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9월 28일 침몰되기 전의 MS에스토니아호. 선수의 대형 유선형 출입구인 바우바이저(사진 앞부분)가 파도 압력으로 떨어져나간 것이 공식 조사에서 밝혀진 침몰 원인이었지만 최근 스웨덴 언론들의 수중촬영에서 우현의 구멍(작은 사진)이 새로 발견되면서 침몰 원인에 대한 의혹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photo 셔터스톡
1994년 9월 28일 침몰되기 전의 MS에스토니아호. 선수의 대형 유선형 출입구인 바우바이저(사진 앞부분)가 파도 압력으로 떨어져나간 것이 공식 조사에서 밝혀진 침몰 원인이었지만 최근 스웨덴 언론들의 수중촬영에서 우현의 구멍(작은 사진)이 새로 발견되면서 침몰 원인에 대한 의혹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photo 셔터스톡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침몰사고는 한국 해난사고 가운데 가장 큰 참사로 꼽힌다. 탑승객 476명 중 304명이 사망하고 172명이 구조된 이 사고에서 사망자 대부분이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생이라는 점에서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더했다.

한국의 세월호 사건과 비견되는 재난사고로 1994년 9월 28일 발트해에서 발생한 MS에스토니아호 침몰사고가 꼽힌다. 이 사고로 탑승객 989명 가운데 137명만이 구조되고 852명이 사망했다. 세월호 사고의 경우 사망자 시신은 5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수습되었고 선체도 인양되었다. 그러나 MS에스토니아호의 사망자 가운데 수습된 시신은 94구뿐이다. 사고 선박도 여전히 발트해 수심 80m 해저에 놓여 있다.

852명이 수장된 초대형 참사

당시 조사를 담당한 스웨덴, 에스토니아, 핀란드 등 3국은 사고원인으로 선체의 결함과 높은 파도 등을 꼽았지만 사고 원인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억측이 난무하였다. 그런데 사고 발생 26년 만인 지난 9월 디스커버리 탐사팀이 로봇 촬영을 통해 침몰한 MS에스토니아호의 우현에서 커다란 구멍을 발견하였다. 이에 따라 스웨덴과 에스토니아 등 관련국들은 추가조사에 합의하였다.

MS에스토니아호는 1만6000t의 대형 크루즈 페리선이었다. 1980년 독일에서 건조된 이 배는 13년간 독일의 항구도시와 스웨덴의 스톡홀름을 운항하는 동안 단 한 차례의 사고도 없었다. 1993년 이 배는 스웨덴과 에스토니아 합작사인 에스트라인에 팔려, MS에스토니아호로 이름이 바뀐 뒤 스톡홀름과 에스토니아의 수도인 탈린 구간을 운항하였다.

MS에스토니아호 갑판 위에는 선실과 식당, 호텔 등이, 갑판 하부에는 자동차와 화물칸이 있었다. 자동차나 화물은 선수(船首)를 이루는 ‘바우바이저(bow visor)’라고 불리는 대형 유선형 출입구를 통해 화물칸에 적재되었다. 바우바이저는 위아래로 여닫히는 구조였다.

MS에스토니아호는 9월 27일 오후 7시15분 탈린을 출항해 다음 날인 28일 아침 스톡홀름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당시 발트해에는 초속 20m가 넘는 강한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독일에서 건조된 거대한 선박의 안전성에 대한 확신으로 사람들은 특별한 위험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MS에스토니아호는 처음 350㎞는 별 탈 없이 운항하였다. 사람들도 대부분 객실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거나 잠을 자고 있었다. 사고가 발생한 장소는 핀란드의 우토섬에서 41㎞가량 떨어진 국제 수역이었다. 9월 28일 새벽 1시쯤 갑자기 강한 충격이 배를 덮쳤다. 생존 승객들은 어떤 폭발이 일어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한 충격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충격 후 40분 만에 바닷속으로

배는 빠른 속도로 우현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승객들은 놀라서 갑판으로 뛰쳐나왔다. 위기를 알리는 비상사이렌도 울렸다. 승객들이 구명정에 오르려고 하였지만 배가 워낙 빠른 속도로 기우는 바람에 구명정을 바다에 띄우지도 못하였다. 남자 승객들 중에는 고무튜브만 걸치고 바다에 뛰어드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MS에스토니아호는 40분 만에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승객들 가운데 여성, 노인, 어린이들 대부분은 객실이나 선실 내 복도에 갇힌 채 갑판에 나오지도 못하고 수장되었다.

MS에스토니아호가 보낸 조난신호를 듣고 주변 해역을 지나던 여객선 마리엘라호가 사고 현장에 도착하였지만 이미 배가 침몰하고 30분이 지난 뒤였다. 또 마리엘라호는 구조선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배 선원들은 추운 북극의 바다에서 38명을 구조하였다. 새벽 3시에는 구조헬기들이 나타나 구조작업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일부 구조된 사람들도 충격이나 저체온증으로 사망하였다.

결국 탑승객 989명 가운데 137명만 구조되었으며 95명은 사망이 확인되었다. 나머지 757명은 실종으로 처리됐다. 나라별로는 스웨덴 국민이 501명으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에스토니아 국민 285명 등 모두 17개국 국민 852명이 사망하였다.

사망자 수는 스웨덴이 많았지만 에스토니아 국민들의 충격은 그 이상이었다. MS에스토니아호는 에스토니아의 국기를 떠올리듯 외부가 흰색과 푸른색 라인으로 칠해져 있었다. MS에스토니아호는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독립한 신생국 에스토니아의 자부심과 신뢰를 상징하는 선박이었다.

유럽에서 발생한 최대의 선박 참사를 두고 스웨덴, 에스토니아, 핀란드 등 3개국이 합동조사를 벌였다. 조사과정에서 떨어져 나간 바우바이저가 인양되었다. 공식 조사 결과 사고원인은 “MS에스토니아호에 강력한 파도가 덮쳐 바우바이저의 잠금장치에 손상이 가해져 떨어져나갔으며, 이로 인해 갑판 하부에 몇 분 만에 수천t의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가 배를 침몰시켰다”는 것이었다.

공식 조사 결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측도 많았다. MS에스토니아호를 건조한 독일의 마이어조선소는 자체조사를 진행해 파도의 압력으로 바우바이저가 떨어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며 해수면 아래에 잠겨 있는 선박 하부에서 발생한 폭발 사고 때문에 배가 침몰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폭발 결과 발생한 구멍 2곳을 통해 선체에 다량의 해수가 들어가는 바람에 배가 침몰했다는 설명이었다. 폭발의 원인으로는 러시아제 무기들이 밀수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누군가가 폭발물을 설치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되었다. 인근을 지나던 스웨덴 잠수함과 충돌하여 침몰했다는 주장도 처음부터 제기됐지만 이런 주장들은 공식 발표에서는 배제되었다.

MS에스토니아호는 침몰 후 해저 70m 바닥에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채 놓여 있는 상태다. 선박에는 사고 원인을 찾아낼 수 있는 항해 일지가 담긴 컴퓨터도 있었지만 발견되지 않았다. 공식 조사를 뒤엎을 만한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

1995년에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MS에스토니아호가 침몰한 수역에서 어떠한 조사도 금지하는 조약에 발트해 지역 국가들이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침몰원인에 대한 추가적인 조사도 금지되었다. 스웨덴 당국은 사고 선박을 콘크리트로 뒤덮어 해양묘지로 조성하자는 주장도 하였다. 이를 두고도 관련국들이 사고 원인을 은폐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침몰 원인에 대한 공식 발표 이후 재조사 요구가 그치지 않았지만 스웨덴, 에스토니아, 핀란드 등 당사국들은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지 않았다며 재조사를 거부하였다. 기술적인 난점과 비용 등의 이유를 들어 침몰한 선체의 인양도 하지 않았다. 2016년에는 희생자 유족들이 에스토니아 총리를 상대로 재조사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였고 2019년에도 재조사 요구 소송이 있었다. 에스토니아의 행정법원도 원고 측의 의견을 받아들였지만 올 초까지 새로운 조사는 진행되지 않았다.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 있는 MS에스토니아호 희생자 추모비 ‘끊어진 항로’. ⓒphoto 우태영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 있는 MS에스토니아호 희생자 추모비 ‘끊어진 항로’. ⓒphoto 우태영

최근 수중촬영으로 우현의 구멍 발견

그런데 지난 1년 사이에 스웨덴의 언론인들이 독일의 선박을 이용하여 침몰한 MS에스토니아호를 촬영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들이 취재한 내용은 10월 초에 디스커버리 네트워크의 스웨덴 지사에서 방영되었다.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MS에스토니아호- 모든 것을 뒤바꿀 발견’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내용은 침몰한 MS에스토니아호의 우현에 있는 커다란 구멍이다. 취재진이 원격조종 로봇카메라로 촬영한 결과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배의 우현에 길이 4m, 폭 1.2m 크기의 구멍이 있었다. 이전까지의 조사에서는 이러한 크기의 구멍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취재진은 이 구멍은 외부로부터의 강력한 충격이 가해진 결과 발생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스웨덴 당국은 탐사팀장인 헨리크 에버트손 등 다큐 제작진 2명을 해양묘지를 침범한 혐의로 구속했다. 이들은 스웨덴에서 징역 2년형에 처해질 위기에 있다. 그러나 에버트손은 자신들의 보도가 “언론의 관점에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하고도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디스커버리의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자 스웨덴, 에스토니아, 핀란드 등 주요 관련국들은 추가조사 가능성을 인정하였다. 3개국 외무장관들은 최근 MS에스토니아호 침몰과 관련한 “새로운 중요한 정보가 발견되었다는 점에 동의”하며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데이터에 대한 “합동조사를 실시한다”는 데에 합의하였다. 그리고 조사도 “재난의 희생자들의 마지막 안식처”가 된 침몰 선박을 보호한다는 1995년 조약을 “충분히 존중하는 가운데 진행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추가조사에 대한 논의는 스웨덴보다는 에스토니아에서 뜨겁게 진행되고 있다. 3개국 외무장관 성명도 에스토니아에서만 발표되었다.

현재 에스토니아의 포퓰리즘 정당인 보수인민당의 마르트 헬메 총재는 사고 수역에서 스웨덴 해군이 훈련을 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스웨덴이 침몰한 선박을 덮으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침몰 해역을 매장 수역으로 정하고 선박의 접근과 어떠한 조사도 금지하는 전례가 없는 특별한 조약을 서둘러 체결한 이유는 무엇인가? 선박과 충돌한 거대한 물체가 스웨덴 선박이기 때문인가?”라고 묻는다. 그는 “새로운 정보가 나왔는데도 대중을 호도하거나 조사를 가로막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사고 당시 에스토니아 측의 조사를 담당했던 검찰관 마르구스 쿠름도 새로 나타난 증거는 잠수함과의 충돌 때문에 생긴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다시 부상하는 잠수함 충돌 가능성

그러나 합동조사에 참가했던 탈린공과대학의 잔 메차비어 교수는 선체의 구멍은 배가 침몰할 때 해저의 암석들과 충돌하여 발생한 것 같다고 말했다. 잠수함 충돌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국제 조사에 참가했던 경찰국의 프릭 매닉 부국장 역시 “생존자들 모두가 침몰 직전에 선수가 먼저 기울었다고 증언하였다”며 공식 발표의 정당성을 강조한다. 그는 이어 “선수에 있는 바우바이저가 보존된 상태에서 우현에서 새로 발견된 길이 4m의 구멍을 통해서 해수가 들어갔다면 배는 침몰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사고 당시 에스토니아의 총리였던 마르트 라르는 MS에스토니아호 사건이 “정치문제화돼서는 안 된다”며 “감춰진 진실은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이어 “사고 직후 조사도 에스토니아가 주도했기 때문에 스웨덴이 진실을 은폐하기도 불가능하다”고 단언하였다. 에스토니아의 경제 기적을 이끈 인물로 평가되는 라르 전 총리는 새로운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건 발생 30년 후에 뭔가를 갑자기 기억해낸 사람들이 나타난다. 혹은 ‘진실’을 알고 있었는데 뒤늦게 공개한다는 사람들이 항상 나타난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었는데도 철저한 조사가 진행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과거의 그림자는 주기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우태영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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