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8일(현지시각) 미국 네바다주에서 인종차별 반대 시위대와 트럼프를 지지하는 시위대가 충돌했다. ⓒphoto 뉴시스
지난 8월 8일(현지시각) 미국 네바다주에서 인종차별 반대 시위대와 트럼프를 지지하는 시위대가 충돌했다. ⓒphoto 뉴시스

처음에는 블루스테이트(민주당 우세 지역) 일부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로만 여겼다. 하지만 전국으로 퍼졌고 생명력은 강했다. 조지 플로이드 사망 뒤 일어난 인종차별 저항 시위는 지금 미 전역에서 100일이 지나도 멈출 줄 모른다. 시위가 길어지면서 시위의 목적보다 그 양상에 주목하는 것도 바뀐 포인트다. 시위만 있었던 게 아니라 약탈과 무장 충돌도 일어났고 인명 피해도 생겼다. 특히 공화당과 민주당 대선후보가 모두 방문한 위스콘신주 커노샤는 갈등의 핵심 지역이 됐다.

무장분쟁·테러·시위 등을 조사하는 비영리 다국적 단체 ACLED 자료에 따르면 플로이드 죽음 뒤 미국을 휩쓸었던 시위 중 93%는 평화롭게 끝났다. 5월 26일~8월 25일 사이 벌어진 시위는 총 7750건인데 단지 220여건만이 폭력적으로 변해 경찰과 충돌하거나 재산 피해가 생겼다. 얼마 안 되는 비율이지만 부서진 가게와 뒤집힌 차량, 불타는 거리는 사람들에게 강하게 각인됐다. 애슐리 자디나 듀크대 교수의 지적처럼 “많은 백인은 시위와 인종 문제에 관용 정도가 낮다. 특히 폭력적이거나 재산에 손해를 입힐수록 더욱 그렇다”는 특성도 시위를 불안하게 바라보게 했다.

지난 6월 1일 플로이드의 사망이 격렬한 시위를 불러오자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앞 로즈가든에서 “나는 법과 질서의 대통령”이라고 선언하며 48분간 쇼케이스를 했다. 회견 직전 백악관 북측 라파예트 공원 쪽에서는 최루탄이 터졌다. 그가 회견 뒤 ‘대통령의 교회’로 불리는 세인트존스교회를 걸어서 가기로 했고 경찰은 백악관 주변의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쏘며 밀어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교회로 걸어가 성경을 들고 기념 촬영을 했는데, 이곳은 전날 밤 시위로 불길이 치솟은 곳이었다.

커노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9월의 첫날, “제발 오지 말아 달라”는 커노샤 시장의 부탁에도 아랑곳없이 그는 또 다른 경찰의 흑인 총기 사건이 발생한 곳을 찾았다. 이미 그곳은 건물이 불타고 가게가 약탈당해 혼란스러운 곳으로 변했다. 평화시위자에게 메시지를 전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트럼프 대통령은 오히려 시위에 불참한 주민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들은 법과 질서를 원한다.” 코로나19로 핀치에 몰렸던 트럼프 대통령은 인종적 불평등 문제가 불거지자 ‘법과 질서’의 대통령으로 선회했고 자연스레 2020년 선거의 슬로건으로 삼았다.

닉슨의 ‘남부 전략’ 따라 하기

‘법과 질서’라는 말 때문에 그는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을 60여년 만에 불러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하야했던 그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법과 질서’를 내세웠는데 여기에는 ‘남부 전략(Southern Strategy)’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미국 남부의 백인 민주당원 표를 얻기 위해 고안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는 미국 내 도시의 범죄율이 증가하고 무질서가 심각해지면서 ‘법’이나 ‘질서’라는 단어가 갖는 매력이 컸던 때였다. 게다가 1968년 4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로 워싱턴DC, 시카고, 볼티모어 등에서는 폭동이 일어났다. 4개월 뒤인 같은 해 8월, 마이애미에서 닉슨 당시 공화당 후보는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을 했다. 그는 “도시들이 연기와 불길로 뒤덮여 있다”며 법과 질서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 전략의 핵심 키워드는 ‘범죄’ ‘도심’ ‘조용한 이웃’이었다. 모두 백인 유권자들과 연결한 언어 코드였고 당시 분노하던 흑인들을 향해 갖는 백인의 두려움을 투표에 활용하는 게 목표였다.

드러내놓고 인종차별을 활용한 전략 탓에 맹렬한 비난이 뒤따랐다. 그렇지만 선거에서는 승리했다. 민주당의 휴버트 험프리 후보가 북동부 지역 13개 주에서 승리했을 때 닉슨 전 대통령은 32개 주에서 이겼다. 4년 뒤 선거에서도 그는 또다시 법과 질서에 호소했고 당시 매사추세츠주를 제외한 나머지 주에서 모두 승리하며 압도적으로 재선에 성공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재선을 도왔던 민주당 여론조사 전문가 코넬 벨처가 “남부 전략은 정말 악독한 방법이지만 현대 정치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전략이다”라고 평가한 이유다.

법과 질서를 호소하는 게 투표에는 얼마나 효과적이었을까. 가디언이 소개한 오마르 와소 프린스턴대 교수의 연구는 1968년 선거에서 킹 목사가 사망한 뒤 벌어진 폭력 시위가 백인 투표 패턴에 미치는 영향을 측정한 것이었다. 이에 따르면 폭력 시위를 겪은 백인 유권자 중 약 8%가 공화당 지지로 돌아섰는데 이 정도면 당시 일리노이, 미주리, 뉴저지, 오하이오 등의 스윙스테이트에서 공화당 후보가 이기는 데 충분한 표였다. 와소 교수는 닉슨이 ‘법과 질서’라는 언어로 시위를 공격한 것이 대통령직을 얻는 데 결정적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닉슨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미 남부의 백인 당원 표를 얻기 위해 ‘법과 질서’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인종차별 전략을 사용했다. ⓒphoto 뉴시스
닉슨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미 남부의 백인 당원 표를 얻기 위해 ‘법과 질서’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인종차별 전략을 사용했다. ⓒphoto 뉴시스

재선의 승부처는 교외 백인 유권자

트럼프의 접근은 닉슨보다 노골적이다.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자신을 대신한다면 저소득층의 주택이 교외에 넘치게 될 것이라고 말하며 흑인을 은연중에 공격한다. 교외에는 주로 도시에 직장을 둔 중산층 이상의 백인이 많다.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BLM)’ 운동을 ‘증오의 상징’이라고 했고, 참가자는 ‘폭도’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런 폭도들이 바이든 후보에게 표를 던지고 있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유권자들의 두려움을 무자비하게 자극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행동은 전략의 산물이다. 불타는 자동차, 부서진 상점, 시위대의 폭력을 묘사하는 광고에 수백만달러를 쏟아붓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의 곁에서 선거를 돕는 핵심 인력들은 이런 인종 캠페인에 훌륭하게 적응된 사람들이다. 연설문을 작성하는 스티븐 밀러 백악관 선임보좌관이 대표적인데 그는 트럼프 정부의 반(反)이민정책을 주도했고 인종을 활용한 정치적 셈법에 능한 사람이다. 그들의 계산은 하나로 수렴된다.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하려면 주요 경합주에서 부동층을 끌어와야 한다는 것. 시사주간지 타임은 여기서 말하는 부동층을 이렇게 정의했다. “교외에 주로 거주하는 이들은 트럼프를 좋아하지 않지만 바이든 또한 확신하지 않는다. 이들은 투표율이 높은 시점에서 6~10% 정도를 차지하며 일반적으로 50~68세로 하위 중산층에 속하는 직업을 갖고 있다.”

교외는 이번 대선에서 가장 치열한 전장이다. 미국은 유권자 표심을 크게 도시·시골·교외로 나눈다. 도시는 상대적으로 진보색이 강해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편이고 시골은 보수적 성격이라 공화당이 유리한 곳이다. 그 사이에 낀 교외는 회색지대다. 보통은 중산층 이상의 백인이 많이 거주해 공화당이 유리했지만 최근에는 민주당 표가 많이 나오면서 표 계산을 하기가 쉽지 않은 곳이 됐다.

지난 8월 말 공화당 전당대회가 끝난 뒤 대부분의 여론조사는 트럼프 대통령이 컨벤션 효과를 거의 누리지 못했다는 걸 보여줬다. 9월 2일 나온 폭스뉴스 여론조사에서는 폭력과 갈등의 진원지인 커노샤가 있는 위스콘신주에서도 바이든 후보(47%)가 치안이나 범죄 심판에서 트럼프 대통령(42%)보다 잘할 거라는 응답이 많았다. 이것과 비슷한 결과는 2020년의 또 다른 격전지로 꼽는 애리조나에서도 찾을 수 있다.

2016년 트럼프 대통령을 백악관으로 보낸 일등 공신은 교외 유권자였다. 당시 5만명 이상의 도시 지역 거주자 중 트럼프 지지자는 35%에 불과했지만 교외 유권자의 50%가 표를 줘서 승리할 수 있었다. 지금은 상황이 4년 전과 달라졌다. 교외 유권자가 등을 돌렸다는 결과가 반복해 나왔다. 9월 2일 발표된 그리넬대학 전국 여론조사에 따르면 교외 유권자 중 58%가 바이든 후보를 지지했고 35%만이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했다. 특히 교외의 여성 유권자 사이에서는 바이든 후보가 두 배 이상 앞선다.

공화당 전략가 중 한 명인 로리 쿠퍼는 가디언에 “트럼프의 문제는 유권자들을 매우 낮은 수준으로 바라보는 점이다. 모든 백인 중도우파 유권자들이 자신과 같은 인종관을 가졌다고 믿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미 교외 지역의 전체적인 인종 구성이 미국 전역의 인종 구성과 비슷해진 점도 트럼프의 설득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게다가 폭력에 대한 처벌과 공공질서 유지는 현재 유권자들의 최대 관심사가 아니다. 지난 8월 중순 퓨리서치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올해 대선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경제와 코로나19였다. 폭력 범죄나 인종적 불평등은 후순위다.

“트럼프와 시위대, 어느 쪽이 더 두려운가”

하지만 선거는 아직 두 달이나 남았고 이 정도면 변화가 생기기에 충분하다. 폴리티코는 “최근 민주당 전략 파트가 교외 유권자들을 포커스 조사해 보니 도시에서 벌어지는 폭력 시위를 점점 불안해하고 있더라”고 전했다. 지난 9월 3일 공개된 야후·유고브 여론조사는 이런 심증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2020년 대선에서 교외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기회가, 바이든 후보에게는 위험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나왔다. 여론조사에 참가한 응답자들의 변화를 추적하기 위해 재차 연락해 조사를 했는데 그새 바이든 후보에 대한 호감도가 떨어져 있었다. 전달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교외에 거주하는 유권자 중 46%는 그에게 호의적이었는데 이번 조사에서는 42%로 떨어졌다. 1 대 1 대결 구도에서도 지난 7월 말에는 48% 대 41%로 바이든 후보가 크게 앞섰지만 8월에 들어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45%를 얻어 43%를 얻은 바이든 후보에게 역전했다. 7월만 해도 BLM 운동에 호의적인 사람(46%)이 비판적인 사람(45%)보다 살짝 많았지만 한 달 뒤에는 비판적인 사람이 50%를 차지하면서 호의적인 사람(44%)보다 많았다. 소수 인종에 대한 경찰의 잔혹함이 폭력보다 더 큰 문제라고 말했던 사람들이었는데 한 달 뒤에는 폭력(53%)이 더 큰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한 달 간격으로 바뀐 이번 응답자들의 반응에서는 한 가지 패턴을 볼 수 있다. 시위를 지지하던 교외 백인 유권자들도 계속되는 폭력에 인내심을 잃고, 그렇게 혼란이 계속될수록 사회에서는 더 강력한 대응을 요구할 수 있다는 건데 이건 트럼프 캠프가 바라는 그림이다. 물론 이런 희망의 불씨가 얼마나 계속될지, 얼마나 커질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교외의 백인 유권자들이 두려워하는 건 트럼프인가 시위대인가”를 묻는 일이 이번 대선에서 매우 중요해지고 있다.

김회권 국제·IT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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