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폐쇄된 개성공단 전경. ⓒphoto 뉴시스
2016년 2월 폐쇄된 개성공단 전경. ⓒphoto 뉴시스

한때 평화통일의 전초이자 남북 경제협력의 상징이었던 개성공단이 가동을 시작한 것이 2004년 12월이었다. 그보다 15년 전인 1989년, 남북 대치가 한창이던 북한 땅에 남북 합작공장이 들어설 뻔한 일이 있었다. 1989년 1월 26일 동아일보는 ‘㈜진도모피와 북한 간의 비밀 협의’를 상당히 긴 기사로 특종 보도해서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북방정책이 막 시작되던 참이라 헝가리와의 수교 말고는 아직 가시적인 성과는 없던 때였다. 정부가 온통 힘을 쏟던 소련과의 수교 첫 단계인 무역사무소 설립을 위한 협의도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그런 시점에서 정부 차원도 아닌 민간 회사가 북한과 첫 합작회사를 북한 땅에 설립한다는 동아일보 경제면 6단 톱기사는 센세이셔널한 뉴스였다.

저녁자리서 우연히 나온 특종 보도

이 기사는 ‘진도모피 북한에 합작공장 추진’이란 제목에 6단 부제목으로 ‘북측서 작년 먼저 제의’, 그리고 소제목으로 ‘모스크바에도 공장 건설 추진’이라고 돼 있었다. 본 기사 내용은 이랬다.

“단일기업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모피의류 제조업체인 진도가 북한 측의 제의에 따라 북한 내에 모피의류 합작공장 설립을 추진 중이다. 26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진도는 작년 중 4회에 걸쳐 개장된 소련 레닌그라드 모피 경매장에 구매자로 참가, 이곳에서 북한산 모피를 위탁판매하러 온 북한 국영 모피수출상사 대표로부터 남북한이 합영(합작경영)하는 모피의류 공장을 유치하고 싶다는 제의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진도는 그동안 추진해오던 태국 등 동남아 지역에 대한 직접투자 진출 계획을 북한 내 합작공장 설립 계획으로 수정, 제3국 주재 북한대사관 등과 합작 상담을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합작 방식은 북한 측이 공장 부지와 인력을 제공하고 ㈜진도 측이 자본과 기술을 제공, 북한산 원피 및 중국과 소련산 수입 원피를 가공생산해 ㈜진도 측의 해외 판매망을 통해 수출하는 형태가 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방식의 합작과 관련 북한 측 합영회사운영공업부 등 당국자들은 ㈜진도의 경영주인 김영진, 영도씨 형제(공동사장)가 평양 출신이라는 점 등에서 더욱 강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진도는 이미 1980년대 초반부터 제3국을 통해 북한산 토끼 원피 등을 수입해 왔다. 진도가 수입해온 북한산 동물 원피의 이면 가죽에는 ‘경애하는 수령님을 위하여, OO소학교 OOO’ 등의 글씨가 적혀 있기도 해 북한 당국이 ‘외화벌이’를 위하여 어린 학생들까지 동원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하략)”

결론부터 말하면 이 기사 하나로 남북 관계의 역사적 진전이 됐을지도 모를 진도의 북한 합작공장 협상은 완벽하게 중단되고 다시는 시도를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진도로서는 청천벽력같은 기사였다. 해외 법인과 지사를 담당하던 진도의 종합조정실 실장이 기자들과 저녁식사를 하던 자리에서 당시 동아일보 배인준 기자의 ‘넘겨치기’에 당해서 엉겁결에 실상을 털어놓아 나온 기사였다. 배 기자는 혹시 하는 생각에 내용을 아는 듯한 말투로 “진도가 요즘 추진한다는 북한과의 협상은 어떻게 되어 가나요?”라고 넘겨짚어 물었다. 기자들과의 친교 경험이 없어 기자들의 속성을 모르는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출신 실장은 ‘이 사람이 내용을 아는구나’ 하는 생각에 진전 상황을 신이 나서 털어놓았다. 물론 비보도가 전제 조건이었고 참석 기자 전원이 비보도를 약속했다. 특종에 목숨을 거는 기자들의 속성을 잘 모르던 실장은 비보도 약속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다른 신문과는 달리 동아일보만 상세하게 협상 내용을 보도해서 진도는 난리가 났다. 그날 이후 북한은 진도와 어떤 대화도 나누려 하지 않았다. 다음 날, 비보도 약속을 지켜 기사화하지 않았던 매일경제와 조선일보는 할 수 없이 각각 경제면에 2단, 4단으로 관련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에 대한 북한의 공식 반응은 평소와는 달리 단 10일 만에 나왔다. 북한은 중요한 사안일수록 뜸을 들여가며 외부 사람들의 속을 태우면서 천천히 반응해왔다. 그러나 사태가 상당히 중하다고 느꼈는지 이례적으로 반응이 빨리 나왔다. 그것도 북한을 지배하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기관지인 노동신문의 논평도 아닌 사설을 통해서 관련 보도를 부인했다. 그만큼 재빠르게 정식으로 부인해야 할 내부 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더군다나 정치적인 사안도 아니고 일개 상업회사와의 사안을 가지고 말이다.

학생들이 바친 토끼털 기사에 분개

동아일보는 2월 7일 자 3면 사설면 하단 2단 기사로 조그맣게 자신들의 특종 기사에 대한 북한 반응을 보도했다. ‘진도와 모피 합작 부인’이라는 제목의 ‘도쿄AFP 연합’발 기사 내용은 이랬다. “북한은 5일 남북한이 무역을 시작하고 합작 모피회사 설립에 관해 협의를 하고 있는 것으로 남한 측이 왜곡 보도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도쿄에서 수신된 북한 관영 중앙통신은 당 기관지 노동신문의 사설을 인용, 남한 측에서는 ‘북남 간의 상품 직접교역에 관한 회담이 열렸고 상품이 교역되고 있는 중인 것으로 말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진도모피와의 합작 논의 자체를 부인하고 이 같은 보도는 ‘대중의 호의를 얻음으로써 현재 심각한 단계에 이른 남한 독재정치의 위기를 진정시키려는 의도의 날조’라고 주장했다.” 중앙통신은 노동신문 사설이 전체적으로 어떤 맥락이었는지 전문을 밝히지 않았지만 북한 측의 분노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노동신문이 일반 논평이나 논설도 아니고 정식 사설로 사안을 다루었다는 말은 북한이 사안을 중요하게 여겨 즉각 부인을 해야 할 정도로 중대한 일이었다는 뜻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북한은 거의 최고결정권자의 허락을 받아 진도 측에 접근해 합작공장 제의를 했다고 한다. 북한 내 반대파를 설득할 시간과 이유를 만들기 위해 조심스럽게 일을 추진하고 있던 참이었다. 정말 익지도 않은 상태에서 뚜껑이 열려 버렸으니 북한 측으로서는 당황하고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담당 일꾼들은 기밀유지의 중요성을 강조해 입단속을 제대로 시키지 않은 책임을 지고 상당한 고통을 겪었다는 후문이다. 특히 북한을 격노하게 한 기사 내용은 ‘북한 당국이 외화벌이를 위하여 어린 학생들까지 동원’이라는 문구였다고 한다. 어린 학생을 돈 몇 푼에 착취하는 듯한 문구에 자존심이 상해 어떤 경우에도 고위층을 설득해서 협상을 계속할 수 없었다고 했다. 어린 학생들이 경애하는 지도자에 대한 순수한 마음으로 바친 토끼털을 그렇게 오도해서 모욕하고 더 나아가 지도자마저 욕보였다는 사실에 격노했다고 한다.

필자가 이런 비화를 뒤늦게 털어놓는 것은 필자 역시 북한과의 합작공장 협상에 관여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필자가 개입한 범위 내에서는 북한의 의도와 시작은 진지했다고 확언할 수 있다. 당시 필자는 영국에서 모피 거래로 평생 잔뼈가 굵은 영국인 직원과 함께 스웨덴 스톡홀름의 북한 상무대표부를 방문해서 협상을 진행하곤 했다. 북한도 소련과 마찬가지로 해외 상무대표부를 대사관이 아닌 별도 사무실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스톡홀름 대표부는 놀랍게도 대표의 개인 집이었다. 대표부가 개인 집이라는 사실은 택시를 타고 가면서야 알게 되었다. 집 문 앞에 서서 필자가 주저하자 방문을 주선한 영국인 직원도 곤혹스러워했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서 돌아갈 수는 없는 상황이라 호랑이 아가리에 들어간다는 심정으로 북한 사람의 집에 들어섰다.

가슴 졸인 스톡홀름 북한 대표부 집 방문

당시는 유럽에서 한국으로 가는 항공기가 모스크바를 경유하는 줄 모르고 탔다가 보안법 저촉으로 치도곤을 당할 때였다. 아무 생각 없이 외국에서 사온 싸구려 우표 묶음 안에 북한 우표가 들어 있으면 몇 개월의 형무소 생활을 하던, 지금으로 생각하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었다. 북한 대표는 우리가 대표부의 상황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해서 굳이 말을 안 했다고 했다. 나중에 대화가 무르익어 당황했던 필자의 감상을 말하자 대표는 고소를 금치 못했다.

40대 후반의 북한 대표는 해외 생활이 십수 년째여서인지 영국식 발음의 영어가 유창했고 실무 협상에도 자신이 넘쳤다. 상세한 협상을 비롯해 수인사도 겸한 미팅이었다. 다음 협상을 어떻게 해야 할지까지 상의하고 헤어졌다. 그 만남에서 인상적이었던 몇 가지가 있었다. 북한 대표는 의도를 숨기고 협상을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끌고 가자는 태도가 아니었다. 대단히 진지하게 자신이 본부로부터 받은 북한의 합작 의도와 기본 구도를 진심으로 설명한 점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전까지 북한 측의 협상 태도에 관해 언론을 통해 들은 바와는 달리 단순하고 순수하게 자신들의 의도를 전하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다음은 개인적인 고민을 털어놓는 점이 놀라웠다. 당시 집 안에서 우리 주위를 스스럼없이 왔다갔다 하던 중학생 아들에 대한 걱정이었다. 자신이 북한으로 귀임하게 되면 해외에서 태어나 북한 생활을 한 번도 제대로 해보지 않은 아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묻지도 않은 개인적인 고민을 털어놓았다. 생면부지의, 그것도 적국인 남한에서 온 필자에게 한국말로 고민을 털어놓은 의도가 뭔지는 그때는 물론 지금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쁜 의도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자신이 진심을 털어놓아도 북한으로 말이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에 경계심을 내려놓았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추진되던 합작 협상은 기자의 특종 욕심으로 사라져 버리고 거의 1년 6개월 뒤인 1990년 6월 14일 한겨레신문에 관련 기사가 다시 실렸다. 5면 경제면 하단 1단 기사로 ‘진도, 북한 합작 추진 않기로’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진도는 13일 북한에 모피공장의 합작 건설을 검토했으나 제반 여건의 미성숙으로 추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공시했다”는 짤막한 내용이었다. 사안의 앞뒤 맥락을 모르면 상당히 생뚱맞을 기사였다. 진도로서는 주식회사 법에 따라 투자자들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주기 위한 후속 공지였고 이를 한겨레가 남북 관계 기사라고 다룬 것이었다. 결국 이렇게 해서 남북 관계의 역사적인 계기가 될 뻔했던 최초의 남북 합작공장 설립은 해프닝으로 종언을 고했다.

사안을 조금 더 살펴보면 특종 기사와는 다른 이야기들도 있다. 합작공장 설립을 북한이 먼저 제안했다고 동아일보 기사는 보도했지만 사실 시작은 진도 측의 주도가 단초가 되었다. 북한은 당시 소련 레닌그라드와 홍콩의 모피 경매시장을 통해 모피를 판매하고 있었다. 경매장에 가면 자연스럽게 북한 모피 관계자들과 조우하곤 했다. 특히 경매 시작 전 환영 리셉션과 경매 중 식당에서의 만남은 아무리 서로가 피한다 해도 피할 수가 없었다. 한두 번 지나치다 보면 결국 서로 낯이 익어 말문을 트게 된다. 특히 소련의 위성국이나 다름없던 북한은 판매하러 온 모피를 보다 좋은 가격에 많이 팔고 싶어 했다. 그래서 경매시장 측이 갑이고 북한이 을의 처지였다. 거기에 반해 진도는 많게는 경매 출품 모피의 60% 이상을 사는 최고의 바이어여서 항상 갑의 입장이었다. 말은 안 하지만 북한 측은 내심 진도 측 인사들 앞에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환영 리셉션을 시작할 때 경매시장 측 주요 인사와 함께 진도 측 직원이 주인공처럼 등장했으니 말이다.

결국 그렇게 낯이 익어 가다가 진도 측이 북한 담당자들에게 왜 우리가 레닌그라드까지 와서 굳이 경매시장을 통해 서로 수수료 주고 물건을 사고파는가라는 의문을 표시하면서 직거래가 시작되었다. 파는 북한 측과 사는 진도 측도 모두 수수료를 경매시장에 내고 거래를 하니 직거래를 하면 양측 모두에 이득이라는 이해가 맞아떨어졌다. 그렇게 해서 형식적으로는 홍콩의 모피중개상을 통해 남북한의 직거래가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진도 측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합작공장 제의를 받는 데까지 관계가 진전되었다. 직거래의 시작이 결국 합작공장의 영감을 북한 측에 준 셈이다.

북한이 팔던 ‘개울프’ 가죽 인기

북한은 당시 대규모 모피 농장을 운영했지만 대량의 모피를 생산할 능력이 없었다. 겨우 지방에서 소규모로 생산한 토끼털과 야생의 담비나 족제비를 전국적으로 수집해서 들고나왔었다. 심지어 식용으로 사용한 개가죽을 영어로 ‘개울프(Gaewolf)’라는 명칭으로 들고나와 팔기도 했다. 그래 봐야 1년에 수십만달러도 안 되는 금액이었지만 외화 부족에 시달리는 북한으로서는 대단히 큰 금액이었다. 특히 진도는 정책적으로 북한 토끼털과 개가죽을 많이 사주었다. 진도 경영주가 북한 평양 출신이어서 그런 배려도 있었다. 특히 다른 나라에서는 출품하지 않던 개털은 흡사 야생늑대 같아서 인기가 있었다. 동물보호 문제가 아직 심각하지 않았고 개털 코트의 저렴한 가격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북한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금액의 원피를 구매하는 세계적인 진도를 어떻게 하든 북으로 끌어들여 모피 관련 산업을 일으켜 보고자 노력했다.

당시 북한이 합작공장 설립을 먼저 제시한 배경에는 사실 진도의 소련 진출도 관련이 있었다. 북한은 한·소 수교가 임박했음을 예감한 상태였는데, 초조한 나머지 자신들이 소련보다 먼저 선수를 쳐서 합작공장을 추진하려는 욕심도 있었을 법하다. 진도의 소련 합작공장은 막 신설되기 시작하던 코퍼레이티브(coperative) 형태의 민간회사와 이루어졌지만 시작은 소련 농무성 주관으로 국가 공장과 진행했었다. 관료들이 개입되면서 협상이 지칠 정도로 질질 끌다가 결국 결정이 빠른 민간회사와 최종 협상이 이루어졌다.

농무성 산하 기관 공장과 협상을 하러 모스크바를 오가는 동안 북한 측에 우리의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노출되었다. 한번은 진도 측 인사 8명이 당시 외국인 전용 호텔인 메주나로드나야(Mezdunarodnaya) 호텔에 묵게 되었다. 로비에 앉아 담소를 하고 있다가 김일성 배지를 단 북한대사관 직원들에게 들켰다. 북한대사관 직원들이 오는지도 모르고 얘기하던 차에 한국말이 들렸다. 북한대사관 직원들도 자동으로 발걸음을 멈추고 의심에 찬 눈초리로 “동무들! 어디서 오셨소?”라고 물었다. 우리 일행 중 한 명이 “우린 미국 교포요!”라고 순간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 회사 내에서도 최고 비밀로 추진한 소련 방문이 여의도 증권가 ‘정보지’에 의해 기사화되어 북한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정보지가 어디서 그렇게 놀라운 정보를 얻어냈는지 모르지만 소련을 방문했던 우리 일행 숫자 8명까지 맞혔었다. 당시 미국 교포라고 우기고 현장을 벗어나서도 불안한 나머지 그날 저녁 우리 일행은 호텔 방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소련 농무성 차관과 회의 도중 전날 이야기를 했더니 차관의 반응이 걸작이었다. 그는 웃으면서 “북한과 관련되는 한 모스크바는 서울보다 더 안전한 곳이다. 서울에서는 그들이 당신들에게 해를 가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는 감히 그럴 생각을 못 한다. 우리 소련의 국가 손님으로 온 당신들을 감히 북한이 손을 대?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안심해라”라고 했다. 가만히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특히 ‘서울보다 모스크바가 더 안전한 곳이다’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역사에는 만일이라는 가정이 부질없다지만 그래도 가끔은 그때 협상이 잘 이루어졌더라면 남북 관계는 그 후 어떻게 발전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개성공단이 설립되기 15년 전에 진도의 기계와 원자재 그리고 핵심 기술자들이 북한에 들어가 모피제품을 쏟아냈다면 지금의 남북 관계는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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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하 재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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