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기타무라 시게루 일본 국가안보국장. 서훈 국가안보실장. 니카이 도시히로 자민당 간사장. 박지원 국가정보원장. ⓒphoto 뉴시스
(왼쪽부터) 기타무라 시게루 일본 국가안보국장. 서훈 국가안보실장. 니카이 도시히로 자민당 간사장. 박지원 국가정보원장. ⓒphoto 뉴시스

지난 9월 취임한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는 자신이 처음으로 맞닥뜨릴 외교 문제가 한·일 관계가 될 가능성에 우려하고 있다고 한다. 도쿄의 외교 소식통들은 스가가 분(分) 단위로 쪼개 쓰는 일정 속에서도 외무성으로부터 징용 기업 자산의 현금화 가능성에 대한 보고를 빠짐없이 받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 법원의 판단에 따라 언제든지 ‘현금화 국면’이 시작될 수 있기에 이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가는 취임 전에 관방장관으로 수차례에 걸쳐 일본 기업 자산이 매각되면 즉각 보복조치를 취하겠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일본 정부가 비밀리에 금융제재, 송금중지를 포함해 약 40개의 보복조치를 주기적으로 검토할 때도 모두 참여해왔다.

스가 “현금화하지 않아야 방한”

스가가 최근 ‘현금화’하지 않는다고 약속해야 방한(訪韓)할 수 있다는 입장을 문재인 정부에 통보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문재인 정부가 오는 12월 한·중·일 3국 정상회의의 서울 개최를 검토 중인 상황에서 압류된 자산의 안전성이 보장돼야 서울에 갈 수 있다는 원칙을 천명한 것이다.

스가가 전임자인 아베 신조(安倍晋三)에 비해 한·일 관계에 대해 더 강경한 태도를 취할 것이라는 관측도 커지고 있다. ‘외교 초보’인 그가 징용배상 문제로 악화한 양국 관계에 대해 강한 입장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을 미심쩍어하는 일본인들을 안심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스가는 최근 한·일 관계의 악화 원인이 전적으로 문재인 정부에 있다고 보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2015년에 맺은 위안부 합의를 사실상 파기하고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위배되는 징용배상 요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불신감의 배경에는 개인적인 배신감도 자리 잡고 있다. 스가는 이병기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주일 대사로 근무할 당시 1살 위인 그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 전 실장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선생(先生)’으로 부르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 실무 협의를 발족시켰다. 2015년 12월 위안부 합의가 맺어지기 전에 여러 차례 개입해서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이 전 실장이 문재인 정부에서 구속되고 위안부 합의가 휴지가 되자 목소리를 높여가며 격노했다는 사실은 일본 정치권에 널리 알려져 있다. 스가는 이 전 실장이 감옥에 가게 되자 인편을 보내 위로하기도 했다.

스가가 총리가 되면서 한·일 관계에 미국을 활용하겠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다. 그는 분게이슌주(文藝春秋) 10월호에 밝힌 자신의 ‘정권 구상’에서 “한국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도 미국의 존재는 크다”고 했다. “일·한 양국이 2015년 위안부 문제에 대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에 합의했으나 한국 측이 (이를) 번복할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었다. 그래서 미국 정부가 이 합의를 환영하는 성명을 내도록 외교 루트로 조정해서 ‘증인’이 되게 했다.” 위안부 합의 타결 직후 당시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 존 케리 국무장관, 수전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잇달아 환영 메시지를 내놓은 배경에 일본의 외교가 작용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총리가 위안부 합의의 지속을 위해 미·일 양국 간 긴밀하게 공조했음을 밝힌 것은 처음이다.

스가는 또 “이렇게 ‘성 밖의 해자(垓字)를 메우는 외교’가 때로는 필요하다고 느꼈다”며 “일·한 관계가 이렇게 빨리 이상하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지만 일본과 한국 중 어느 쪽이 골포스트를 움직이고 있는지 ‘증인’인 미국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일본은 그동안 문재인 정부의 위안부 합의 사실상 파기, 징용배상 문제에 대해 ‘국제법을 준수하라’는 논리를 들고나왔을 뿐이다. 이에 대해 ‘미국이 증인’이라는 논리를 제기한 것은 처음이다. 스가가 역사 문제로 양국 관계가 계속 악화될 경우 미국이 한국 압박에 나서게 만드는 외교를 펼치겠다는 입장을 시사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총리가 스가로 바뀐 상황에서도 최악의 한·일 관계가 ‘시계(視界) 제로’인 상황은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양국 간 언제든 활용 가능한 두 개의 고위급 파이프라인이 최근 만들어진 것은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서훈 국가안보실장과 기타무라 시게루(北村滋) 일본 국가안보국장은 ‘스파이마스터(spymaster·첩보기관 책임자)’로 인연을 쌓은 데 이어 ‘안보 수장(首長)’으로 다시 만난 특이한 인연을 갖고 있다.

‘스파이마스터’에서 ‘안보 수장’으로

기타무라는 한국의 국정원장에 해당하는 내각정보관 자격으로 2018년 남북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세 차례 방일(訪日)한 서 실장을 만나 관계를 긴밀하게 했다. 당시 국정원장이었던 서 실장과 기타무라는 도쿄의 음식점에서 비밀리에 만나 식사를 함께하며 남북 관계와 북·일 관계 등에 대해 폭넓게 의견을 교환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타무라는 이때부터 서 실장에 대해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라고 평가한 것으로 전해졌다.

기타무라는 지난 7월 총리 관저(官邸) 일각의 반대에도 불구, 서 실장의 취임을 축하하는 전화를 걸기도 했다. “양국 관계도 악화한 상황에서 굳이 전화할 필요가 있느냐”는 반대론이 제기됐지만 기타무라는 “서 실장과는 친한 사이다. 그의 취임을 축하하고 싶다”며 전화통화를 강행했다.

스가 총리를 사실상 옹립할 정도로 영향력이 큰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자민당 간사장과 박지원 국정원장의 채널은 서훈-기타무라 관계보다는 훨씬 더 오래됐다. 니카이는 그간 한·일 관계가 위기에 부딪힐 때마다 막후 역할을 해왔던 인물로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 당시 청와대 공보수석이었던 박지원 국정원장과 호형호제하는 사이다. 2017년에는 360명, 2018년 400명의 니카이파 관계자들을 이끌고 한국에서 하계 연수회를 가질 정도로 한·일 관계를 중시해왔다.

지난해 아베 내각의 수출규제 당시 양국 관계가 얼어붙었을 때 니카이는 도쿄를 긴급 방문한 한국 대표단의 면담 요청을 거부했다. 하지만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박지원 국정원장의 요청은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여 오사카에서 비밀회동을 갖고 해결책을 논의하기도 했다. 니카이는 특히 일본 관광업계의 대부(代父)로 불리는데, 코로나19 사태 종식 후에 일본 관광 활성화를 위해 한·일 관계 개선에 적극 나설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키워드

#도쿄 통신
이하원 조선일보 특파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