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8일 중국 톈진에서 탈레반 이인자인 물라 압둘 가니 바라다르(왼쪽)와 만난 중국 왕이 외교부장. ⓒphoto 뉴시스
지난 7월 28일 중국 톈진에서 탈레반 이인자인 물라 압둘 가니 바라다르(왼쪽)와 만난 중국 왕이 외교부장. ⓒphoto 뉴시스

한 국가의 외교수장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면, 그 나라 외교전략의 방향을 읽을 수 있다. 지구촌에서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 못지않게 바쁜 외교수장이 중국의 왕이(王毅) 외교부장일 것이다. 필자가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를 살펴봤더니 지난 7월 1일부터 8월 20일까지 51일 동안 왕이 부장이 소화한 공식 대외활동은 117회에 달했다. 하루 평균 2.3회의 공식 일정을 소화했다. 하루에 8개의 행사를 치른 날(8월 5일)도 있었다. 그는 지난 7월 12일 투르크메니스탄 부총리 겸 외무장관과 회담한 것을 비롯해 인도 외무장관(7월 14일), 러시아 외무장관(7월 16일), 시리아 외무장관(7월 18일)과 잇따라 만나고, 파키스탄 외무장관과는 제3차 전략대화(7월 25일)를 진행했다. 그는 또 아세안+한·중·일 외무장관 회의(8월 4일)에 참석했으며, 영국 외무장관(8월 19일), 이탈리아 외무장관(8월 20일)과는 전화 회담을 했다. 쉴 새 없이 지구촌 곳곳과 외교활동을 벌인 것이다. 그만큼 중국이 적극적 외교에 나서고 있다는 증거다. 같은 기간 한국 정의용 외교장관의 일정을 봤더니 외교활동은 8회에 불과했다.

왕이와 탈레반 이인자의 톈진 회담

왕이 부장의 활동에서 눈에 띄는 점은 중앙아시아 및 중동 국가들과의 접촉이 빈번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아프가니스탄 관련 활동이 많다는 점이다. 7월 이후 왕이가 직접 참여한 아프간 관련 활동을 보면 △‘미군의 철수로 아프간에서 혼란과 전쟁이 일어나선 안 된다’는 입장 발표(7월 3일) △아프간 형세에 관한 중국의 입장 천명(7월 14일) △상하이협력기구 아프간 문제 외교장관 회의 거행(7월 14일)과 아프간 연락조 연합성명(7월 15일) △아프간 외무장관과 회담(7월 15일) △중국-파키스탄 아프간 문제 공동행동 결의(7월 25일) △탈레반 정치위원회 방문단과 회담(7월 28일) △중·러 아프간 문제 전략적 소통 강화 합의(8월 16일) 등이 있다.

미군이 떠나고 탈레반이 점령한 혼란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중국은 어떤 이해관계가 얽혀 있길래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지난 7월 28일 톈진(天津)에서 열린 왕이와 아프간 탈레반 대표단의 회담을 보면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아프간 측에서는 탈레반의 이인자로 알려진 물라 압둘 가니 바라다르(Mulla Abdul Ghani Baradar) 정치위원회 위원장이 종교위원회 및 홍보위원회 수장들과 함께 참석했다. 이날 회담은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하기 보름 전에 열린 것이어서 중국의 발 빠른 외교 행보를 엿볼 수 있다.

왕이는 이 자리에서 미국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미국과 나토(NATO)가 아프간에서 철군한 것은 미국의 아프간 정책의 실패를 상징한다”고 지적하고 “(하지만) 이는 아프간 국민에게 자기 나라를 안정시키고 발전시킬 중요한 기회”라고 말했다. 그는 또 “중국은 아프간의 최대 이웃 국가로서 시종일관 아프간의 주권 독립과 영토의 완전성을 존중해왔으며 내정에도 간섭하지 않고 전체 아프간 국민을 향한 우호정책을 실행해왔다”고 말했다. 이는 그동안 미국이 아프간에서 탈레반을 몰아내고 서구식 민주주의를 이식(移植)하려고 했던 점을 에둘러 비판한 것이다.

이에 대해 탈레반 측의 바라다르 위원장은 “아프간의 재건 과정에 중국이 더욱 많이 참여해 경제발전에 더욱 큰 역할을 해주길 희망한다”면서 “우리는 장차 편리한 투자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과 손잡았던 아프간 전 정부와 달리 탈레반 정부는 중국과 손잡을 뜻을 내비친 것이다. 탈레반 정부가 국민에게 경제적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중국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다. 이날 회담으로 중국은 탈레반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했다.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합법적 정부로 인정받지 못하는 탈레반을 공식 대화 파트너로 초대함으로써 탈레반의 국제적 위상을 높여주었다. 또 향후 이루어질 아프간의 경제 재건에 중국이 적극 지원할 의사를 내비침으로써 ‘미국의 대안’으로서 중국의 존재를 각인시킨 것이다. 중국의 탈레반 접근은 크게 3가지 전략적 목표에 따라 추진되는 것으로 분석된다. 첫째는 미국 견제이다. 둘째는 국내 안정이다. 셋째는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과 해상의 신(新)실크로드 건설 프로젝트)와의 연계를 통한 경제적 이익이다.

미국 견제하려는 중국의 ‘양 날개 전략’

세종연구소 정재흥 연구위원은 최근 발표한 정세 논평에서 중국의 아프간 접근을 ‘대미 견제 전략’의 일환으로 풀이했다. 중국이 미국 주도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쿼드(Quad·미국, 일본, 호주, 인도로 구성된 비공식 안보협력체)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양 날개(兩翼) 전략’을 본격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양 날개 전략’이란 동쪽으로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남·북·중(南北中) 3자, 혹은 남·북·중·러 4자 협력을 추진하고, 서쪽으로는 신장(新疆)을 중심으로 중국·파키스탄·아프간 3자, 혹은 여기에 이란을 추가한 4자 협력을 추진한다는 구상이다.

중국은 이를 위해 일찍부터 파키스탄과 이란에 공을 들여왔다. 중국은 파키스탄과의 일대일로 협력사업인 중-파 경제회랑(CPEC·China-Pakistan Economic Corridor)을 건설 중에 있다. 단일 투자로는 최대 금액인 620억달러(약 72조원)를 투입해 신장웨이우얼자치구를 출발해 파키스탄 과다르항구에 이르는 도로, 교량, 철도, 항만, 발전소를 구축하는 프로젝트이다. 이 공사가 완공되면 중국은 중동의 석유를 인도양이나 말라카해협을 거치지 않고 페르시아만에서 곧바로 중국으로 실어나를 수 있다. 미군의 개입 여지를 줄이는 것이다. 또 장차 과다르항에 중국의 군함이 정박하면, 인도양과 페르시아만에서 중국의 군사적 영향력도 확대된다.

중국은 올 들어 이란과의 관계도 강화하고 있다. 왕이 외교부장은 지난 3월 이란의 자바드 자리프 외무장관과 ‘25년 포괄적·전략적 동반자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 체결로 중국은 앞으로 25년간 총 4000억달러(약 480조원)를 투자해 이란의 고속도로, 철도, 발전소, 항만, 5G 통신망 등을 구축해주기로 했다. 이에 대한 대가로 중국은 이란의 원유와 천연가스를 할인된 가격에 안정적으로 받기로 했다. 미국의 제재로 고통받는 이란으로서는 석유의 판로를 확보해 경제개발을 앞당길 수 있고, 중국은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원을 확보하게 됐다.

중국은 이 협력 벨트에 아프간을 추가하고 싶어 한다. 중국은 과거 구소련과 미국이 모두 실패했던 아프간 땅에서 ‘성공 모델’을 만들려는 것이다. 중국이 파키스탄과 이란에서 추진하는 것과 같은 경제협력 모델로 아프간의 경제를 재건하고 정치를 안정시킨다면, 중국은 미국이 하지 못했던 중동지역의 새로운 ‘협력 성공 사례’를 만들게 된다. 이를 통해 중국은 ‘미국은 실패했지만, 우리는 성공한다’는 것을 세계에 보여줄 수 있다. 앞으로 중국-파키스탄-아프간-이란으로 이어지는 4자 협력체계가 수립되면, 중앙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약화되고 중국의 영향력은 크게 확대된다. 지도를 펼쳐보면, 중국 신장자치구에서 카스피해까지 이어지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모든 국가가 친중(親中) 국가로 변하기 때문이다.

아프간 북쪽의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이른바 ‘스탄’ 국가들은 이미 상하이협력기구(SCO)와 일대일로라는 협력 틀로 중국에 묶여 있다. 이들 국가는 중국과의 경제 협력 없이 살아가기는 어렵다. 또 이란을 지렛대로 중동지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질 수밖에 없다. 한때 미국이 주도했던 중동 질서가 중국(+러시아) 쪽으로 넘어가려는 분기점에 서 있는 것이다. 중국의 아프간 접근은 새로운 중동 질서, 나아가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들어가려는 중국의 야심 찬 전략의 출발점이다. 중국은 이를 통해 국제질서의 창조자가 이제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라는 것을 지구촌에 과시하려 한다. ‘늙은 사자’를 밀어내고 새로운 ‘라이언 킹’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중국의 전략이 성공하면 인도는 친중 국가들에 포위된다. 인도의 오른쪽에는 미얀마, 왼쪽에는 파키스탄과 아프간이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인도의 대외활동에 상당한 제약을 초래할 수 있다. 나아가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전략과 쿼드 협력에도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다. 인도-호주-일본으로 이어지는 미국의 중국 봉쇄망과, 한반도-러시아-파키스탄-아프간-이란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양 날개 전략’이 점점 발톱을 드러내며 대립의 강도를 높여가고 있다.

중, 탈레반 활용해 신장자치구 안정 도모

지난 7월 28일 탈레반과의 회담에서 왕이 외교부장은 신장웨이우얼자치구 독립운동 단체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운동(ETIM)’에 관해 상대의 의중을 떠보는 발언을 했다. 왕이는 “ETIM은 유엔 안보리에 의해 테러조직 명단에 오른 조직으로 중국의 국가안전과 영토보전에도 직접적인 위협이 된다”면서 “탈레반이 모든 테러조직과 철저히 선을 긋고 지역의 안정과 발전 협력을 위해 장애물을 청소하기 바란다”고 했다.

신장자치구 위구르족의 독립운동은 중국 공산당 정부로서는 큰 골칫거리 중의 하나이다. 이는 종교 갈등인 동시에 국가의 통일을 해치는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신장자치구에 120개의 노동교화소를 건설해 100만명이 넘는 위구르족을 강제 구금하고 있다. 중국은 ETIM의 배후에 탈레반이 있다고 의심한다. ETIM과 탈레반은 모두 이슬람 수니파로, 탈레반에서 훈련받은 위구르 청년들이 ETIM 독립운동 전사로 활동한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왕이의 발언은, 탈레반이 중국의 도움을 받고 싶으면 ETIM과 철저히 단절하라는 요구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탈레반 측의 바라다르 위원장은 “우리는 어떠한 세력도 아프간의 영토를 이용해 중국에 위해를 가하는 일은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탈레반이 ETIM과 거리를 둘 것임을 시사하는 발언이었다. 이 약속이 실현된다면 중국으로서는 국내외 테러조직의 연계를 차단하여 서부 지역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다. 또 이슬람 세력과의 협력관계를 구축하여 중동지역에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는 토대를 얻게 된다.

중국의 세 번째 목표는 아프간을 일대일로 전략과 연계해 경제협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아프간에는 수조달러 이상의 희토류(稀土類)와 구리 등 광물자원이 매장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을 개발한다면 중국 경제발전에 필요한 천연자원의 안정적 공급원을 확보할 수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 보도에 따르면, 탈레반 측은 그동안 미국의 제재로 개발이 지연돼온 세계 최대 구리광산을 중국의 자금 지원으로 개발하는 것을 이미 승인했다. 또 중국이 아프간 도시를 연결하는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계획도 요청했다고 한다.

중국의 외교에선 상대국 정권이 어떤 가치관과 정치 목표를 가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국이 아프리카의 독재자들을 지원해 자원개발권을 따내는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중국은 자국에 이익이 되고 협력적이면 누구와도 손을 잡는다. 아프간 탈레반이 아무리 여성의 인권을 짓밟고 청소년의 교육받을 권리와 언론의 자유를 박탈해도, 중국은 탈레반과의 협력이 이익이 된다고 판단되면 그들과 손을 잡는다. 이것이 미국과 다른 중국의 외교전략이다. 이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부시 행정부 시절 미국이 운영하는 관타나모수용소를 방문한 중국 조사요원은 그곳에 갇혀 있던 위구르인을 보고 “미국인 손에 잡힌 걸 다행으로 알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중국으로 압송되자마자 곧 사형당했다고 그를 담당했던 미국 변호사가 말했다. 미국을 몰아내고 중국과 손잡은 탈레반, 아프간 국민의 운명은 어디로 향할까.

지해범 전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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