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출간된 시부사와 에이이치 관련 서적들.
일본에서 출간된 시부사와 에이이치 관련 서적들.

메이지(明治) 시대의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 자본주의 아버지’로 불린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가 부활한 것 같은 분위기다. 일본엔 요즘 19세기 말부터 은행, 주식회사, 증권거래소를 도입하고 500개의 회사를 만들어 일본 경제의 기틀을 만든 시부사와 열풍이 거세다.

올해 들어 일본 언론 중에서 사망한 지 90년이 된 시부사와를 특집으로 다루지 않은 매체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지난 2월 8개 면에 걸쳐서 그의 업적을 다루는 이례적 기획을 했다. 마이니치신문은 ‘시부사와 에이이치를 걷는다’는 연재를 통해 그와 관련이 있는 지역을 잇달아 소개하고 있다. 요미우리신문은 그의 일생을 담은 만화 광고를 1개 면에 걸쳐 싣기도 했다. 서점에는 ‘시부사와, 사회기업가의 선구자’ ‘시부사와 에이이치를 알게 되는 사전’ 등의 관련 책이 독자들의 주목을 받는 곳에 진열돼 있다.

1만엔권에 새로 등장하는 인물

메이지 시대에 주로 활약했던 그를 다시 불러낸 것은 자민당 정권과 NHK 방송이다. 자민당 정권은 2019년 4월 나루히토(德人) 새 일왕의 레이와(令和) 시대에 맞춰 화폐 인물을 모두 교체한다고 발표했다. 1만엔과 5000엔, 1000엔짜리 지폐에 들어가는 인물을 2024년부터 모두 바꾸기로 한 것이다.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새로운 연호(年號) 사용에 따른 새로운 지폐 사용을 언급하며 “메이지 시대 이후의 문화인을 선택하겠다는 생각에 근거해 (새 인물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이 중에서 가장 큰 관심을 끈 것은 1만엔권에 등장하는 메이지 시대의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를 대신하는 시부사와였다. 그는 현재의 시각에서 볼 때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일본 경제에 큰 업적을 남겼다.

시부사와는 도쿠가와(德川) 막부가 무너지기 직전인 1867년 만국박람회가 열리는 프랑스 파리를 방문해 큰 충격을 받았다. 산업혁명과 상공업의 중요성을 깨달은 그는 메이지 정부의 대장성(大藏省·현 재무성)에서 5년간 일하다가 사직했다. 상공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은행이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일본 최초의 은행인 제일은행(현 미즈호은행)을 설립했다. 조세·회계·화폐 제도의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증권거래소를 만들었다. 방직·철도·비료·가스 등 다양한 분야에서 500개의 회사를 만들어 일본 경제의 발판을 마련했다. 일본 최고의 호텔로 꼽히는 제국호텔과 도쿄 전철, 삿포로 맥주도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

제일은행과 500개 회사 세워

시부사와가 단순히 돈을 많이 번 기업가라면 1만엔권 화폐에 등장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논어(論語)’에 기반을 둔 건전한 상업윤리를 강조해 ‘경제보국(經濟報國)’ 정신을 확산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도덕과 경제는 서로 반(反)하는 것이 아니라 수레의 두 바퀴처럼 서로 의지하며 굴러가야 진정한 자본주의가 완성된다”고 주장했다. 숱한 기업을 만들었지만 주식회사의 진정한 개념에 근거해 자신의 것으로 사유화하지 않았다. 그의 저서 ‘논어와 주판’은 자본주의 윤리를 일본화한 대표 저작으로 꼽힌다. 인재 교육과 주변 환경 정비도 관심을 갖고 평생에 걸쳐 추진했다.

그가 파리를 둘러보고 구상했던 부채꼴 모양의 전원도시는 도쿄도 오타(大田)구의 덴엔초후(田園調布)역 주변에 조성돼 있다.

NHK 방송은 자민당 정권이 시부사와를 새 1만엔권 지폐 모델로 결정한 후, 그를 간판 프로그램인 일요 대하드라마에 등장시키기로 했다. NHK 방송은 지난 2월부터 그를 소재로 한 드라마 ‘푸른 하늘을 찔러라(靑天を衝け)’를 매주 일요일 저녁 8시 황금 시간대에 방송 중이다.

NHK 대하드라마는 일본 사회에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메이지유신 150주년인 2018년에는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했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방영됐다. 러일전쟁을 소재로 한 시바 료타로(司馬 遼太郎)의 ‘언덕 위의 구름’은 2009년부터 3년에 걸쳐 방송되며 큰 화제가 됐다.

일본 사회는 NHK가 일본이 비약적으로 성장했던 1970~1980년대에 비해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위축된 상황에서 시부사와를 들고나오는 데 주목하고 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세계의 조류를 제대로 파악해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시부사와의 기개(氣槪)를 젊은 층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의지가 반영됐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은 1990년대 초 거품경제 붕괴 이후 지금까지 ‘성장상실기 30년’을 거쳐오면서 정치·경제·언론의 리더십 결핍에 직면해 있다. 그런 결핍 상황에서 도덕률의 기업가정신을 강조한 시부사와라는 인물을 의지처로 부상시켜 자신감을 심어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국중호 요코하마시립대 경제학과 교수)

문제는 한국의 입장에서 일본에서 일고 있는 시부사와 붐을 마음 편하게 바라볼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일제가 부국강병책의 일환으로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 때 그가 경제 침탈의 첨병으로 나섰던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일제 경제 침탈의 첨병 역할도

시부사와는 1902년 메이지 정부가 조선에서 쓰이는 화폐 발행을 허가했을 때 10원, 5원, 1원짜리 화폐에 등장해 한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일본 제일은행을 창업했던 그가 자신의 얼굴이 들어간 화폐를 조선에 유통한 것이다. 이는 그의 가장 큰 실책 중의 하나로 기록돼 있으며 한국 사회에 부정적 이미지를 깊이 각인시켰다.

그는 일본에서처럼 한국에서도 철도·무역과 관련된 각종 회사를 설립해 일제의 식민정책을 지지하는 역할을 했다. 한국에서 전력산업을 장악할 목적으로 가스·전기·전차를 공급하는 일한와사전기주식회사(日韓瓦斯電氣株式會社)를 설립한 것이 대표적이다.(와사(瓦斯)는 일본어로 가스를 의미한다.) 이 회사는 경성전기로 개명돼 현재 한국전력의 전신이 됐다. 그의 경력 중에 경성전기 사장이 기록돼 있는 것은 이런 이유다. 한국전력이 2017년 도쿄에서 시부사와 에이이치 기념재단과 양해각서를 체결한 것은 그와 한국과의 복잡한 관계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시부사와의 업적이 부각될 때 그의 식민지 관련 역할도 숨김없이 재조명되기를 바라나, 이런 소망이 이뤄지기는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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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원 조선일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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