근무가 가능한 직원 3만여명은 앞으로 집에서 일하다가 회사 출근이 필요하면 1주일에 2~3일만 출근하면 된다.

이 회사는 올 초 코로나가 확산하자 초·중·고 자녀를 둔 직원 1만명을 재택근무로 전환했다. 그러다가 지난 4월 긴급사태 발령을 계기로 사무직 근로자의 70%가 집에서 머물며 근무하도록 했다. 전사적(全社的)으로 재택근무를 실시한 결과, 직원들의 반응이 괜찮고 생산성이 저하되지 않았다는 판단하에 재택근무를 표준시스템으로 채택했다.

이를 위해 히타치제작소는 업무 시스템을 전면 재편, 근무시간을 업무성과의 평가기준에서 사실상 배제할 예정이다. “업무성과만 달성되면 근무시간에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회사가 관계하지 않는다”는 ‘히타치 독트린’이 만들어진 것이다.

히타치의 재택근무 실험

일본의 정보통신기업 후지쓰(富士通·FUJITSU)도 재택근무를 원칙으로 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지난 7월 6일 발표했다. 재택근무를 원칙으로 하고 일할 장소와 시간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후지쓰는 앞으로 공장을 제외한 일반 사원의 출근율을 ‘25% 이하’로 만드는 것이 목표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국내 약 8만명의 사원 중 80%가 재택근무를 하고 있는데 앞으로도 이를 표준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출근을 의무화하는 ‘코어 타임’을 없애고 자신이 좋아하는 시간대에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유연근무제를 전 사원으로 확대한다.

후지쓰의 새로운 시스템에서는 소규모의 거점을 대거 늘리는 한편 본사 사무실 면적은 반으로 줄인다. 재택근무로 인한 커뮤니케이션의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사내외 회의나 고객을 접대하는 ‘허브 오피스’와 화상회의 등의 통신설비를 갖춘 소규모의 ‘새틀라이트(위성) 오피스’를 늘릴 계획이다. 이 회사의 히라마쓰 히로키 총무인사 본부장은 새로운 시스템의 목표가 “생산성을 올려 보다 쾌적하게 일하기 위한 선택사항을 증가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히타치제작소, 후지쓰 외에도 일본의 대형 제과업체 ‘갈비(カルビー)’와 전자업체 도시바도 재택근무를 새로운 근무방식으로 채택했다.

보수적인 분위기가 강한 일본의 언론사에서도 재택근무는 새로운 근무 시스템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아사히·마이니치신문사는 모든 논설위원들이 매일 같은 시각에 출근하지 않는다. 화상회의를 통해서 사설 아이템을 결정하고, 그 외의 시간은 회사 밖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다. 이들 신문사의 편집국에서도 일부 데스크와 기자들은 집에서 근무하며 기사를 송고하는 것이 일반화하고 있다.

일본은 올 초까지만 해도 재택근무가 확산하지 않고 있었다. IT 기업 구글이 지난 4월 코로나19 사태와 재택근무 연관성을 조사해 발표했는데, 미국에선 직장 출근이 38% 줄어든 반면 일본은 9% 감소하는 데 그쳤다. 일본 후생노동성이 라인(LINE)과 함께 8300만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텔레워크(재택근무)하고 있다”는 비율은 5.6%에 불과했다.

그랬던 일본 사회에서 재택근무를 채택하는 기업들이 늘어나는 가장 큰 이유는 코로나19 사태의 장기화 때문이다. 일본 기업들은 언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다시 확산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직원들이 회사에 모여 근무하다가 집단감염되는 것을 경계한다. 이는 일본 사회가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하는 ‘책임’과 관계가 있다. 집단감염이 발생할 경우 회사가 도의적 책임은 물론 법적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다.

일본 사회가 대중교통을 이용한 출퇴근 시간이 선진국에서는 가장 긴 나라 중의 하나인 것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본에서는 샐러리맨들이 출퇴근에 3시간가량 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회사 측은 종업원들이 전철을 타고 출퇴근하다가 무증상 환자들에 의해 코로나19에 감염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기업들의 체질을 바꿔보자는 분위기도 재택근무의 확산에 기여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주(週) 4일’ 근무제가 논의되는 상황에서 주어진 업무 목표를 달성하면 회사에 굳이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시스템을 이번 기회에 구축하는 것이 낫지 않냐는 것이다.

후지쓰, 재택근무 비용도 지급

히타치제작소, 후지쓰 등은 재택근무를 정착시키기 위해 결재 서류는 간소화하고 줌(ZOOM)을 이용한 회의는 늘려가기로 했다. 재택근무를 하는 직원들에 대한 회사 지원도 신설했다. 히타치제작소는 직원들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면 전기료 등이 증가하기 때문에 1인당 월 3000엔을 더 지원하기로 했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이 보도했다. 후지쓰도 재택근무 비용으로 전 직원에게 월 5000엔을 정액 지급한다.

기업들은 재택근무를 실시함으로써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을 막으면서 사무실 유지 비용과 각종 수당을 줄일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내년 도쿄올림픽 개최가 불투명해지면서 언제 ‘올림픽 버블’이 터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굳이 도심에 대형 건물을 갖고 있지 않아도 상관없게 됐다.

일본 업계는 그동안 직원들의 출퇴근 비용을 전액 지원해왔다. 도쿄 외곽에 사는 직원들에게 매월 5만엔가량의 전철 비용을 지급하는 것도 드물지 않았는데 이번 결정으로 이를 대폭 줄일 수 있게 됐다.

일본 정부는 재택근무의 가장 큰 벽(壁)인 이른바 ‘도장 문화’를 개선, 재택근무 활성화를 적극 지원한다는 방침이다. 명분보다 실리를 앞세우는 일본 문화를 고려할 때, 어쩌면 한국보다 일본에서 재택근무가 더 확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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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원 조선일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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