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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6호] 2020.09.21

또다시 번지는 ‘소로스 음모론’의 배후

▲ 미국 헤지펀드 투자자 조지 소로스. photo 뉴시스
미국의 헤지펀드 투자자이며 세계적 부호인 조지 소로스가 지난해 90세가 되었다. 1930년 8월 2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소로스는 영국에서 대학 교육을 받고 미국으로 이주하여 월가에서 거부가 되었다. 현재 재산이 100억달러 수준으로 평가된다.
   
   소로스는 자신이 설립한 열린사회재단을 통해 세계 각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지금까지 수백억달러를 기부한 자선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요즘 소로스는 다소 심기가 불편할지 모른다. 유대인인 그가 좌파를 배후에서 조종하여 국가를 무너뜨리려 한다는 음모론이 나돌기 때문이다. ‘소로스 음모론’은 미국은 물론 출생지인 헝가리, 이슬람 국가인 터키, 심지어는 유대 국가인 이스라엘에서조차 일고 있다. 소로스 음모론은 개인에 대한 비난을 넘어 반유대주의 정서에까지 불을 붙일 기세이다.
   
   나치스 독일에 의해 대학살을 경험한 유대인은 반유대주의의 확산을 가장 우려한다. 돈 많은 유대인이 배후에서 세상을 조작한다는 유대인 음모론은 항상 존재해왔다. 대개는 근거 없는 ‘카더라’ 통신 수준이었다. 그러나 소로스 음모론은 미국 내 유력 인사들이 공개적으로 주장한다는 점에서 유대인 사회에서는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듯하다.
   
   
   “소로스는 미국 국민의 적”
   
   소로스 음모론의 확산은 그가 설립한 열린사회재단의 활동과 관련이 크다. 그동안 열린사회재단은 동유럽 국가들이 공산주의체제에서 자유민주주의체제로 이행하는 것을 지원해왔다. 미국 등 서구에서는 인종평등을 목표로 좌파 및 흑인 민권단체를 후원한다. 우파 진영 입장에서는 소로스가 좌파의 돈줄이라는 비판을 쉽게 제기할 수 있다.
   
   “미국 국민의 적”(공화당 하원의원 후보 마조리 그린)이라는 등 공화당 정치인들이 소로스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민주당을 지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소로스는 2004년 이후 민주당 대선후보를 지지했다. 올해 대선에서도 민주당을 지지하고 있다. 현재 민주당의 대선후보는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이지만 소로스는 지난해 10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훨씬 좌파적 성향이 강한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워런 의원은 부자들에게 부유세를 징수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소로스는 “워런 의원이 트럼프를 이길 수 있는 분명한 후보이며, 대통령이 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강조했다.
   
   소로스는 “트럼프가 엄청난 해악을 끼치고 있다”며 시리아 주둔 미군 철수 결정이 “미국의 국제적 영향력을 파괴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소로스는 “트럼프가 국가 이익보다도 개인적인 이익을 더 중시하는 일탈을 벌이고 있다”며 “이 때문에 트럼프는 몰락하고 2020년 대선에서 패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공화당 지지자들이 소로스의 이같은 발언을 좋아할 리 없다.
   
   
   소로스 공격의 선봉 줄리아니
   
   현재 소로스 공격의 선봉에 선 인물은 유대인이 많이 사는 뉴욕에서 시장을 지낸 트럼프의 절친 루디 줄리아니다. 그는 지난해 12월 뉴욕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소로스는 유대인도 아니다. 내가 소로스보다 더 유대인이다. 그는 유대교회당에도 나가지 않는다. 그는 이스라엘도 지지하지 않는다. 그는 이스라엘의 적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에는 “소로스가 미국 정부를 파괴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지난 5월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에 체포되는 과정에서 가혹행위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 이후 미국 전역에서 ‘BLM(Black Lives Matter)’ 시위가 지속되자 소로스의 열린사회재단은 흑인 사회에 2억2000만달러를 기부한다고 발표하였다. 시위사태를 계기로 진정한 인종평등 사회를 구현한다는 취지였다. 재단 측은 시위사태를 ‘인종 간 정의구현운동’이라고 규정하고 “재단의 설립자인 조지 소로스 회장이 시작한 전 세계의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권리, 존엄, 공정을 위한 투쟁을 수행할 수 있어 영광”이라고 발표하였다. 이어 소로스 회장이 1990년대부터 인종차별 체제를 해체하려는 흑인의 민권운동을 지원해왔음을 상기시켰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건국 유공자들의 동상을 파괴하고 경찰에 대한 폭력을 불러일으키는 등 BLM 시위의 불법적인 측면을 강조해왔다. 트럼프나 공화당 입장에서는 불법 폭력시위를 정의로운 인종평등운동이라며 정당성을 부여하는 소로스의 열린사회재단을 곱게 여길 리 없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도 줄리아니 전 시장이 다시 나섰다. 그는 8월에 폭스TV에 출연해 시위를 주도하는 흑인 단체는 “불법조직”이라며 “대통령이 그 단체들이 테러조직이라고 선언하고 소로스의 돈이 전달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어 “소로스가 불건전한 성장환경(sick background)에서 형성된 불건전한 의도(sick reason)를 가지고 미국 정부를 파괴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 헝가리 친정부 시위대들이 조지 소로스 선전 간판을 뜯어내고 있다. photo 뉴시스

   나치스의 협력자?
   
   줄리아니가 지적한 ‘불건전한 성장환경’에 대해 이스라엘의 예루살렘포스트는 아마도 “소로스가 나치스와 협력하였다는 음모론을 두고 한 말 같다”고 설명했다. 실제 소로스는 13세 때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나치스가 압류하던 유대인 재산목록을 작성하는 사람을 따라다닌 적이 있다. 나치스와 협력하던 한 유대인위원회의 심부름도 하였다. 13세인 소로스가 유대인의 체포나 수용소행을 결정했을 리는 없지만 줄리아니는 개인 과거사를 들춰내 사람들의 의구심을 자아내게 만든 뒤 정치적 공격의 소재로 삼고 있다.
   
   트럼프도 소로스 음모론을 전파한다. 그는 2018년 10월 트윗을 통해 “소로스가 좌파에 급료를 주고 있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트럼프는 이 같은 음모론으로 재미를 본 적이 있다. 그는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은 인물이며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음모론을 줄기차게 제기하여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하였다. 현재 코로나19 팬데믹을 잘못 다루었다는 비판을 받는 등 재선 위기에 처해 있는 트럼프로서는 낙태와 동성애를 지지하는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을 지원한 거부의 환투기꾼 소로스를 비판함으로써 지지자를 규합할 수 있다. 미국 언론은 소로스 음모론이 11월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기승을 부릴 것이라고 우려한다.
   
   소로스 음모론이 유력한 정치인에 의해 공식적으로 처음 제기된 것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였다. 당시 소로스는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싱가포르의 통화가치 폭락에 투자하여 큰돈을 벌었다. 반대로 아세안 국가들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한국도 통화가치 폭락 등 경제난을 맞았다.
   
   1997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 외무장관회의에서는 이례적으로 “아세안 회원국들의 통화가치를 불안정하게 만들려는 세력의 시도에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는 공동성명이 발표되기도 했다.
   
   당시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는 군사정권이 지배하는 버마(현재 미얀마)를 아세안이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하는 소로스가 외환위기의 배후 인물이라고 주장하였다. 마하티르는 “부자가 투기를 무기로 사용하여 독립국가들을 굴복시키고 있다”며 “소로스가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고 말했다.
   
   소로스가 버마의 군사정권이 소수민족과 야권 인사들을 탄압한다고 비판하며 아세안 국가들이 버마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것은 사실이었다. “전체주의 정권은 아세안의 평화와 안정을 저해한다”는 게 당시 소로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소로스는 “아세안 국가들의 통화를 판 것은 한 차례뿐”이라며 자신이 외환위기의 주범이라는 마하티르의 주장을 부인했다. 당시 소로스는 아세안 국가들의 수출 실적이 저조해지자 통화 하락에 베팅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말레이시아나 아세안 국가에도 소로스처럼 베팅한 기관들이 있었다.
   
   
   소로스와 마하티르의 악연
   
   소로스가 전 세계적인 명성과 악명을 동시에 획득한 것은 1992년 영국 파운드화 투기 사건 때였다. 당시 소로스는 파운드화가 고평가되었다고 판단하여 100억파운드를 투매하였다. 영국은 환율방어를 시도하다 34억파운드의 손실을 입은 반면, 소로스는 10억달러를 벌었다. 이때 말레이시아 은행은 영국 정부 판단에 보조를 맞추다 60억달러의 손실을 보았다. 이때부터 소로스와 악연을 맺은 마하티르 입장에서는 소로스의 정치적 주장이 투기꾼의 변명으로 들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2006년 쿠알라룸푸르에서 만나 화해하였다. 당시 마하티르는 1997년 아세안 통화 폭락의 배후라는 소로스에게 씌워진 혐의를 공식적으로 벗겨주었다.
   
   지금도 소로스 음모론을 적극적으로 생산하며 권위주의 통치를 강화하는 정치인들이 있다.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가 대표적이다. 오르반은 집권 이후 사법부와 언론 통제를 강화하여 민주주의 위기론을 초래한 인물이다. 그는 2018년 6월 비정부기구의 활동을 통제하는 이른바 ‘소로스 정지(Stop Soros)법’을 선포하였다. 열린사회재단이 불법입국한 무슬림들을 위한 활동을 벌인다는 것이 이유였다. 헝가리 관영언론들은 정부를 비판하는 활동가들을 ‘소로스의 용병들’이라고 비난하며 명단을 공개하는 등 압박을 가했다.
   
   헝가리 출신인 소로스는 1980년대 후반부터 이 나라의 민주주의 이행을 적극 지원하였다. 대학도 세웠다. 그러나 오르반 총리의 압박에 결국 열린사회재단을 독일 베를린으로 이전하였다.
   
   터키의 레제프 에르도안 대통령도 소로스 음모론 애용자다. 2018년 11월 터키 내무부는 5년 전 발생했던 반정부 시위사태의 배후가 소로스라며 자국 내에서 활동하던 열린사회재단 관련자들을 체포하였다. 에르도안은 반정부 인사들의 배후에 소로스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에르도안은 “(반정부 인사의) 배후는 누구인가? 바로 유명한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 소로스이다. 이 자는 사람들에게 국가를 분열시키고 산산조각 내라고 사주한다. 그는 많은 돈을 이런 데에 사용한다”고 주장했다. 열린사회재단은 “근거 없는 주장”이라며 터키에서의 활동을 중단하였다.
   
   
   독재자들이 애용하는 ‘소로스 음모론’
   
   소로스는 유대인이면서도 팔레스타인 인권단체도 지원하였다. 미국 내에서도 좌파 유대인 단체에만 기부할 뿐 영향력이 큰 유대인 단체에는 기부하지 않는다. 특히 그는 이스라엘이 요르단강 서안에 유대인 정착촌을 설치하여 영구점령하는 것에 반대한다. 팔레스타인의 권리를 지지하는 소로스의 입장은 공화당 우파에는 좋은 공격거리가 된다.
   
   소로스는 2007년 미국에서 영향력이 큰 유대인 단체인 미국이스라엘공공문제위원회(AIPAC)가 “네오콘과 밀착되어 이라크 침공을 열렬히 지지하였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유대인 단체의 이러한 행동이 “전지전능한 유대인이 음모를 꾸민다는 반유대주의적인 믿음에 ‘일정한 신뢰도’를 부여한다”고 우려하였다. 소로스가 좌파를 지원하는 것이 부분적으로나마 반유대주의 확산을 막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해지는 대목이다. 소로스에게도 유대인 음모론은 언제든 반유대주의로 돌변할 수 있는 위협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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