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바오와 모친 양즈윈 여사. ⓒphoto 오문도보(澳門導報)
원자바오와 모친 양즈윈 여사. ⓒphoto 오문도보(澳門導報)

지난 4월 원자바오(溫家寶) 전 중국 총리의 글이 중화권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작년 말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그의 글은 마카오 언론에 실려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렸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의 글이 중국 국내에서 배포 및 공유 금지를 당했다는 점이다. 중국 전직 총리가 공산당에 의해 입에 ‘재갈이 물린(被上嘴套·독일 방송사 도이체벨레(DW)의 표현)’ 이 사건이 더욱 큰 화제를 몰고 왔다.

국내외 언론은 원 전 총리의 글에서 ‘자유(自由)’라는 단어가 문제가 되어 배포 금지를 당했을 것으로 추정 보도했다. 그러나 그의 글을 찬찬히 읽어보면 단지 그 문제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원 전 총리의 글은 행간(行間)에 정치적 메시지를 숨겨두었고 그것이 중국 사회에 널리 퍼지는 경우 큰 ‘정치적 파장’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점을 간파할 수 있다. 전직 총리마저 마음놓고 자기 글을 발표할 수 없는 중국에서 ‘원자바오 필화(筆禍) 사건’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글의 전문을 찬찬히 뜯어보며 파헤쳐보기로 한다. 그의 ‘사모곡’은 한 가족의 얘기지만, 동시에 근현대로 이어지는 중국 역사의 축소판이란 점에서 중국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8년 침묵 깬 원자바오 전 총리

원자바오는 후진타오 집권기(2002~2012) 10년간 2인자였다. 총리 재임 기간 그는 후 주석을 도와 경제·사회 등 실무에 집중했을 뿐 특별히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2013년 초 퇴임 이후에도 조용히 살았다. 지난 8년간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그가 올 3월 25일부터 4월 15일까지 마카오에서 발행되는 잡지 ‘오문도보(澳門導報)’에 글을 실으면서 별안간 뉴스의 인물로 떠올랐다. 글의 제목은 ‘나의 어머니(我的母親)’였다. 중국에서 조상을 기리는 청명절을 맞아 어머니를 회고한다는 뜻으로 ‘청명추억(淸明追憶)’이란 문패도 달았다. 매주 한 번씩 일(一), 이(二), 삼(三), 사(四)로 번호를 붙여 4주 연속으로 글을 게재했다. 원 전 총리의 어머니 양즈윈(楊志雲·1921~2020) 여사는 작년 12월 9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어머니가 가셨다. 우리를 떠났고, 인간 세상을 떠났다. 자신을 낳고 기른 그 흙으로 돌아가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살아계신다. 어머니는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으며, 그가 깊이 사랑했던 학생들 속에 살아 있으며, 그가 그리워했던 고향의 친척들 속에 살아 있다.”

원 총리의 글은 어머니의 삶에 대한 회고로 이어진다. 양즈윈 여사는 1921년 음력 11월 14일 톈진(天津) 북쪽 교외 이싱부(宜興埠)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농촌에서 작은 약방을 운영하는 의사였고 모친은 가정주부였다. 이싱부는 역사적으로 군사적 요새(要塞)여서 근대 이후 수많은 전란에 시달렸다. 그곳에선 주로 수수와 마, 향초(香草) 등을 재배했으나 생산량이 적어 주민들은 겨우 입에 풀칠만 했다고 한다. 원 전 총리는 당시 생활고를 노래한 민요를 소개했다.

‘흙집에 살고, 아궁이에서 자며, 남자는 장사하러 나가고, 집에는 쌀도 국도 없네. 아이는 배고프다 울고, 여인은 눈물만 그렁그렁. 마(麻)를 옥수수와 바꿔, 겨우 허기만 면하네.’

전쟁과 고난의 시대 헤쳐온 원자바오의 어머니

1936년 약국을 하던 양 여사의 부친(원 전 총리의 외할아버지)이 돌아가시자 생활은 매우 어려워졌다. 게다가 중국 대륙을 본격 침략하기 시작한 일본군이 톈진 이싱부 동남쪽에 임시 비행장을 건설하면서 수많은 농민이 논과 밭을 잃었다. 1937년 양 여사는 소학교 교사인 원강(溫剛·원자바오 전 총리의 부친)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결혼했다. 이듬해 낳은 첫아들은 1년도 살지 못하고 죽었다. 1942년 둘째 아들을 낳았다. 귀하게 얻은 자식이라 ‘집안의 보배(家寶)’라고 이름 지었다. 원자바오 전 총리다. 1948년 국공내전의 막바지에서 수세에 몰린 국민당군이 톈진 지역의 공산군 근거지를 없애기 위해 70여개 마을 14만 가옥을 불태웠다. 원 전 총리 부모의 집과 약국, 소학교도 불탔다.

양 여사는 전란 속에 시댁 어른과 자식을 돌보고 약국을 다시 일으키느라 가장 힘든 시기를 보냈다.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소학교와 중학교 교사도 하고 간호사로도 일했다. 공산정권 수립 후인 1954년 집을 떠나 서부 간쑤성(甘肅省)에서 교사로도 일했다. 당시 12세로 중학교에 진학한 원 전 총리는 저녁식사를 직접 준비해야 했다. 옥수수 고깔빵과 죽 요리를 그때 배웠다고 한다. 당시 3살이었던 여동생은 고모집으로 보내 키웠다. 그 후 어머니는 고향에 돌아와 톈진 동문안(東門裡)소학교에서 국어교사 겸 담임을 맡았다. 당시 어머니의 제자였던 순슈팅(孫秀庭)은 “양 선생님은 기초를 철저히 가르치셨고 지식뿐만 아니라 사람됨(做人)의 도리와 일 처리의 규칙도 은연중에 알려주셨다. 정의로운 일을 위해 몸 바쳐 싸워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는 정신을 선생님께 배웠다”고 회고했다.

다음은 원자바오 전 총리의 글을 축약한 것이다.

내(원자바오)가 어릴 때 살던 집은 톈진시 시먼리(西門裡) 달마암(達摩庵) 앞 골목길의 단칸 셋방이었다. 방세는 8원(元)이었다. 40여년을 그 집에서 살았다. 어머니는 집안에 경사가 있는 날이면 이웃에 국수를 한 그릇씩 돌렸다. 처음엔 “지식 있는 가족이 이사 왔다”며 경계하던 이웃들이 문화대혁명이 닥쳤을 때 우리 가족을 감싸주었다.

평생 검소하게 산 어머니는 옷을 깁고 또 기워 가족들에게 입혔다. 중학 시절 어머니가 처음으로 헝겊 신발(布鞋)을 사주셨다. 나는 새 신발을 신고 등교했으나 하굣길에 폭우가 쏟아졌다. 신발이 상할까봐 가슴에 안고 맨발로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어머니가 달려나와 비에 흠뻑 젖은 나를 품에 안으셨다. 빗속에서 어머니 얼굴을 쳐다보니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눈물과 빗물이 함께 흘러내렸다.

문화대혁명의 재앙이 원자바오 가족에 닥치다

아버지는 일생 고난과 굴곡의 삶을 사셨다. 아버지는 거칠고 험한 세상에서 가족을 지키며 조용히 살기를 바랐지만, 정치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는 없었다. 1959년 ‘간부심사’에서 아버지는 ‘역사 문제’로 교사직을 떠나 농장에서 노동을 해야 했다. 1960년대 중반 문화대혁명의 재난이 우리 집에 닥쳤다. 아버지는 조반파(造反派·문화대혁명 지지파)에 끌려가 학교 안에 갇혔다. 대자보가 우리 집 대문에서 골목길까지 나붙었다. 밤중에 이웃들이 몰래 대자보를 떼어냈다. 아버지는 학교에서 수시로 야만적인 심문과 구타, 욕설을 당했다.

하루는 홍위병들(어린 제자들)이 주먹으로 아버지 얼굴을 때려 눈이 퉁퉁 부어올라 물건을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버지는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손으로 명치를 가리키며 “꼬마야, 이곳을 때려봐”라고 외쳤다. 1970년 가족 전체가 내몽골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그 후 톈진시 북쪽 교외 공장에서 6년 동안 노동을 했다. 사인방(四人幇) 분쇄 이후 아버지는 톈진 북부 이싱부의 96중학으로 옮겨 교원이 되었다. 1978년 11월 5일 톈진시 허베이(河北)구 교육국은 아버지의 정치·역사 문제에 관한 번복(飜覆) 의견서를 내고, 문화대혁명 기간의 심사에서 새로운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판정했다. 1979년 6월 26일 교육국은 다시 1958년 아버지의 ‘사용(활동)제한에 관한 의견’을 취소(복권(復權)을 의미)했다.

아버지는 1986년 퇴직하셨다. 퇴직 후에는 고시(古詩)나 신문의 좋은 글을 옮겨 쓰며 슬픈 마음을 달래곤 하셨다. 아버지는 다소 고집이 있지만, 항상 가족을 생각하며 보통 사람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참았다. 그런 아버지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어머니셨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아버지 마음속의 생각과 감정을 유일하게 살필 수 있는 사람이 어머니셨다. 어머니는 한 번도 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없다. 오히려 항상 아버지를 위로하고 살뜰히 보살피셨다. 부모님은 함께 곤경을 헤치고 서로 도우며 75년을 사셨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남기신 게 없다. 자신이 겪은 고난과 고통, 그리고 사랑을 모두 안고 가셨다.

외로운 나무는 숲을 이루기 어렵다

어머니는 고서(古書)를 애독하셨다. 악비(岳飛), 문천상(文天祥), 제갈량(諸葛亮) 같은 역사 인물 얘기를 늘 해주셨다. 어머니는 또 업적을 쌓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내가 대임(大任·총리직)을 맡았을 때 어머니가 보내신 편지 두 통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2003년 11월 총리를 처음 맡았을 때 보내신 첫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너는 오늘 인민의 신하가 되었다. 이렇게 높은 자리는 기댈 곳이 없단다. (중략) 너의 성격은 완벽을 추구하지만, 국가는 크고 인구는 많으니 완벽을 기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나에게 “서로 통하고, 서로 화합하는 사람이 되어라. 외로운 나무는 숲을 이루기 어렵다(孤樹難成林)는 점을 꼭 기억해라”고 당부하셨다.

2007년 10월 두 번째 총리 임기를 앞두고 보내신 두 번째 편지는 이렇게 되어 있다. “지난 5년의 성취는 너의 심혈(心血)과 바꾼 것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앞으로 5년의 업무도 힘들고 복잡할 것이다. 계속 이어가거라. 말처럼 쉬운 건 아니다. 경제는 얼마나 복잡하냐. 효과를 내는 것이 절반에 그치더라도, 하늘과 땅에 감사해라. 네 한 사람의 어깨로 다 짊어질 수 있겠느냐. 그러니 함께 헤쳐나가야 하고(同舟共濟), 5년의 난관을 착실하게 건너야 한다.”

2009년 2월 2일 내가 영국을 방문해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강연할 때 갑자기 한 학생이 큰소리로 외치며 나를 향해 신발을 던졌다. 나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흔들림 없이 냉정을 유지했다. 회의장이 수습된 뒤 연설을 마치자 큰 박수가 쏟아졌다. 나는 몰랐지만, 그 시각 집에서 TV로 아들의 연설을 지켜보던 어머니는 충격을 받으시고 뇌혈관 경색이 왔다. 그때부터 어머니의 시력이 나빠지고 말하는 것도 곤란을 겪었으며 걷는 것도 불편해졌다.

나는 중난하이(中南海·자금성 옆에 있는 중국 최고지도부 업무 및 거주지)에서 28년 일했고 그중 10년을 총리로 재직했다. 나 같은 (빈한한) 가정 출신으로서 ‘벼슬을 한다는 것(做官)’은 우연의 일이다. 명령을 받들어 오직 성실하고(奉命唯謹), 살얼음을 밟듯 깊은 물을 만난 듯 조심할 뿐이다(如履薄氷 如臨深淵). 퇴직 후 어머니 곁으로 돌아와 기뻤지만, 나날이 병세가 나빠지는 걸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누가 말했던가, 한 치의 풀 같은 마음으로 봄볕처럼 따스한 부모 은혜를 갚을 수 있다고(誰言寸草心 報得三春暉·唐 시인 孟郊의 遊子吟의 한 부분).” 어머니의 사랑과 은혜는 갚을 수 없다. 어머니의 가르침은 나의 세포와 혈액 속에 녹아 있다. 사람 사이의 많은 일은 모방할 수 있지만, 진실되고 선량한 감정과 영혼은 거짓으로 지어낼 수 없다. 그의 눈을 보기만 하면, 그의 동정심, 그리고 위기 속에서 내는 용기, 국가 미래 운명이 갈리는 결정적 시기에 그가 감당하는 정신을 본다면, 그의 진실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가난한 사람과 약자를 동정하고, 기만과 모욕, 압박에 반대한다. 내 마음속의 중국은 마땅히 공평과 정의가 충만한 나라이다. 그 나라 안에는 영원토록 사람의 마음(人心)과 사람의 도리(人道), 그리고 사람의 본질에 대한 존중이 있다. 영원토록 청춘과 자유, 분투의 기질이 있다. 나는 이를 위해 소리쳤고 분투했었다. 이는 생활이 나에게 깨우쳐준 진리이자 어머니가 전해준 진리이다.

원자바오 글은 사실상 정치투쟁의 ‘대자보(大字報)’

이상이 원자바오 ‘나의 어머니’의 핵심 내용이다. 이 글은 최소한 3가지 목적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글로 남겨두려는 목적이다. 어머니 양즈윈 여사에 대한 원 전 총리의 그리움은 각별했던 것 같다. 소낙비가 쏟아지는 날 비를 맞고 돌아올 아들을 걱정해 집 밖에서 기다리다 새 신발을 가슴에 안고 돌아오는 아들을 보며 눈물지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히 묻어난다. 둘째는 자신과 가족에 대한 세간의 오해를 풀려는 목적이다. 원 전 총리 가족은 2012년 뉴욕타임스(NYT) 보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NYT는 당시 원자바오 가족이 주식과 부동산, 귀금속, 리조트 등 최소 27억달러(약 3조원) 규모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가 얼마나 정확한지는 알 수 없지만, 원자바오는 그동안 쌓았던 ‘서민 총리’의 이미지를 한꺼번에 날려버렸다. 원 전 총리가 ‘나의 어머니’에서 양즈윈 여사와 가족들이 단칸 셋방에서 수십 년간 검소하게 살았던 일을 자세히 회상한 것도 자신에게 덧씌워진 부정적 이미지를 씻어내려는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목적뿐이었다면 원 전 총리는 국민의 망각 속에서 조용히 사는 편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그가 정치적 부담을 안고 마카오 언론에 4회의 글을 연재한 데는 그 이상의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즉 지금 발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역사적 사명’ 같은 것이 그에게 있었던 것 같다. 필자가 판단하기에 그것은 ‘시진핑 장기집권 기도에 대한 국민의 각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원자바오는 이런 의도를 글의 여기저기에 흩어놓았다. 하지만 예민한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그 의도를 눈치챘으리라 본다.

원자바오는 글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지금을 ‘국가 미래 운명이 갈리는 결정적 시기’라고 암시했다. 글의 문맥상 어머니의 순수한 사랑을 얘기하다가 갑자기 ‘국가의 미래 운명’으로 건너뛴 것은 의도적으로 넣은 것으로 봐야 한다. 국가의 운명이 갈리는 시기란, 공산당 집단지도체제가 무너지고 과거 마오쩌둥(毛澤東) 시기와 같은 시진핑 일인 장기독재체제로 전환될 위기를 암시한다. 원자바오가 자기 마음속의 중국을 ‘공평과 정의가 충만한 나라’ ‘사람의 도리, 사람의 본질에 대한 존중’이 있는 나라라고 언급한 것도, 시진핑 시대 들어 그러한 소중한 가치와 희망들이 무너졌음을 시사한다. 이어 원자바오는 ‘기만과 모욕, 압박’을 지적했다. 시진핑이 권력을 잡기 전 당 지도부에 했던 약속을 파기하여 전직 지도자들을 ‘기만’했으며, 자신의 장기집권에 반대하는 많은 전직 지도자들에게 ‘모욕’을 주고 ‘압박’을 가하고 있다는 점을 호소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중국 국민에게 앉아 있지 말고 분투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중국은 ‘청춘과 자유, 분투’가 있는 나라이고, 자신도 이를 위해 분투했다면서, ‘정의로운 일을 위해 몸 바쳐 싸워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는 정신’을 발휘할 때라고 질타하고 있다. ‘청춘’과 ‘분투’는 1989년 천안문(天安門) 민주화 시위를 연상시킨다. 과거로 치면, 원자바오의 기고문은 사실상 정치투쟁을 위한 장문의 ‘대자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를 중국 일반인뿐만 아니라 리커창(李克强) 현 총리와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 쩡칭훙(曾慶紅) 전 국가부주석 등 원로들에게도 촉구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계파로 갈라져 대립할 때가 아니라 국가의 미래 운명을 위해 ‘소리치고 분투해야’ 할 시기라는 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 민감한 정치 메시지를 전달할 때는 이중적 해석이 가능한 표현으로 빠져나갈 여지를 남겨둔다. 원자바오의 글에서 민감한 부분들도 표면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상대방이 공격을 해와도 “순수한 의도를 왜곡하지 말라”고 맞받아치면 된다. 하지만 ‘이중적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많은 것을 암시한다. 중국인들은 이런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챈다. 따라서 이 글이 중국 내에 널리 퍼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 시진핑 세력엔 결코 득 될 게 없다. 전직 총리의 글에 ‘웨이신(微信) 공중 플랫폼 운영규범’ 위반이란 딱지를 붙여 공유를 차단한 이유다. 앞으로 원자바오 일가에 대한 권력의 감시와 압박이 거세질 것으로 예상된다. 베이징 중난하이 위로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다.

지해범 전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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