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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4호] 2021.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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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다른 인류사]다른 듯 같은 운명, 가야와 로마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2021-06-29 오전 8:53:17

▲ 시리아의 탈 아퀴브린 지방에 남아 있는 로마 시대에 건설된 도로. 로마인들은 정복지 어디에나 지금까지도 남아있을 정도로 튼튼하고 넓은 도로를 닦았다. photo. Bernard Gagnon 작품, Creative Commons License,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ncient_Roman_road_of_Tall_Aqibrin.jpg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있다. 로마는 해외에 많은 식민지를 개척해 거기서 자국으로 향하는 육지와 바다의 길들을 닦았다. 그 길을 따라 이집트 나일강 유역 평야의 곡식, 알프스와 북아프리카 산지의 목재, 이베리아 반도와 가울 지방의 금과 은, 브리튼의 철과 납, 근동 지방의 수공예품 등등 지중해를 둘러싼 지역 전체에서 당시 가치가 있다고 간주됐던 재화들이 로마로 흘러 들어갔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라는 말도 있다. 그 정도 식민지를 경영할 내공이라면 오랜 세월이 걸려 축적됐을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로마의 시작은 트로이 전쟁이 끝난 직후인 기원전 11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트로이의 패장인 아에네아스가 일족을 이끌고 폐허가 된 고향을 떠나 이탈리아 티베르 강 하구에 정착했는데, 그 후손이 로마의 주민이 됐다고 한다. 기원전 6세기에는 도시국가인 로마 공화국을 형성했다.
   
   남의 나라 역사에 대해서는 이렇게 확실히 말할 수 있으면서 정작 우리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거나, 왜곡되었을 게 거의 확실한 사료에만 의존해야 하는 건 참 슬픈 현실이다. 고대 로마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번영하고 비슷한 시기에 스러져간 나라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사실, 그 두 나라가 여러 모로 비슷한 점이 많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는 사람이 없는 듯하다. 다름 아닌 가야, 그 중에서도 낙동강 하구에 자리잡았던 가락국이다.
   
   
▲ 로마와 가락국의 지리적 위치. 로마는 아펜니노 산맥에서 흘러나온 티베르 강 하구 유역에 자리잡아 지중해를 마주했고, 가락국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배후지로 낙동강 하구 유역에 자리잡아 동아시아 바다를 마주했다. 지도 출처: Giorgi Balakhadze 작, Wikimedia Commons.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Relief_map_of_Eurasia.png)의 지도를 바탕으로 이진아 작성

   위 지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로마와 가락국은 각각 유라시아 대륙 서쪽과 동쪽에 자리잡아 멀리 떨어져 있지만, 지리적인 유사성이 많다. 둘 다 반도라는 점, 큰 산맥에서 발원한 긴 강의 하구에 자리잡았다는 점, 따라서 기후가 온난한 시기엔 바다로 진출하기 좋은 여건이라는 점 등이다.
   
   고대에 있어서 큰 사회의 터전이 되었던 산기슭 평야의 크기나 생산성으로 보자면, 가락국 쪽이 로마보다 훨씬 유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락국은 로마의 배후산지인 아펜니노 산맥보다 평균 고도가 더 높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으로 둘러 싸여 있고, 따라서 거기서 발원하는 낙동강도 로마의 티베르강보다 25% 정도 더 길고 유역면적은 35% 더 넓다. 더 큰 규모의 사회가 발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해양국가로서의 발전 가능성과 관련해서는 일장일단이 있었을 것 같다.
   
   로마는 지중해에 자리잡고 있고, 지중해는 바닷물이 얕고 잔잔해서 인류 정착과 함께 해양 교류가 있어왔던 곳이다. 서기 1세기, 지중해를 뺑 둘러 해안지역은 거의 모두 로마의 영토가 됐다. 이때부터 로마인들은 지중해를 ‘마레 노스트룸(Mare Nostrum)’, 즉 ‘우리 바다’라고 부르며, 자기네 앞마당처럼 누비고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지중해 해역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았다. 지중해 중에서도 아시아로 가는 관문인 흑해 연안과 소아시아 쪽은 로마와 적대적인 대국들이 있어 더 동쪽으로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로마 전성기였던 기후변화 온난기 중에는 지브롤터 해협을 벗어나기가 매우 어려워서 유럽 북쪽이나 아프리카 쪽으로는 해상 활동이 있었다 해도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 배의 모습은 같은 용도라도 활동하는 환경에 따라서 크게 차이가 난다. 위 두 그림은 둘 다 전투와 정복이 주 목적이었던 전함으로, 왼쪽은 서기 9~11세기에 활동하던 바이킹의 배, 오른쪽은 서기 1~3세기에 활동하던 로마의 배다. 북유럽의 좁은 피요르드 만을 통과해서 나와 비교적 소수의 인원으로 긴 항해를 해야 했던 바이킹의 배는 선체가 좁고 날렵하며 큰 돛을 달아 바람과 해류의 힘을 최대한 이용하는 구조를 갖는다. 반면 바람과 해류가 약한 지중해역을 움직일 때, 많은 노예의 힘으로 노를 저어 속력을 내야 했던 로마의 전함은 선체가 크고 평평하며 돛이 작고, 노를 젓는 칸이 3단으로 되어 있다. 가야의 배들은 이 두 배의 중간 형태가 아니었을까? 사진 출처: (왼쪽) Creative Commons, Geir Are Johansen 작품, https://www.flickr.com/photos/lofotr/4563532483 , (오른쪽) Wikimedia Commons, Rama 작품,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Trireme_1.jpg

   가락국의 해양활동 패턴은 좀 달랐다. 동남아시아와 한반도를 잇는 거대한 바닷물의 흐름인 쿠로시오 해류 및 그 지류 때문이다.
   
   이웃 국가인 중국과는 그 지류와 연안류 덕분에 쉽게 왕래할 수 있었다. 이 점은 지중해 해역에서와 유사했거나 좀 더 항해 속도를 낼 수 있었을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그 흐름을 가로질러 가야했기 때문에 항해술이 한층 더 발달하고, 가락국으로서 그곳에 가야 할 절실한 이유가 생겼던 3세기에 이르러서야 원활히 항해할 수 있었다.
   
   대신 적어도 동남아시아, 멀리 잡으면 인도를 넘어 아라비아 반도, 심지어 아프리카까지의 긴 항해는 엄청난 해류의 에너지를 타고 가는 것이어서 로마에 비해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해안선을 따라가는 뱃길엔 로마와는 달리 막혀 있는 곳이 없다.
   
   애석하게도 이런 장거리 해양교류에 대해서는 역사적 기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있다 하더라도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왔던 가락국 수로왕과 아유타국 허황옥 공주에 대한 대목처럼 진지한 역사 탐구의 대상으로서는 외면 당해왔다.
   
   하지만 썩지 않고 남아 있는 유물들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예를 들면 그 해로를 따라 발굴되는 도자기 유물에서 보이는 유사성이나, 그보다 더 오래 전 유물인 고인돌의 분포 패턴 같은 것들이다. 최근에는 세계 규모의 게놈 지도가 밝혀지면서 이 길을 따라 인류가 이동한 경로가 확인되기도 한다. 이런 흔적들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면 좀 더 자세히 얘기할까 한다.
   
   반도라는 공통점은 로마와 가야가 모두 대륙으로부터의 영향과 바다 건너로부터의 영향을 흡수해서 발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예를 들면 로마는 지중해역에서도 철기 제작에 앞선 편에 속했는데, 이는 로마의 시조가 소아시아의 트로이로부터 왔다는 사실과도 관련 있다. 트로이는 그보다 먼저 번성했던 이웃 지역 히타이트의 영향으로 철기제작이 일찍부터 성했던 곳이다.
   
   
▲ 유라시아 대륙 철기문명의 확산. 지도 출처: Giorgi Balakhadze 제작 Wikimedia Commons유라시아 지도에, Theodore A. Wertime, The Coming Of The Age Of Steel(1962), Wikipedia “Metallurgy”, Historyworldnet, “History for Metallurgy”, http://www.historyworld.net/wrldhis/PlainTextHistories.asp?ParagraphID=ahh 村上恭通, “ユーラシア大陸における鉄の発展史と弥生時代の鉄(“2016) 등의 자료에 근거, 이진아 작성

   발달한 해양술과 철기 제작술의 조합은 로마가 지중해역의 지배자로 우뚝 설 수 있는 기반이 되어주었다. 부여국의 앞선 철기 제작술을 이어 받고 동남아시아에서 한반도로 이어지는 해역을 활동무대로 하던 가락국이 동아시아 해역에서 주역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다른 점도 존재한다. 예를 들면, 역사의 흐름을 놓고 볼 때 가락국 쪽이 새로 확대되는 지역에서 더 환영받는 리더가 아니었을까 생각되는 점이 있다. 로마는 식민지를 정신적으로 장악하지 못하고, 오히려 식민지였던 유데아 지방의 종교인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됐다. 반면 가락국은 일본에서 지금까지도 존속되는 전통 신앙의 한 흐름을 일구어냈다는 점을 지난 기사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간 묘켄은 누구일까’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가락국과 로마의 활약상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절정에 달했고, 또 비슷한 시기에 약해져 갔다.
   
   보통 로마의 전성기는 율리우스 케사르가 로마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됐던 기원전 27년부터 콤모두스 황제가 암살당했던 서기 192년까지로 본다. 그 이후로 로마는 내란, 외적 침략, 정치적 혼란, 전염병 창궐, 경제 불황 등으로 시달리며 약해져 간다.
   
   이 시리즈에서 가락국의 전성기는 중국 양쯔강 중류에서 안정적으로 천문 기록이 시작된 기원전 47년 무렵부터 그것이 끝난 서기 202년까지로 본다. 그 후론 가락국 인근의 소국들인 포상팔국이 가락국의 해상무역권 점유에 도전하는 등, 가락국 중심의 헤게모니 패턴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방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과 서쪽 끝에 위치해서 서로 너무도 다른 문화권에 속했던 두 해양국가, 로마와 가락국은 이렇게 비슷한 패턴으로 흥망성쇠의 궤적을 거쳤다. 무엇이 이 두 나라의 운명을 그렇게 비슷하게 이끌고 갔을까?
   
   
   
   ※주간조선 온라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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