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12일 조 바이든 당선인과 전화통화 후 기자회견 중인 스가 일본 총리. ⓒphoto 뉴시스
지난해 11월 12일 조 바이든 당선인과 전화통화 후 기자회견 중인 스가 일본 총리. ⓒphoto 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일·한 관계에 대해 파격적으로 말한 배경이 궁금하다.”

문 대통령의 지난 1월 회견 후, 한국에 관심 있는 일본인들로부터 이런 얘기를 듣고 있다. 올해도 대일 강경 발언이 나올 것으로 예상했던 이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의 진의(眞意)를 묻고 있다. 문 대통령의 회견 중 일본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크게 세 가지다.

일본이 주목한 기자회견의 세 대목

① “2015년도 양국 정부 간 위안부 문제 합의가 공식 합의였다는 점을 인정한다.”

② “(법원의 위안부 배상 판결은) 솔직히 좀 곤혹스러운 것이 사실.”

③ “강제집행 방식으로 그것(일본 기업 자산)이 현금화된다든지, 판결이 실현되는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발언은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의 행적과 비교해 보면 180도 대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일각에서 지난해 4·15총선을 ‘한·일전(戰)’으로 언급하며 반일감정을 선동했던 사실에 비춰 보면 놀라울 정도다.

문 대통령은 이번 회견 전까지 단 한 번도 2015년 합의의 의미를 인정한 사실이 없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위안부 합의에 대한 검토를 지시했다. 이에 따라 만들어진 ‘한·일 위안부 합의 검토 TF’는 전례 없는 권한을 갖고 마치 수사기관처럼 외교 협상의 비밀 서류를 모두 들여다봤다.

TF는 약 6개월간의 활동 후 2017년 12월 발표한 검토 결과 보고서에서 “피해자 중심적 접근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고 일반적인 외교 현안처럼 주고받기 협상으로 이뤄졌다”며 합의를 폄하했다. “조약이 아니라 정치적 합의”라고도 했다. TF는 당시 한·일 양국이 비공개한 부분도 전격 공개, 논란을 일으켰다.

문 대통령은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이같이 언급했다. “2015년 한·일 양국 정부 간 위안부 협상은 절차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중대한 흠결이 있었음이 확인됐다. 이 합의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을 다시금 분명히 밝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2018년 1월 청와대에서 열린 위안부 피해자들과 간담회에서는 더 강하게 이를 비판했다. “(2015년) 합의는 진실과 정의의 원칙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정부가 할머니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추진, 내용과 절차 모두 잘못됐다.” “할머니들 뜻에 어긋나는 합의를 한 것에 대해 죄송하고 대통령으로서 사과드린다”고도 했다. 이때부터 위안부 합의는 ‘사실상 파기’된 것으로 간주됐다. 이후 어떤 공무원도 위안부 합의에 대해 의미를 부여할 수 없었다.

일본에서는 ‘진실과 정의에 어긋나고 일방적으로 추진돼 중대한 흠결’이 있는 것으로 규정된 합의가 갑자기 평가받는 데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문 대통령이 유화(宥和)적인 입장을 밝혔지만 일본 정부의 분위기는 싸늘하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 관저와 외무성은 문 대통령이 한·일 화해를 바라는 바이든 미 행정부 출범에 맞춰 실행력 없는 언급을 했다고 판단한다.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남북대화를 재개하기 위해 일본을 이용하려 한다고 의심하고 있다.

문 대통령이 위안부 합의를 공식합의라고 뒤늦게 추켜세움에 따라 이는 일본 정부에 역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일본은 그동안 위안부 합의에 대해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는 입장을 국제사회에 강조해왔다. 스가 내각은 앞으로 국제사회에서 문 대통령의 이번 발언을 강조해가며 위안부 문제가 종식됐다는 입장을 더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신년 회견 이후, 외교부가 위안부 합의 수습책을 구상하면서 일본 정부로부터 받은 10억엔(약 107억원) 처리 문제가 다시 부상하고 있다. 지난 1월 도쿄에 부임한 강창일 주일대사는 “일본에서 출연한 기금이 남아 있다. 돈을 합쳐 양국 정부가 진지하게 (새로운) 기금을 만드는 일에 대해 얘기해야 한다”며 이를 공식 제기했다.

일본에서 제공한 10억엔 중 약 4억엔은 피해자들이 이미 수령했다. 합의 당시 위안부 피해자는 46명이었는데 1년 내에 31명이 모두 1억원씩 지급받았다. 사망한 위안부 피해자 199명의 유족 중 일부에게도 2000만원이 지급됐다. 이렇게 사용하고 약 60억원이 남아 있는 상태다. 하지만 이 기금 관리와 위안부 피해자 및 유족 지원 사업을 맡았던 화해치유재단은 2019년 해산됐다. 문 대통령이 2018년 9월 뉴욕에서 아베 신조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화해치유재단 해산 입장을 통보하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 합의에 따라 10억엔을 전달, 모든 책임이 끝났다는 입장이어서 새로운 기금을 만드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관측이 많다.

지난 1월 18일 신년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 ⓒphoto 뉴시스
지난 1월 18일 신년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 ⓒphoto 뉴시스

대통령의 ‘재판 개입’ 아니냐

문 대통령의 신년 회견은 한국 내에서도 논란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는 위안부 판결에 대해 ‘곤혹스럽다’고 하고, 억류된 징용 기업 자산 현금화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이는 사실상 문 대통령의 ‘재판 개입’으로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전 정권 당시 외교부가 징용 문제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법원에 설명한 것에 대해 ‘사법 농단’ 으로 몰아서 처벌을 추진해왔다. 그동안 한국은 삼권분립 국가라며 징용 배상 판결에 대해 “재판부 판결을 존중해야 한다”고 수차례 강조해왔다.

김진표 한·일의원연맹 회장(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11월 “한국 대법원이나 법원행정처도 아마도 한·일 관계가 파국으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고 해 논란이 일었다. 문 대통령의 표변(豹變)은 김 회장의 발언보다 더 구체적이고 영향력이 크다는 점에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주목된다.

마침 지난 1월 위안부 손해배상 사건에 이어서 열릴 예정이던 다른 위안부 소송은 갑자기 연기된 상태다. 두 사건은 사실상 같은 사건이기에 다시 위안부 승소 판결이 나올 것으로 예상됐으나 재판부가 시간이 더 필요하다며 연기했다. 문 대통령의 ‘재판 개입’ 발언이 나온 상황에서 법원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 관심을 끌고 있다. 위안부 관련 단체 등에서 문 대통령의 발언에 반발하는 기류가 나오는 것도 정치적 변수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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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원 조선일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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