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루스 민스크에서 한 시위 남성이 시위 진압 경찰을 향해 소리치고 있다. ⓒphoto 뉴시스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한 시위 남성이 시위 진압 경찰을 향해 소리치고 있다. ⓒphoto 뉴시스

소련에서 독립한 벨라루스에서 ‘유럽의 마지막 독재자’로 불리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66)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지난 8월 9일 대선을 계기로 26년 만에 처음 발생하였다. 벨라루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당일 루카셴코의 당선을 선언했지만 야당은 부정선거라며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당국은 부정선거에 항의하던 시민 3000여명을 체포하였다. 루카셴코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던 야당 대선후보인 스베틀라나 치하노스카야(37)는 8월 11일 시위대에 자제를 당부하며 리투아니아로 도피하였다. 미국과 유럽국들도 루카셴코 규탄에 동참하고 있다.

벨라루스는 역사적으로 유럽 열강의 러시아 공략 통로가 되었던 나라이다. 벨라루스가 민주화된 이후 친서방 국가가 될 가능성을 우려한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무력개입에 나설 가능성도 대두되고 있다.

백(白)러시아라고도 불렸던 벨라루스는 서쪽에 폴란드, 동쪽에 러시아, 북쪽에는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 남쪽에 우크라이나 등 5개국에 둘러싸인 내륙국가이다. 한반도보다 조금 작은 약 21만㎢에 1000만명이 살고 있다. 20세기 초까지 벨라루스에서는 벨라루스인들과 유대인들이 정치, 경제의 중심을 구성하였다. 소수의 폴란드인과 러시아인도 함께 살았다.

소련 스탈린 독재 시절 벨라루스는 소련의 공화국들 가운데 가장 가혹한 탄압을 받아 약 100만명이 처형당했다. 2차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3년간 지배되는 동안에는 200만명이 사망하는 등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이다.

루카셴코 대통령 26년 철권독재

벨라루스에서는 저명한 유대인이 많이 배출되었다. 화가 마르크 샤갈, 작가 아이작 아시모프 등이 벨라루스 출신이다. 영화 ‘아이언맨’ 시리즈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스칼릿 조핸슨, 해리슨 포드 등이 벨라루스 출신 유대인의 후손이다. 이스라엘 총리를 지낸 시몬 페레스, 이츠하크 샤미르, 메나헴 베긴 등은 벨라루스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소련의 최장기 외무장관(1957~1985)을 역임했던 안드레이 그로미코,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에서 개혁파 부총리를 지낸 아나톨리 추바이스 등도 벨라루스 출신이다.

벨라루스는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독립하였다. 1994년 처음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소련군 출신으로 한 집단농장(콜호즈) 책임자였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가 당선되었다. 루카셴코는 부패청산과 경제부흥을 내세웠지만 당선 이후에는 정반대의 행보를 이어갔다. 경제는 소련 시절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국가통제체제로 운영하여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었다. 2019년 세계은행 조사에 따르면 벨라루스의 1인당 GDP(국내총생산)는 폴란드의 3분의 1, 러시아의 절반 수준인 6663달러이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소련 비밀경찰인 국가보안위원회(KGB)를 그대로 남겨두고 철권독재를 자행하였다. 2015년에 5년 임기의 대통령 당선까지 매번 75% 이상의 득표를 올렸다. 의회 등 각종 선거 결과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통해 자신에게 유리하게 조작하였다. 루카셴코는 독재자라는 비난이 일어날 때마다 “독재자가 동성연애자보다 낫다”며 무시하였다. 2008년에는 인권문제를 제기하는 미국의 외교관들을 추방하여 미국과 유럽 국가들로부터 경제제재를 받아왔다. 지난 10년간 벨라루스의 국민소득은 거의 늘어나지 않았다.

루카셴코는 최근에는 코로나19 때문에 국민들의 원성을 샀다. 그는 지난 3월부터 세계 각국이 사회적 격리 등의 조치를 취하는 것을 두고 “정신병”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코로나19 바이러스 예방법으로 “보드카를 마시고 사우나를 하면 된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였다. 루카셴코는 아이스하키의 열렬한 팬이다. 그는 코로나19 때문에 아이스하키 경기를 못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 “아이스하키 링크에는 바이러스가 없다. 아이스하키 링크 위에 바이러스가 떠다니는 게 보이는가? 내 눈에도 보이지 않는다. 아이스하키 링크는 냉장고이며, 이거야말로 바이러스 치료에 효과적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대통령이 이런 말을 하는 나라에서 사회적 격리나 제대로 된 예방조치가 실현될 리 없다. 의료시설이 미비한 상황에서 코로나19 공포에 시달리던 국민들로부터 커다란 반발을 샀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지킬 생각을 하지 않자 국민들 스스로 마스크를 구하여 쓰고 다니기 시작하였다.

대선을 앞둔 지난 6월부터 수도 민스크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벨라루스에서는 지난 26년 동안 반정부 시위도, 반정부 시위를 조직할 만한 야권 인사나 조직도 없었다. 거리에서 정치와는 무관한 사안으로 몇 사람만 모여도 경찰이 붙잡아가는 나라가 벨라루스였다. 벨라루스의 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인물은 온라인 블로거이자 유튜버인 세르게이 치하노스키(42)였다. 그는 올 3월부터 벨라루스 전국을 돌며 가난과 절망에 시달리는 국민과 대화를 나누고 이를 유튜브에 올려 엄청난 호응을 받았다. 그중 한 나이 지긋한 여성이 “바퀴벌레를 보면 어떻게 해야 하나?”고 자문하고 “얼른 슬리퍼를 찾아 순식간에 때려잡아야만 한다”고 답하는 내용이 가장 유명했다. 이는 독재자 루카셴코를 바퀴벌레에 비유한 것이었다.

치하노스키는 지난 5월 ‘바퀴벌레를 때려잡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자 얼굴에는 마스크를 쓰고 슬리퍼를 손에 든 시민들이 민스크 등 거리에 몰려나와 그를 지지하는 시위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지난 26년간 변변한 시위 한 번 없었던 벨라루스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놀란 루카셴코는 치하노스키를 체포하고 출마자격을 박탈하였다. 치하노스키 지지자들은 그의 부인인 스베틀라나 치하노스카야를 대선 후보로 옹립하였다.

지난 8월 9일(현지시각) 민스크에서 투표를 마친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 ⓒphoto 뉴시스
지난 8월 9일(현지시각) 민스크에서 투표를 마친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 ⓒphoto 뉴시스

루카셴코의 친서방 행보

지난 8월 9일 실시된 선거에서 루카셴코가 80.23%를 득표하여 9.9%를 얻은 치하노스카야를 누르고 당선되었다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발표하였다. 그러나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미국은 선거가 자유롭고 공정하게 실시되지 않은 데 대해 깊이 우려하고 있다”며 비판했다. 유럽 국가들도 대부분 미국과 같은 우려를 표명하였다. 야당 후보 치하노스카야는 루카셴코에게 “평화적인 정권이양을 준비하라”고 요구하였다. 부정선거와 루카셴코 대통령에 반대하는 시위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루카셴코는 폴란드가 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며 “혁명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강경한 태도로 맞서고 있다. 미국은 그러나 루카셴코가 러시아로부터 일정하게 거리를 두기 시작한 터여서 막무가내로 그를 몰아붙이기도 어려운 처지이다.

루카셴코의 인권탄압 때문에 벨라루스는 서방 측의 경제제재를 받아 경제는 피폐해졌다. 대신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75억달러의 차관을 받았다. 그런데 러시아가 2014년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크림반도를 합병하자 루카셴코는 러시아와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다. 그는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지지선언을 해달라는 푸틴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벨라루스 내에 러시아군 주둔을 허용하라는 요구도 거절하였다. 루카셴코는 오히려 정치범들을 석방하는 등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시작하였다. 지난해부터 미국의 존 볼튼 안보보좌관,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등이 방문하였다. 서방의 경제제재도 해제되었다. 올 2월에는 미국이 벨라루스 주재 대사도 임명하였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루카셴코의 친서방 행보를 의심쩍은 눈초리로 바라보게 되었다. 푸틴 입장에서는 벨라루스가 서방 측으로 넘어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이 되는 상황은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크다. 벨라루스는 역사적으로 유럽 열강의 러시아 침공 루트였다. 19세기에 프랑스의 나폴레옹이나 20세기에 나치 독일이 러시아를 침략할 때 통로가 벨라루스이다. 벨라루스 국경에서 모스크바까지의 거리는 700㎞에 불과하다. 과거 소련은 폴란드와 동독을 영향력하에 두고 소련군을 배치하여 나토군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소련 붕괴 이후에는 폴란드는 물론 리투아니아, 라트비아에도 미군이 배치되어 있다.

러시아는 벨라루스에 레이더기지 등을 설치하여 나토군의 활동을 모니터해왔다. 그러나 벨라루스에 나토군이나 미군이 배치되는 상황은 러시아에는 악몽이다. 때문에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차지한 푸틴의 다음 목표는 벨라루스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 많다. 러시아는 2017년 9월 벨라루스 군대도 참가한 가운데 ‘자파드(서쪽)’라는 명칭의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러시아 대군을 신속하게 벨라루스로 이동배치하는 것이 훈련의 주요 내용이었다.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에서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 연임에 항의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려 시위대가 휴대전화를 밝히며 시위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에서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 연임에 항의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려 시위대가 휴대전화를 밝히며 시위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러시아 침공 가능성

지난 7월 푸틴이 종신집권이나 다름없는 개헌안을 국민투표를 통해 통과시켰다. 그런데 당초의 계획은 푸틴이 현재의 임기가 종료되는 2024년까지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국가연합을 형성하고, 이 국가연합의 첫 대통령으로 푸틴이 다시 나서는 내용이었다. 2019년 12월 푸틴과 루카셴코가 만나 회담을 가졌지만 루카셴코가 반대하였다. 루카셴코는 “벨라루스가 현재의 국경을 유지하는 안정된 나라로 남게 되길 희망한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벨라루스의 KGB는 대선 직전인 지난 8월 5일 러시아의 용병회사인 와그너그룹 소속 용병 33명을 테러 모의 혐의로 체포하였다.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 중 28명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에 침투하여 활동한 범인들이라며 범죄인 인도를 요청하였다. 벨라루스 관영통신은 러시아 용병 200여명이 이미 벨라루스 국내로 침투하고 불안을 조성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에도 이러한 용병들을 침투시켜 활동하게 한 적이 있다. 푸틴은 2008년에도 조지아를 침공하여 영토를 확보한 적이 있다. 루카셴코는 즉각 러시아와의 접경지역에 병력을 보강하였다.

독재자 루카셴코가 축출되고 벨라루스가 민주화되면 러시아가 침공할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 러시아군이 벨라루스에 침공하면 미국과 나토 회원국들의 러시아 제재도 더욱 강력해져서 가뜩이나 위축된 러시아 경제는 더욱 어려워진다. 그러나 중국과 대결 중인 미국 입장에서도 벨라루스의 민주화를 놓고 러시아와 대결을 벌이는 것 또한 부담이다. 선거 불복과 루카셴코 축출을 주장하던 야당 후보인 치하노스카야가 8월 11일 리투아니아로 피신한 것은 벨라루스의 현상유지를 바라는 강대국 간의 타협의 산물일 가능성도 있다.

우크라이나 언론들은 대부분 러시아의 벨라루스 침공 및 합병이 필연적이라고 보고 있다. 다만 푸틴이 영토팽창정책을 감행할 경우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러시아의 조기 해체로 귀결될 것으로 전망한다.

우태영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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