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9일 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슈케크의 중앙광장에서 선거 부정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이는 시민들. ⓒphoto 뉴시스
지난 10월 9일 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슈케크의 중앙광장에서 선거 부정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이는 시민들. ⓒphoto 뉴시스

중앙아시아의 소국 키르기스스탄에서 지난 10월 6일 국회의원 선거 부정에 항의하는 민중시위가 발생하였다. 시위대는 정부 청사와 의사당 등을 점령하고 부패 혐의로 구속 수감 중이던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 전 대통령, 사디르 자파로프 전 의원 등을 석방하였다. 수론바이 진베코프 현 대통령은 선거 무효를 선언하고 사태 수습 후 퇴진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10월 9일에는 석방되었던 아탐바예프 전 대통령이 다시 수감된 반면, 자파로프 전 의원은 총리에 임명되었다. 진베코프 대통령이 사임하면 키르기스스탄에서는 시위사태로 대통령이 축출되는 혁명이 15년 동안 벌써 세 번째 벌어지는 셈이 된다.

키르기스스탄은 소련이 붕괴하면서 독립한 나라이다. 소련 붕괴로 중앙아시아에서는 카자흐스탄(면적 272만4900㎢, 인구 1870만명, 1인당 GNP 1만달러), 우즈베키스탄(45만㎢, 3357만명, 1900달러), 투르크메니스탄(49만㎢, 603만명, 7500달러), 타지키스탄(14만3000㎢, 953만명, 807달러) 등 이슬람국가들이 독립하였다. 상대적으로 키르기스스탄은 면적도 작고(20만㎢) 인구도 적고(650만명), 자원도 없는 가난한(1300달러) 나라이다.

과격 시위 끝에 수감 중이던 전 대통령 석방

하지만 키르기스스탄은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 자리 잡은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나라로 평가된다. 현재 러시아군이 주둔하고 있다. 2001~2014년에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하는 미군에 공군기지를 제공, 중앙아시아 유일의 친서방국가라는 평가도 받았다. 키르기스스탄은 중국의 인권 사각지대인 신장웨이우얼자치구와 인접하고 있기도 하다.

키르기스스탄에서는 독재정권을 물리친 민주혁명을 두 차례나 이룩하였으며 민주적인 선거를 치른 경험도 있다. 이 때문에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라는 평가도 받아왔다. 이번 10월 시위사태도 부정선거 항의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10월혁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반면에 잦은 ‘혁명’과 정치보복이 반복되면서 국가는 더욱 갈등과 혼돈에 빠져들고 있다는 부정적 평가도 나온다.

소련 붕괴 이후 독립한 키르기스스탄에서 첫 번째 대통령 선거는 1991년에 실시되었다. 당시 소련 레닌그라드대학 공대 출신으로 키르기스학술원 원장을 지낸 아스카르 아카예프가 95.33%의 득표로 당선되었다. 아카예프는 신생국 키르기스스탄을 14년간 통치하였다. 아카예프는 주변의 타지키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등 신생국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리버럴한 통치를 실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내부에서 정치세력들 간의 충돌과 악화된 경제 상황 때문에 2005년 봄, 나중에 ‘튤립혁명’이라고 불리게 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한다. 당시 실시한 국회의원 선거가 부정선거라는 주장이 시위를 촉발했다. ‘튤립혁명’이라는 명칭과는 달리 시위가 발생하자 수도 비슈케크에서는 살인과 약탈사건이 빈발하게 된다. 그해 3월 24일 아카예프 대통령은 가족들을 이끌고 이 나라를 떠났다. 새로 구성된 정부는 전 대통령 아카예프를 단죄하기 위한 법정을 구성하였다. 4월 11일 러시아의 모스크바에 머물던 아카예프는 대통령직 사임을 발표하였다.

살인과 약탈로 점철된 ‘튤립혁명’

‘튤립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아카예프 대통령 시절 총리를 지냈던 쿠르만베크 바키예프가 새로 총리가 되었다. 바키예프는 2002년 톡토굴(Toktogul)이라는 도시에서 발생한 시위를 강경진압하여 5명의 사망자 등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이유로 아카예프 대통령에 의해 총리직에서 해임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친척과 친지들을 주요 공직에 임명한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지만 2009년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90%의 득표로 당선되었다. 다음해인 2010년 4월 7일 바키예프 반대파들은 대통령 관저가 있는 정부청사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아카예프 전 대통령과 달리 바키예프는 시위대를 강경진압하여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친정부 세력은 수도를 지키는 데 실패한다. 바키예프는 잘랄라바드로 피신하여 투쟁을 다짐하였지만 시위대와의 협상을 통해 가족들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을 대가로 대통령직에서 사임하는 데 동의하였다. 바키예프는 4월 15일 키르기스스탄을 떠나 벨라루스로 정치적 망명을 하였다. ‘튤립혁명’에 이은 두 번째 혁명이었다. 4월 27일 키르기스스탄 임시정부는 바키예프의 대통령 면책특권을 박탈하고 벨라루스에 바키예프의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했다. 바키예프는 2013년 궐석재판을 통해 ‘직권남용’ 혐의로 징역 24년형을 선고받았다.

바키예프 정권 붕괴 이후 키르기스스탄 정부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유학한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가 주도하게 된다. 바키예프가 전 정권에서 총리를 지내다 경질되었듯이 아탐바예프도 바키예프 대통령 정권에서 총리를 지내다 부패 등의 원인으로 경질되었던 인물이다. 아탐바예프는 바키예프 대통령 축출을 주도하고 2011년 실시된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아탐바예프도 전임 대통령들처럼 정부 요직에 친척·친지들을 앉혀서 비리를 묵인하고 배를 불리게 만든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아탐바예프는 키르기스스탄에서 대통령직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첫 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 이양을 이루어낸 인물이다. 아탐바예프의 후임으로는 정치적 동료이자 총리였던 수론바이 진베코프가 당선되었다.

시위 사태 후 석방됐다가 재수감된 아탐바예프 전 대통령(왼쪽)과 수감됐다가 풀려나 총리에 임명된 자파로프 전 의원. ⓒphoto 뉴시스
시위 사태 후 석방됐다가 재수감된 아탐바예프 전 대통령(왼쪽)과 수감됐다가 풀려나 총리에 임명된 자파로프 전 의원. ⓒphoto 뉴시스

전·현직 대통령 비방전

그런데 진베코프는 2017년 11월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아탐바예프 전 대통령이 제3자를 이용하여 자신에게 압력을 가한다고 비난하였다. 아탐바예프도 진베코프가 자신의 부패 여부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한다고 비난하였다. 2019년 6월 키르기스스탄 의회는 아탐바예프 전 대통령의 면책특권을 박탈하였다. 두 달 뒤 8월에는 아탐바예프가 체포되었다. 이 과정에서 총격전이 발생하고 사상자가 나왔다. 2020년 6월 아탐바예프는 부패 혐의로 징역 11년2월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지난 10월 4일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나라 선거법에 따르면 7% 이상의 득표를 한 정당만이 살아남게 된다. 선거 결과 진베코프를 지지하는 4개 정당만이 7% 이상 득표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나머지 12개 야당은 소멸될 위기에 처했다. 야당 지지자들은 연합하여 10월 5일 수도 비슈케크에서 선거 부정에 항의하며 새로운 선거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의 규모는 6000명 정도였지만, 매우 공격적이었다. 경찰이 시위를 진압하려 최루탄, 고무총탄, 물대포 등을 사용하자 시위대는 화염병으로 대응하였다. 곧바로 시위대는 의회 건물로 몰려가 문을 부수고 난입하였다. 시위대는 내부를 부수고 불을 지르기도 하였다. 시위대는 국가안보위원회 건물로 몰려가 복역 중이던 아탐바예프 전 대통령을 풀어주었다. 아탐바예프와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사파르 이사코프 전 총리 등 다른 정치인들도 풀어주었다. 밤새 이어진 시위로 1명이 사망하고 600여명이 부상하였다. 시위사태 도중에 발생한 의회 건물 점거 과정에서 아탐바예프 석방 등 주요 사태들이 모두 새벽 3~4시 사이 한 시간 동안에 발생하였다.

반정부 세력은 ‘조정위원회’를 구성하여 “법치를 회복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새로 임명된 검찰총장은 선거 부정과 관련한 인사들을 모두 체포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반정부 세력은 진베코프 대통령 축출과 새로운 헌법 제정을 도모하는 것으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풀려난 아탐바예프 전 대통령이 정국을 주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성 보도가 나오기도 하였다.

시위대와 정권 협상 중 ‘언더 쿠’로 끝나나?

그런데 지난 10월 9일 진베코프 대통령은 “나라를 잃어버릴 위험에 직면했다”며 수도 비슈케크에 비상사태를 선언하였다. 군대를 출동시키고 주민들에게는 집에서 나오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10월 10일에는 풀려난 아탐바예프가 보안군에 다시 체포되었다. 시위를 배후 조종한 혐의다. 같은 날 쿠바트베크 보로노프 총리가 사임하고 아탐바예프와 함께 시위대에 의해 풀려났던 사디르 자파로프가 총리에 임명되었다. 자파로프는 현 각료들을 그대로 유지한다고 선언하였다.

새로운 총리로 지명된 자파로프는 2013년 주지사 한 명을 납치한 혐의로 징역 11년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 중에 풀려난 인물이다. 키르기스스탄 전문가인 러시아의 아르카디 두브노프는 뉴욕타임스와의 회견에서 “새로운 총리에 자파로프가 임명된 이유는 그의 지지자들 세력이 가장 강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비슈케크에서의 폭력사태는 지속되고 있으며 자파로프 지지자들과, 그의 경쟁자이자 차기 총리가 유력시되는 백만장자 오무르베크 바바노프 지지자들 간에 투석전이 펼쳐지고 있다고 한다.

자파로프는 자신에게 씌워진 주지사 납치 혐의가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권들마다 전 정권 인사들을 투옥시키는 전통이 있는 이 나라에서는 혐의 조작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뉴욕타임스는 설명했다. 두브노프도 키르기스스탄에서 형법 적용은 자주 정치적으로 각색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주 가난한 나라 키르기스스탄에서 황금알을 낳는 마약 밀매 루트와 관련되지 않은 정치인은 거의 없다”며 “어떤 형태로든 범죄와 연관되지 않은 정치인은 없다”고 단언하였다.

키르기스스탄에서 소요사태는 흔히 일어난다. 지난 15년 동안 갑작스러운 정변으로 권력이 교체된 사건이 3차례나 일어난 데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키르기스스탄의 민주주의가 성숙해지는 과정에 따르는 진통이라는 평가도 하지만 두브노프는 러시아 시사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키르기스스탄 사람들은 빨리 부자가 되고, 빨리 잘살고 싶어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민주주의를 달성하였다는 평가를 받은 다음에는 당장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삶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우리 사회는 정치적으로 미숙하다. 이 모든 것이 키르기스인의 폭발적인 성격 위에서 점화된다. 키르기스인은 불의를 보면 당장 영원히 수정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러나 불의가 뿌리 뽑힐 수는 없으니, 늘 혁명이 일어난다.”

현재 키르기스스탄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두고 전문가들은 물밑 협상이 진행되는 쿠데타, 즉 ‘언더 쿠(under-coup)’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쿠데타의 핵심은 현 정부와 국가수반을 전복하는 것이지만 10월 11일 현재 그러한 사태는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 대신 시위대는 선거 무효를 이끌어냈으며 현 정부로부터 상당한 양보를 얻어냈다. 이러한 양보를 통해 키르기스스탄의 정치 엘리트 그룹이 새로운 세력균형을 도출해낼 수 있다면 현재의 위기상황은 극복될 수도 있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현 사태는 새로운 혁명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는 설명이다.

우태영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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