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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2호] 2021.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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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리포트]1996년, 나는 탈레반이 점령한 카불로 향했다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silkroad100@gmail.com 2021-08-22 오후 12:50:50

▲ 지난 8월 18일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 입성한 탈레반 병사들이 무리를 지어 순찰을 돌고 있다. photo 뉴시스
아프가니스탄이 전 세계 뉴스메이커로 또다시 부상했다. 카불 함락과 함께 전대미문의 살벌한 상황들이 실시간 뉴스로 전해지고 있다. 인터넷 덕분이지만, 웬만한 비극에는 눈도 깜짝 안 하는 세상이다. 지진으로 수천 명이 죽고 수만 명 난민이 떠돈다고 해도 모바일 속 디지털 세상에 그칠 뿐이다.
   
   그러나 지금 벌어지는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은 결코 남의 일 같지가 않다. 한국의 어제이자 내일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겪었던 어제의 비극, 끊어진 철교 위를 뒤덮은 피란 행렬이 기억난다. 철교에서 수송기로 바뀌었을 뿐, 목숨을 건 피란 행렬이 카불공항에서 재현되고 있다. 한국에 닥칠지도 모를 내일의 비극은, 언젠가 감수해야 할지 모를 ‘불길한 운명’으로 다가온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미군 철수와 함께 밀어닥친 예정된 비극이다. 미군은 한국에도 있다. 그러나 동맹국과의 군사훈련조차 이런저런 핑계로 김을 빼는 나라가 지금의 한국이다. 스스로 무장해제에 나서면서 그래도 남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는다.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은 카불에서 전해지는 탈출 러시를 보면서 미국 시민 모두에게 단언한다. “(탈레반 공격에 맞서) 아프가니스탄군 스스로가 나서지도 않는데, 미군에 앞장서라고 (내가) 명령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세계 흐름을 이해하고 상식에 서 있다면 카불을 보면서 서울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카불은 강 건너 불이 아니다.
   
   

   남의 일 같지 않은 ‘카불의 비극’
   
   아프가니스탄은 필자 인생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나라다.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미국 워싱턴에서 만난 자히라 자히르(Zahira Zahir)란 50대 여성이다. 2005년 10월에 접했던 인물로, 유서 깊은 미국 워싱턴DC의 워터게이트호텔에서 만났다. 호텔 내 뷰티살롱 경영자이자 헤어디자이너와 손톱관리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녀를 찾아간 이유는 특이한 경력 때문이었다. 백악관 전속 이발사로, 로널드 레이건과 조지 부시(41대) 대통령의 머리카락을 다듬던 인물이 자히르였다. 당시 ‘백악관의 장인들’에 관한 책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성 이발사가 체험한 백악관에 대한 기억과 추억을 듣기 위해 만났다. 백악관에는 상설 이발소나 이발사가 따로 없다. 백악관 내 공간 부족도 이유지만 이발사를 고용할 경우 연방직원 채용에 따른 재정적 부담도 안게 된다. 공무원 한 명은 최소한 시민 100명의 경제적 부담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백악관은 필요할 때마다 외부에서 부르는 출장 이발사를 선호한다. 까다로운 신원조회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한 번 불려올 경우 지속적으로 일하는 것이 보통이다. 자히르는 레이건 대통령 때 처음으로 백악관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1992년 임기를 마친 부시 때까지 백악관 전속 출장 이발사로 일했다.
   
   
   아프간 총리 딸에서 백악관 이발사로
   
   자히르가 아프가니스탄 망명자 출신이란 사실은 대화 도중 알게 됐다. 망명객이 미국 대통령 전속 이발사가 됐다는 사실이 놀랍게 느껴졌다. 과연 탈북 북한 주민이 청와대 대통령 전속 이발사가 될 수 있을까? 아프가니스탄인에게 자히르란 이름은 아주 특별한 의미로 와닿는다. 탈레반조차 국부(國父)로 인정한 모하메드 자히르(Mohammed Zahir)라는 인물 때문이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왕국 최후의 왕으로, 1933년부터 1973년까지 40년간 카불 왕궁을 지켰다. 구(舊)소련이 주도한 쿠데타로 왕정이 무너지면서 이후 이탈리아로 망명한 슬픈 역사의 주인공이다.
   
   워터게이트호텔에서 만난 자히르는 국왕 자히르와 밀접한 관계였다. 국왕의 친척인 동시에 쿠데타 직전까지 왕실 총리로 일한 인물이 자히르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왕족이자 총리의 딸인 셈이다. 자히르가 쿠데타 소식을 들은 것은 뉴욕에서 공부할 때였다고 한다. 왕이 쫓겨나고 아버지도 실각한 뒤 가족 모두 연금상태에 들어갔다. 생활비 송금이 중단되면서 20대 자히르는 낭떠러지 같은 생활고에 직면한다. 손톱관리는 얼떨결에 맡게 된 일이다. 이후 아프가니스탄 망명객으로 워싱턴에 머무는 동안 백악관 근처 작은 이발소가 낸 구인광고를 보고 찾아간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발소 주인이 당시 레이건 대통령 전속 이발사였다. 함께 백악관에 출장가서 레이건의 손톱관리를 맡게 된다. 자히르가 아프가니스탄 총리의 딸이란 사실도 레이건에게 자연스레 알려진다. 나중에는 대통령의 손톱과 머리를 전부 담당하는 출장 이발사로 발탁된다.
   
   ‘파란만장’은 자히르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단어다. 인간 만사가 다 그렇지만 다들 자신의 인생이 파란만장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총리의 딸에서 손톱관리사, 백악관 출장 이발사로 변신한 자히르의 삶만큼 극과 극을 넘나든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자히르의 파란만장은 그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1996년 소련 괴뢰정권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은 탈레반은 과거 복권운동을 벌인다. 과거의 왕국과 정권 인사들이 오히려 우대받기 시작한다. 이런 기회를 자히르도 이용했다. 꿈에 그리던 카불에 들러 탈레반 인사들과 만나게 된다. 조국에 머무는 동안 자히르는 자신이 번 돈으로 아프가니스탄 내 어린이 교육사업에 투신한다. 탈레반은 자히르에게 교육부 장관직을 제안하면서 카불로 돌아오라고 했다.
   
   

   “아프간은 크고 넓고 강하다”
   
   그러던 중 9·11 동시테러 사건이 터진다. 필자가 자히르와 만난 것은 9·11 사건 발생 4년 뒤다. 자히르는 “평소 찾던 단골들이 9·11 이후 사라졌다”고 말했다. 9·11 테러의 후유증인지 어린이 교육과 관련해 탈레반과 만났던 사실이 주변에 알려지면서 워싱턴 인사들의 의심을 산 것이다. 그나마 41대 부시 대통령이 신원 보증과 위로의 편지를 보내와 안도를 했지만 마음고생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와의 대화 도중 “상황이 바뀌면 카불로 돌아갈 생각이 있느냐”고 물어봤다. 자히르는 고개를 흔들며 “결코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 “카불은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아프가니스탄은 크고 넓고 강하다. 내 가슴 하나로 품기에는 너무도 벅차다.”
   
   2021년 기준 아프가니스탄 총인구는 약 3700만명 정도다. 그중 조국을 떠나 외국에 거주하는 사람이 약 300만명이다. 대부분 피란, 망명자 신분으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2021년 8월 이후 피란, 망명자의 수가 다시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총리 딸만이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국민 전체가 다시 파란만장한 인생의 곡절을 겪을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이 필자 인생의 큰 획으로 남은 두 번째 이유는 자히르와 만나기 9년 전인 1996년 9월의 기억과 체험에서 비롯된다. 당시 관심이 많던 이슬람 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 들렀을 때다. 도착하자마자 현지 사정에 밝은 영자신문사에 들렀다.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하루 8시간 일하고 30달러의 일당을 주는 조건으로 한 안내원을 소개받았다. 인도가 그러하듯 파키스탄 국민 개개인은 명석하다. 나라의 중심이 흔들리는 곳이지만 반대로 개인적 능력은 탁월하다. 안내원 덕분에 파키스탄 정치는 물론 이슬람권과 중동 전체에 대한 큰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아프가니스탄도 그중 하나였다. 가이드로부터 “곧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할 것”이란 얘기를 들었다. 카불 방문은 주변국 상황을 듣던 중 내려진 ‘즉흥적’ 결정이었다.
   
   
▲ 지난 8월 16일 아프가니스탄 카불국제공항 주변 미 공군 C-17 수송기 근처에 국외 탈출을 원하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photo 뉴시스

   ‘반공 전사’ 탈레반을 찾아서
   
   탈레반은 당시에도 유명한 존재였다. 그러나 나중에 악명을 떨친 ‘참수 테러리스트’라는 이미지는 거의 없던 때였다. 냉전적 사고라 비난할 듯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탈레반들은 러시아에 맞서 싸우는 지하드 반공전사로 비쳤다. 별로 무서워할 존재도 아니었기에 탈레반 수장과 직접 만나 얘기를 듣고 싶었다.
   
   최근의 아프가니스탄 상황은 1996년 9월의 모습과 대동소이하다. 두 시기 다 탈레반이 카불을 막 점령했던 때다. 정확히 1996년 9월 27일 아프가니스탄 전체가 탈레반 수중에 들어갔다. 슬리퍼 차림에 활짝 웃는 얼굴로 등장한 2021년의 탈레반은 24년11개월 전의 모습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2021년은 탈레반의 상대가 미국이지만, 1996년의 상대는 러시아가 지원한 나지불라(Najibullah) 정권이었다는 점만 차이라면 차이다. 나지불라는 1987년부터 1992년까지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으로 재직한 인물로, 러시아가 내세운 괴뢰정권 수반이다.
   
   흥미롭게도 19세기 이래 아프가니스탄의 최고 우방은 러시아(구소련)였다. 1919년 아프가니스탄을 국가로 인정하고 외교관계를 처음으로 맺은 나라도 러시아였다. 우호관계에 있던 두 나라가 갈라선 것은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부터다. 붉은군대는 아프가니스탄을 아예 직접 통치하면서 중동과 인도양으로 진출할 야심을 품고 카불에 입성했다.
   
   그러나 소련의 무력 시위는 실패로 끝난다. 아프가니스탄인들의 끈질긴 저항 때문에 결국 1989년 전면 철수를 단행한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다. 붉은군대는 철수했지만 나지불라 괴뢰정권이 사회주의 노선을 유지하면서 독재체제를 강화한다. 곳곳에 반발이 생기면서 1992년부터 내전이 본격화한다. 탈레반은 그 같은 과정 속에서 탄생한 무장세력이다. ‘괴물’ 탈레반을 창조해낸 나라는 미국과 파키스탄이라고 봐야 한다. 소련과 싸울 전사들을 키우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따라서 원래 탈레반은 친미세력이었다.
   
   필자가 카불에 들어갔던 1996년 9월 초는 무려 4년간 지속됐던 내전이 끝나기 직전이었다. 당시 파키스탄 페샤와르를 거쳐 육로로 카불에 들어갔다. 페샤와르에서 카불까지는 직선거리로 300㎞ 정도다. 실크로드 통로로 통하는 유명한 ‘카이버패스(Khyber Pass)’를 지나야 아프가니스탄에 진입할 수 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카불 방문은 1박2일 만에 끝났다. 부끄럽게도 카불 외곽까지만 갔다가 곧바로 돌아온 셈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로켓탄이 터지면서 탈레반의 카불 입성이 시작되던 때였다. 목숨을 걸지 않는 한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불과 48시간의 여정이었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 1996년 10월 17일 자 주간조선에 필자가 기고한 글. 탈레반이 점령한 아프가니스탄에서 보낸 48시간의 기록이다.

   부족 경계 넘을 때마다 통행료
   
   일단 풍경이 달랐다. 거의 사막에 준하는 척박하고도 살벌한 땅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경찰은커녕 아예 정부가 없는 무정부 상태 속의 혼란과 공포가 표류했다. 생명을 지킬 안전 준칙이나 나침반이 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자동차를 빌려 안내원과 함께 갔지만 카불로 가는 동안 10~20달러에 달하는 통행료를 탈레반에 내야만 했다. 그들은 전부 총을 갖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은 수많은 부족으로 구성된 연합체 국가다. 부족들은 제각각의 관할지역이 있다. 통행료는 부족 간의 경계선에 들어설 때마다 낸다. 모두 웃고 친절하지만 뭔가 의심스럽고 위험하다고 느끼면 곧바로 총을 겨눈다. 반항할 경우 주저없이 쏜다.
   
   지금이라면 꼬리부터 내릴 듯하지만 카불에 가는 동안 우연히 만난 탈레반들과 사진도 찍고 차도 함께 마셨다. 10살 안팎의 어린이부터 70대 노인 전사까지 다양했다. 사실 탈레반이 누구인지에 대한 구별도 모호하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에서 총은 탈레반만이 아닌 보통 시민들도 갖고 있는 호신용 무기였다. 25달러 정도면 중국제 AK-47소총을 구입할 수 있었다.
   
   중동과 이슬람권에서 피부로 느꼈지만 개개인의 영혼이 너무도 순박하고 투명하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말에 대한 책임을 진다. 느리고 시간 약속은 엉망이지만 시종일관 웃고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도 강하다. 뭐든지 나누면서 함께하려고 한다. 손님을 ‘신의 선물’로 여기는 유목민 특유의 풍습 때문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알라’의 이름 혹은 부족장의 명령으로 결정이 내려지면 180도 달라진다. 2015년 일본인 기자 고토 겐지(後藤健二) 참수 사건에 관한 기억이 아직도 선명히 남아 있다. 당시 고토는 10년 이상 우정을 쌓아온 현지 친구에게 배신당한 뒤 이슬람국가(IS)에 넘겨져 처형됐다. 10년 아니 1000년의 인간적 신뢰라도, 알라의 이름이나 부족장 결정이 내려질 경우 무의미해진다. 착하고 투명한 영혼을 가진, 목숨이라도 바칠 만한 친절한 사람일수록 더 충격적인 변모를 보인다. 사랑, 의리가 아니라 신과 부족의 생각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카불에 입성한 탈레반의 모습을 보면 한물간 낡은 총에다 군복조차 갖추지 못한 오합지졸로 비친다. 착각하기 쉬운데 인류 역사의 주인공들은 오합지졸에서 출발한 경우가 많았다. ‘정복자=문명·문화가 앞선 나라’라는 등식은 15세기 대항해 시대 이후부터다. 그 이전만 해도 반대인 경우가 더 많았다.
   
   마케도니아 출신 알렉산더가 좋은 본보기다. 문명·문화적으로 볼 때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아테네와 페르시아보다 한참 뒤처진 ‘미개한’ 나라였다. 말을 잘 타고 전쟁을 마다하지 않는 일사불란한 사회라는 점을 뺀다면, 매력을 찾기 힘든 거친 비문명 국가였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원정 10여년 만에 동서 전부를 정복한다. 5세기 서로마를 멸망시킨 훈족(Huns)과 고트족(Goths)도 마찬가지다. 거의 야만인 수준의 나라가 세계 대제국 로마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알렉산더와 훈족·고트족 사이에는 큰 차이가 하나 있다. 같은 비문명 국가지만 알렉산더는 정복과 동시에 현지의 선진 문명·문화를 재빨리 흡수했다. 훈족·고트족은 다르다. 승리에 도취해 자기식 삶을 고집하다 인류 역사에서 사라진다.
   
   
   탈레반이 광장에 내건 나지불라 시신
   
   아프가니스탄이 알렉산더의 길을 걸을지 훈족·고트족의 전철을 밟을지 아무도 모른다. 1996년 상황을 보면 다시 훈족·고트족의 길을 걷게 될 가능성이 높다. 1990년대 탈레반은 카불 입성 즉시 나지불라를 체포해 고문한 뒤 교수형에 처했다.
   
   모두가 보란 듯이 시신을 줄에 매달아 시내 한복판에 걸어뒀다. 그 뒤 이어진 암흑의 시간은 인류에 충격과 전율을 안겼다.
   
   이번에도 당분간 총과 피로 범벅된 카불발(發) 뉴스가 도배를 할 것이다. 글로벌 시대의 특징이지만 아무리 경천동지할 사건도 길어봤자 한 달이다. 아프가니스탄의 운명과 탈레반의 진짜 ‘실력’은 카불 관련 소식이 인터넷에서 사라진 이후부터 나타날지 모르겠다. 동서 융합 간다라 문화를 아시아에 확산시킨 역사의 창조자가 아프가니스탄이다. 죽음과 퇴보가 아니라 삶과 번영을 약속할 2000여년 전의 지혜가 탈레반에 다시 한번 찾아오길 기원해 본다.
   

   아프가니스탄을 이해할 키워드 ‘그리스’
   알렉산더가 인도 정복길에 그리스 문화 전파
   
   사물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한 기본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역사다. 아프가니스탄도 마찬가지다. 주목할 부분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리스’라는 키워드를 통하면 아프가니스탄이 어떤 나라인지 이해하기 쉽다. 아프가니스탄과 그리스의 접점은 ‘간다라(Gandhra) 문화’에 있다. 세계사 시간에 반드시 등장하는 귀에 익은 단어일 듯하다. 인도 북서부 간다라 지역에서 탄생한 문화로 헬레니즘 문화와 불교와의 접목을 의미한다. 헬레니즘 영향을 받은 불상 조각·그림이 간다라 문화의 결정체다. 간다라 문화 이전에는 불상이란 것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도 볼 수 있지만, 신을 형상화한다는 것 자체가 신에 대한 모독으로 통했다. 기원전 6세기에 탄생한 불교지만, 헬레니즘 대리석 조각상을 모델로 삼아 서기 2세기부터 불상 제작이 시작된다. 간다라를 기점으로 인도 전역과 동남아시아, 중국, 한국, 일본으로 퍼져나간다.
   
   간다라 문화는 아프가니스탄을 얘기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대목이다. 필자가 체험했던 파키스탄 페샤와르에서 아프가니스탄 잘랄라바드와 카불에 이르는 지역 전체가 바로 간다라 문화권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와 페르시아를 하나로 엮은 헬레니즘 문화를 간다라에 몰고 간 인물은 최초의 동서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이었다. 29살 되던 때인 기원전 327년, 인더스강을 건너 인도 정복을 위해 진을 친 곳이 바로 간다라다. 그리스에서 무려 4000㎞나 떨어져 있다. 긴 장마와 사기 저하로 인해 인도 정복에는 실패하지만, 멀리 지중해, 에게해, 페르시아를 통해 탄생된 이국 문화는 그대로 남는다. 문화만이 아니라 사람도 남게 된다. 알렉산더가 떠난 뒤에도 에게해 이오니아(Ionia·현재 터키 아나톨리아 이즈미르 주변 지역) 출신 군인들이 간다라 지역에 남아 그리스 문화 확산에 나선다. 이들은 현지인과 결혼한 뒤 아예 그리스어와 문화에 기초한 독립국을 건설한다. 기원전 2세기 인도ㆍ그리스 연합국을 건설한 메난데르 1세(Menander I)는 간다라 문화의 기점이 된 인물이다. 제우스, 아테네를 대신해 불교신자로 귀의한 왕이 그리스인 메난데르다. 이후 인도계의 정복에 따른 부분적인 변화도 있었지만 그리스 문화에 기초한 간다라 문화는 7세기 이슬람권이 밀어닥치기 전까지 이어진다.
   
   어제 역사를 되새겨보면 아프가니스탄 전역이 그리스와 직접 관련된 땅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카라샤(Kalasha) 부족에서 보듯 간다라 지역에는 아직도 그리스 방언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아프가니스탄 역사를 볼 때 2400여년 전 알렉산더 시대와의 접점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아프가니스탄은 세계의 오지다. 고립된 상태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2000여년 전 그리스의 세계관이나 사고방식이 21세기에 들어선 지금까지 그대로 남게 된다. 과거 바다의 그리스를 대신한 육지의 그리스가 아프가니스탄이다. ‘로야 지르가(loya jirga)’라는 아프가니스탄 특유의 회의 방식을 보자. 대표자나 어떤 정책을 결정할 때 전국의 부족대표 전체가 모여 결정하는 원시 민주주의 방식의 회의다. 부족 대표로 나서기 전에 일단 현지인의 의사를 모은 뒤 전하는 식이다. 유목사회나 이슬람권에서도 볼 수 있지만 필자 판단으로는 알렉산더가 전파한 그리스 직접민주주의의 흔적으로 보인다. 이번 탈레반 재점령 후 여성이나 과거 정부군 관계자를 어떻게 다룰지 억측이 곳곳에서 일고 있지만, 최종 결정권은 로야 지르가에 있다. 서방의 시각에서는 원시적으로 보이지만 그리스 폴리스(Polis)의 직접민주주의 전통이 아프가니스탄 전체에 퍼져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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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을 하며
검은 호랑이의 해 정장열 편집장

격화되는 대선전에 오미크론 사태까지 더해져 연말이 어수선합니다. 한 해를 정리할 때면 지나온 날을 되돌아보지만 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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