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8일 도쿄 신주쿠 전광판에 바이든 당선인의 연설이 중계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11월 8일 도쿄 신주쿠 전광판에 바이든 당선인의 연설이 중계되고 있다. ⓒphoto 뉴시스

일본의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내각은 요즘 조 바이든 미 대통령 당선인의 외교·안보 관련 움직임에 미소 짓고 있다. 전통적으로 일본은 리버럴 성향의 미 민주당 정부와는 불편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에는 그런 우려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전망이 일본 정부 안팎에서 나온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지난 11월 12일 스가 총리와 바이든 당선인의 전화 통화다. 당시 취임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외교 경험이 부족한 스가는 상당히 긴장한 상태였다. 전화 통화를 준비한 외무성도 어떤 대화가 오갈지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기우(杞憂)였다.

전화 통화 후, 일본 외무성 고위 관리는 “(일본과 미국 간) 정책 과제가 완전히 일치했다. (스가 총리와 바이든 당선인의 통화는) 100점 만점”이라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요미우리신문이 ‘100점 만점’이라고 제목을 뽑은 기사를 크게 게재할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스가·바이든 통화 100점 만점’

일본 측이 반색한 것은 중국과 영토분쟁 중인 센카쿠열도(尖閣列島·중국명 댜오위다오)에 대한 바이든의 언급 때문이다. 스가는 바이든과의 첫 번째 통화에서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축하의 뜻을 전하며 우호적 관계를 만드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모두(冒頭) 발언에서도 센카쿠 문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센카쿠 문제는 대화의 흐름에 따라서 거론하는 하나의 카드 정도로 준비했을 뿐이었다.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대화를 센카쿠 문제로 끌고 간 것은 뜻밖에도 바이든이었다. 그는 미·일 동맹 강화를 바라는 스가의 발언 이후 중국이 센카쿠에 대해서 심한 도발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서 센카쿠에 대해 미·일 안전보장조약 5조 적용을 다짐한다고 말했다.

이 조항은 일본의 영토나 주일 미군기지가 무력 공격을 받을 경우 양국이 공동 대응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일본은 미국의 새 대통령이 취임할 때마다 센카쿠를 일본의 영토로 사실상 인정하는 다짐을 하루라도 빨리 듣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아왔다.

이 때문에 바이든의 이날 언급에 대해 일본 측 배석자 중 한 명은 “갑자기 (바이든 당선인이) 본론으로 들어와 ‘앗’ 하고 놀랐다”고 말했다. 스가 내각 일부에서는 과거 친중(親中) 색채였던 바이든이 취임하기 전부터 확고하게 일본의 입장을 지지하는 데 대해 다소 흥분하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2009년 출범한 오바마 정권은 중국을 의식해 한동안 ‘센카쿠 보호’를 언급하지 않아 일본을 실망시켰다. 2010년 9월 센카쿠열도 해상에서 발생한 중국 어선 충돌 사건 후에야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센카쿠에 안보조약을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비해 바이든은 취임도 하기 전에 이를 약속, 일본 측을 ‘감동’시켰다는 평가다.

스가 내각은 바이든의 외교·안보 라인 인선에 대해서도 만족하는 분위기다. 바이든은 지난 11월 토니 블링큰 전 국무부 부장관을 국무장관에, 자신이 부통령 당시 보좌관이었던 제이크 설리번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 지명했다.

블링큰은 오바마 정권에서 2014년부터 약 3년간 국무부 부장관으로 활동하며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만들었는데, 당시 그의 카운터파트가 스기야마 신스케(杉山晋輔) 현 주미 일본대사다. 스기야마는 2016년 사무차관 역임 당시 블링큰과 호흡을 맞춰 아베 신조 당시 총리의 진주만 방문을 성사시켰다. 아베는 진주만을 방문, 오바마가 지켜보는 가운데 1941년 진주만 침공으로 숨진 미국인들을 애도했다. 스기야마는 2018년 미국에 부임 후에도 블링큰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제이크 설리번 NSC 보좌관 지명자도 일 외무성이 오랫동안 ‘관리’해 왔다. 특히 아키바 다케오(秋葉剛男) 현 외무성 사무차관은 당시 주미 정무공사로 활동하면서 그가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의 부(副)비서실장을 역임할 때부터 인연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 외무상의 ‘분신(分身)’으로 알려진 야마다 시게오(山田重夫) 총합외교정책국장도 2012년부터 약 3년간 미국에 근무하며 바이든 부통령 측과의 인맥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때문에 요미우리신문은 이들이 지명되자 ‘동맹중시파 기용 환영’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외무성 고위 관리는 이 신문에 “바이든 전 미국 부통령 진영이 발표한 차기 정부의 외교·안보 담당 고위직 인사에 대해 미·일 동맹을 중시하는 실무 경험자가 모였다”며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바이든이 부통령이던 2009~2017년에 주미 일본대사로 활동했던 이들이 여전히 건재, 파이프라인을 가진 것도 빼놓을 수 없다. 2008년부터 4년간 주미 대사로 근무했던 후지사키 이치로(藤崎一郞)는 나카소네평화재단 이사장으로 활동 중이다. 그의 후임으로 6년 가까이 워싱턴DC에 주재했던 사사에 겐이치로(佐々江 賢一郎)는 외무성 산하의 국제문제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사사에 이사장은 최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바이든을 자신의 대사관저로 초청한 적도 있다고 밝혔다. 두 사람은 언제든 바이든 캠프의 주요 인사들과 연락해 주요 사안을 논의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 11월 12일 바이든 당선자와 통화 후 기자회견을 하는 스가 총리. ⓒphoto 뉴시스
지난 11월 12일 바이든 당선자와 통화 후 기자회견을 하는 스가 총리. ⓒphoto 뉴시스

‘워싱턴 스쿨’ 쳐내 인맥 끊긴 문 정부

이에 비해 문재인 정권은 2017년 5월 출범 후 오바마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온 ‘워싱턴 스쿨’ 인사들을 ‘친미(親美)주의자’라며 배척, 바이든 관련 인맥이 사실상 끊긴 상태다. 바이든이 부통령 당시 주미 한국대사는 한덕수 전 국무총리, 최영진·안호영 외교부 전 차관으로 현 정부는 이들의 경험을 활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바마 정권 초기에 주미 정무공사로 활동했던 김규현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세월호 사건과 관련해 검찰에 체포되는 곤욕을 치렀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오바마 정권을 상대하며 인맥을 쌓았던 장호진 전 청와대 외교비서관, 김홍균 전 차관보, 조현동 전 기조실장은 대사로 임명되지 못하는 수모를 당한 채 퇴직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윤병세 외교부 장관의 최측근이었던 전 북미국장은 아프리카 국가의 대사로 사실상 좌천당하기도 했다. 그나마 2009년 ‘한·미동맹 미래비전’을 만들 때 워싱턴DC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문승현 전 주미 대사관 정무참사관이 지난해 말 주미 공사로 부임한 것이 다행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일본 정부가 기존에 구축해 놓은 대미 라인을 바탕으로 바이든 미 행정부와 한 차원 높은 관계를 만들어갈 때 문재인 정부는 서둘러서 인맥을 만들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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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원 조선일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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