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 사무총장 후보(등록순)
WTO 사무총장 후보(등록순)

앞뒤가 뒤바뀐 속옷을 입었을 때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뭔가 불편하고 어정쩡하다. 지난 7월 28일 문재인 대통령과 저신다 아던(Jacinda Ardern) 뉴질랜드 총리 간의 전화통화에 대한 첫인상이다. 청와대에 따르면 30분간 이뤄진 전화통화에서 한국이 제작해 인도한 군수지원함과 코로나19 백신 관련 양국 간 협조 문제가 중점적으로 다뤄졌다고 한다. 발표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봤지만, 의례적인 외교적 수사로 채워져 있다. 전화통화의 핵심은 마지막에 나왔다. 아던 총리는 한국 외교관 성추행 문제를 거론했다. 한국에도 자세히 보도됐지만, 성추행 의혹 외교관을 뉴질랜드에 넘기라는 것이 핵심이다.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지 말고 빨리 뉴질랜드로 보내 사실 여부를 따지자는 것이 1980년생 여성 총리의 요청이다.

문 대통령은 어떤 문제에 무게중심을 뒀을까? 뉴질랜드는 세계가 경탄한 코로나19 대응 모범국이다. K방역, K마스크 자랑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차기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 선거가 통화의 핵심 요건이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유일하게 후보로 나선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에 대한 지지를 요청했다. 청와대에 따르면 “여성이며 통상전문가로서 WTO 개혁과 다자무역체제 강화를 이끌 수 있는 적임자”라고 뉴질랜드 측에 유 본부장을 소개하며 “뉴질랜드의 지지를 기대한다”고 전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아던 총리는 “유명희 본부장은 유력한 후보라고 알고 있다”면서 “매우 훌륭한 자질을 갖췄다고 들어 관심을 갖고 주시하고 있다”는 식으로 대답했다고 한다. 냉정하게 보면 지지로 이어질 수 있는 그 어떤 뉘앙스의 발언도 회피한 셈이다. 감정이나 본심을 뺀, 지극히 의례적인 대응이다.

필자가 아는 한, 문 대통령이 외국 정상에게 WTO 사무총장 선거 문제를 꺼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뉴질랜드가 유일한 나라인 셈이다. 왜 작은 섬나라에 한국 후보 지지를 요청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WTO 가맹국 164개국 가운데 ‘아주 특별한 위치’에 있는 나라가 뉴질랜드이기 때문이다. WTO는 1국 1표 민주주의에 기초한 국제기구다. 사무총장이라 해도 전권을 갖고 조직을 좌지우지 흔들 수 없다. WTO를 움직이는 진짜 실력자는 이른바 ‘트로이카(Troika)’로 불리는 3개 위원회 대표다. 총회(General Council), 분쟁조정위원회(Dispute Settlement Body), 무역정책조사위원회(Trade Policy Review Body)가 중심이다. 각 위원회의 대표는 대사(Ambassador)라 불린다. 현재 WTO 총회 대사는 뉴질랜드인이 맡고 있다. 분쟁조정위원회는 온두라스, 무역정책조사위원회는 아이슬란드가 각각 맡고 있다.

WTO 총회 대사가 아시아권에 인접한 오세아니아권에 속하는 뉴질랜드인이란 점이 문 대통령이 전화로 지지를 요청한 가장 큰 배경으로 보인다. 한국 대통령으로서 자국민 후보자가 WTO 사무총장에 오르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 총회 대사는 WTO 164개 회원국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 위치다. 경우에 따라서는 WTO 전체의 흐름을 잡아나갈 수도 있다. 우호적 관계라면, 당선을 위한 조언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번지수를 잘못 잡았다. 문 대통령과의 전화통화 이후 나온 뉴질랜드 현지 뉴스에는 WTO 관련 소식이 하나도 없다. 얼굴 사진에다 실명이 실린 성추행 한국 외교관 관련 기사가 전부였다. ‘한국이 면책특권을 이용해 외교관의 뉴질랜드 송환을 거부했다’는 것이 주된 뉴스 내용이었다.

코로나19 덕분이지만 비디오 미팅용 소프트웨어 줌(Zoom)을 요즘 적극 활용하고 있다. 일은 물론 주변과의 인간관계도 줌으로 해결하고 있다. 한국과 달리 미국이나 일본은 이미 ‘줌 생활’을 보편적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WTO 사무총장 한국 후보자에 관한 얘기는 지난 7월 말 열린 워싱턴 정보교환 줌 미팅 중 우연히 접했다. 미국과 아시아 각국의 관계에 주목하는 미국인과 일본인 10여명이 줌 미팅의 주된 참가자였다. “한국은 대단한 용기를 갖고 WTO 사무총장 선거에 임하는 듯하다. 이번 선거는 아시아 차례가 아닌데도 나서는 걸 보면, 그동안 지지 국가 확보에 총력을 기울인 듯하다. 어느 지역을 지지기반으로 하는가?” 워싱턴 보수계 싱크탱크에서 아시아 연구원으로 일하는 40대 남성 미국인이 필자에게 던진 질문이다. 입후보자가 여성이란 것 외에는 전혀 무관심했기에 제대로 된 답을 할 수가 없었다.

‘트로이카 위원회’ 이끄는 실력자들

회의를 마친 뒤 WTO 선거 관련 한국 측 동향이 어떤지 살펴봤다. “아시아 차례가 아니다”라는 미국인의 말이 떠올랐다. 무슨 의미인지 궁금했다. 이러저리 정보를 수합해 보자 금방 답이 나왔다. WTO 역대 사무총장 리스트가 결론이다. WTO 역사를 보면 1993년 이래 모두 6명의 사무총장이 등장했다. 국가별로 보면 아이슬란드(1993~1995), 이탈리아(1995~1999), 뉴질랜드(1999~2002), 태국(2002~2005), 프랑스(2005~2013), 브라질(2013~2020) 출신 사무총장이 거쳐갔다. 4년 임기지만 1회에 한해 연임할 수 있고 중간에 그만둘 수도 있다. 미국인이 말한 “아시아 차례가 아니다”란 말은 6명 사무총장의 출신지를 보면 명확해진다. 아시아권의 태국 출신자가 최근까지 사무총장으로 일했기 때문이다. 당연한 상식이지만, 개인적 능력이 국제기구 수장의 전제조건은 아니다. 후보자로 나설 정도의 인물이라면 글로벌 차원의 경쟁력은 기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어느 나라 출신이냐가 중요하다. 좀 더 확장하면 6대륙 어디에 속한 나라인가가 국제기구 수장에 오르기 위한 출발점이다.

‘아시아 차례가 아니다’

유엔도 그렇지만, 지역 간 배분이 명문화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묵시적인 동의하에 지역안배(Regional Balance)가 이뤄진다. 국제기구에 지분율이 높은 강대국조차도 1국 1표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조직 내 밥그릇을 독식할 수 없다. 6명의 WTO 역대 사무총장을 보면 유럽·남미·오세아니아·아시아 대륙에서 왔다. 2020년 선거에 주목할 경우 아프리카·북미 두 지역이 영순위다. WTO 사무총장 선거의 유력 후보가 아프리카나 북미 출신자가 될 것이란 전망이 가능해진다. 일단 21세기 이후 사무총장을 배출한 유럽·남미·오세아니아·아시아 출신자는 사정권에서 멀어진다고 판단할 수 있다.

미국인의 질문은 그 같은 ‘객관적 상황’ 속에서도 한국인이 입후보자로 나선 데 대한 ‘신기함’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차기 나아가 차차기 사무총장을 노리며 국제사회에 미리 얼굴을 내밀 수도 있다. 올림픽 개최국에서 보듯 차기가 아니라 차차기나 그 이후를 노리며 미리 준비하는 식이다. 그러나 한국이 그 같은 ‘전략적 관점’에서 미리 움직일 것이란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뉴질랜드 총리와의 전화통화에서 보듯, 성추행 문제가 나올 것이란 정보 하나 없이 WTO 문제를 꺼낸 것이 한국 외교의 실력이자 현실이다.

유명희 본부장의 WTO 사무총장 입후보는 개인 차원이 아닌 한국 외교의 역량을 시험할 수 있는 본보기다. 그러나 뉴질랜드 총리와의 전화나 지역 안배 문제에서 보듯, 이미 출발부터 삐걱대고 있다. 세상사 모든 것이 그러하듯 예외가 생길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강대국의 전면적인 지원을 배경으로 한 선거나, 조직 전체가 어려워지면서 위기관리 지도자로 부상하면서 ‘기존의 룰’이 무시될 수도 있다. 문재인 정부가 시행하는 ‘아니면 말고’ 식의 각종 정책에서 보듯, 극단적인 예외에 매달리면서 막판 뒤집기로 나가는 ‘기적 외교’가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그 같은 천우신조(天佑神助)에서 한참 벗어난 나라가 한국이다. 미국 나아가 중국이 한국 후보자를 지지하리라 보긴 어렵다.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아예 관심을 가질 만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스위스 제네바의 WTO 본부. ⓒphoto 뉴시스
스위스 제네바의 WTO 본부. ⓒphoto 뉴시스

8명의 후보자와 일본 변수

2020년 WTO 사무총장 경선 후보자는 전부 8명이다. 후보자들을 등록 순서별로 보면 멕시코의 헤수스 세아데 WTO 초대 사무차장, 나이지리아의 응고지 오콘조이 웰라 전 재무장관, 이집트의 하미드 맘두 전 WTO 서비스국 국장, 몰도바의 투도르 울리아노브스키 전 주제네바 대사, 한국의 유명희 통상교섭본부 본부장, 케냐의 아미나 모하메드 전 WTO 의장,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마지아드 알투와이즈리 전 경제기획부 장관, 영국의 리엄 폭스 전 국제통상장관 등이다. 한국에도 보도됐지만 7월 중순 총회 이사회를 통해 후보자 8명의 출사표가 던져졌다. 한국의 유명희 후보자도 WTO 기자회견을 통해 이른바 3R(Relevant·Resilient·Responsive)을 리더십의 기본으로 삼겠다고 밝혔다. ‘적절, 융통, 대응’이란 의미다. 기자회견 내용을 자세히 살펴봤지만, 개혁이나 혁신이란 단어가 드물다. “국제통상 전문가다. 3R을 기반으로 열심히 일하겠다”라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에 대한 부분이다. 원칙적으로 WTO 사무총장은 164개 회원국 전원 만장일치 형식으로 결정된다. 사사건건 대립하는 일본이 한국에 반대한다는 것은 WTO 안에서의 상식이다. 친한, 친일 여부를 떠나 한국 후보자를 접하는 순간 “일본이 동의하느냐?”라 묻는 것이 WTO 평균 정서다. 유명희 후보자도 그 같은 상황을 이해한 듯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요약하자면 “한·일 모두 자유로운 국제무역을 지지하는 파트너다. 비전을 갖고 WTO를 위해 열심히 일할 후보자 ‘개인’의 자신감(Competency)과 능력(Capability)이 중요하다”로 압축된다. 국가가 아니라 개인 유명희를 지지해달라는 말이다. 일본인 입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일지 의문이지만, WTO 사무총장을 ‘개인기’에 의해 선출하자는 얘기는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들린다. 유명희 후보자는 한국인에게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청와대 홍보수석비서실에서 외신대변인으로 일한 경력과 더불어, 통상 문제에 항상 등장하는 여성 관료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인 것은 분명하지만 WTO에서 보는 관점은 다르다. 앞서 말했듯이, 개인 유명희가 아니라 ‘어느 나라 출신 입후보자인가’가 관건이다. 개인기에 호소한 유명희 후보자의 출사표는 발표 1주일 만인 7월 23일 일본 교도통신을 통해 전 세계에 전달됐다. ‘일본은 아프리카 지역인 나이지리아, 케냐 가운데 한 후보를 지지할 것이다’가 응답이었다.

국제기구가 갖는 권위에 걸맞게 WTO 선거 과정은 투명하다. 기자회견을 통한 출사표에 이어 후보자 각자가 선거운동에 들어간다. 아예 운동기간을 9월 7일까지로 못 박고 있다. 기존의 상황을 보면, 후보자들이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현지 WTO 관계자와 만나 지지를 호소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회의만이 아니라 파티도 병행한다. 국제사회에서 공짜는 없다. 화려한 외교수식어 뒤에는 냉정한 ‘기브 앤 테이크(Give & Take)’만이 존재한다. ‘내가 너를 지지할 경우 너는 나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라는 것이 선거운동 기간 중 오간다. 개인기가 아니라 국익을 전제로 한 경쟁이다.

WTO는 9월 7일 이후 8명 후보자 가운데 3명을 1차로 떨어트린다. 이른바 트로이카 대사들이 164개 회원국의 의견을 종합해 다섯 후보로 압축해서 발표한다. 1차 관문인 셈이다. 이후 트로이카 대사들은 제2차 선별에 나선다. 미국·유럽·러시아·중국과 같은 강대국의 의견을 종합해 다섯 후보 가운데 다시 두 후보로 압축한다. 두 후보자는 강대국은 물론 회원국 관계자를 만나 지지를 호소한다. 최종 결론은 두 후보 간의 합의에 의해 최종 한 명으로 낙찰된다. 최종 후보에서 탈락한 2등 후보자가 WTO내 지분을 확보하는 것은 당연하다. 부사무총장이나 위원회 자리를 몇 개 약속받는 식이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164개 회원국 만장일치 형식으로 차기 사무총장이 결정된다. WTO 총회는 2020년 사무총장 선거 결과를 11월 7일까지 낼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11월 3일 치러질 미국 대통령 선거를 고려한 일정이다. WTO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힐’이 예상한 1차 관문 통과자

얼마 전 줌을 통해 일본인 기자와 얘기를 나눴지만, 한국 후보자에 대한 일본의 분위기는 ‘찬성도 반대도 아닌 중립이다’라고 분석한다. 163개국이 찬성할 경우 일본만이 나서서 마지막까지 반대할 힘도 의지도 없다는 것이다. 거꾸로 한국 후보자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나라는 중국일 것이라는 말도 들을 수 있었다. WTO에는 사무총장 아래 4명의 부사무총장을 두고 있다. 중국은 그중 하나다. 한국이 사무총장에 올라설 경우 중국인 부사무총장의 가치나 역할이 축소될 수 있다. 일본의 이간질 정도라 볼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일본 기자의 분석은 유명희 후보자의 WTO 기자회견 도중 실제 일어났다. “부사무총장 자리를 가진, 중국의 반대를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유명희 후보자에게 던져진 워싱턴발 질문이다. “중국이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는 자국의 권리일 뿐, 기본적으로 노 코멘트”가 유 본부장의 당시 답변이었다.

지난 7월 28일 최고 권위의 워싱턴 인사이더 정보지 ‘힐(TheHill.com)’이 1차 관문을 통과할 것으로 전망되는 사무총장 후보자를 열거했다. 멕시코·케냐·나이지리아·몰도바·이집트 출신 후보자들이었다. 한국은 1차 관문 통과 예상 5명 후보자 리스트에 없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 이어 국제기구에서의 한국인 탄생은 국가적 자랑이자 염원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처음부터 꼬이고 있다. 막무가내식 국내 정치 하듯 국제정치를 대한 결과일 수 있다. 국가전략은커녕 ‘소 뒷걸음 치다 만나는 기적’만이 최대 무기로 보인다. 줌에서 만난 미국인은 “WTO에서 한·일 간 문제를 부각하기 위한 가미카제(神風) 공격용 후보가 아니냐”고 되묻는다. 떨어질 경우 일본에 책임을 뒤집어씌울 것이 눈에 선하다는 말도 전한다. 9월 7일 1차 관문까지 한 달 가까이 남았다. 응원은 하지만 객관적 환경이 너무도 척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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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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