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이 철수한 카불을 점령한 탈레반 전사들. ⓒphoto 뉴시스
미군이 철수한 카불을 점령한 탈레반 전사들. ⓒphoto 뉴시스

지난 8월 26일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를 서두르던 미군에 대한 테러가 발생하여 미군 13명이 사망했다. 이번 테러는 이라크에서 민간인에 대한 참수로 악명을 떨쳤던 이슬람국가(IS) 지부 IS-K(Khorasan·호라산)의 소행으로 알려지고 있다. 호라산은 아프가니스탄의 한 지역 명칭이다. 미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지난 8월 29일까지 두 차례의 공습을 가했다.

미군이 20년 만에 철수하면서 아프간에서 IS-K와 같은 테러조직들이 새로 번성해 나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탈레반이 다시 장악한 아프간이 이슬람 테러조직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한다. 이슬람 테러단체들은 아프간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깊이 뿌리를 내려왔다. 서방의 주요 전문가들이나 언론들도 미군 철수 이후 아프간의 장래에 대해 불안한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미·소 경쟁이 이슬람 용병을 키웠다

아프간과 이슬람 테러조직과의 긴밀한 관계가 시작된 것은 냉전 시절 미국과 소련의 경쟁에서 비롯된다. 냉전 막바지에 소련과 미국이라는 두 초강대국이 이 나라에 연달아 군사적으로 개입했다. 소련은 직접 군사적 침략을 감행했고, 미국은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이슬람 용병을 이용하는 간접적 개입을 택했다.

근대 이후 왕정국가였던 아프간은 1933년부터 자히르 샤 국왕(1914~2007)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사촌인 무하마드 다우드 칸(1909~1978)을 총리로 지명하여 전권을 행사토록 하였다. 칸은 친소(親蘇)노선을 유지하였다. 소련도 1960년대 이후 아프간에 경제 및 군사원조를 하였다. 미군이 최근 황급하게 철수한 바그람 공군기지도 이때 소련이 건설한 공항이다.

소련은 아프간 북부에서 유전을 발견하고 1985년까지 매년 2억㎥씩 채굴하여 대부분을 소련으로 보냈다. 자히르 샤 국왕은 1964년 선거를 통해 아프간인민민주당이 주도하는 의회민주주의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인종, 지역 및 종교 간의 심각한 갈등이 이어졌다. 1972년에는 극심한 한발로 10만명이 사망하는 대재난이 발생했다. 해외에서 온 구호물자를 국왕의 친척들이 착복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다음해 국왕이 이탈리아를 방문하는 중 쿠데타가 발생하여 자히르 샤 국왕은 권좌에서 축출되고 150년 지속된 왕정도 종식되었다. 쿠데타의 배후인 무하마드 다우드는 독재자 대통령이 된 후 개혁을 실시했다.

하지만 무하마드 다우드 정권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1978년 4월 아프간인민민주당 세력이 주도하는 쿠데타가 발생하여 다우드 일족을 몰살하고 무하마드 타라키(1917~1979) 대통령 정권의 아프간민주공화국을 수립했다. 정권의 실세가 된 하피줄라 아민(1929~1979)은 수천 명의 반정부 인사들을 처형하는 한편 친소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소련의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미국 유학 경력이 있는 아민이 친미 인사라는 의심을 떨치지 않았다. 소련이 보낸 외교관은 아민을 만난 뒤 소련이 가장 위험시하는 특징인 “평범한 프티부르주아이며 극단적인 파슈툰 민족주의자”라는 평가를 내렸다.

1979년 3월부터 이란의 호메이니 정권과 파키스탄에 고무된 이슬람주의 세력의 폭동이 잦아지면서 소련은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소련은 미국이 혼란을 틈타 자신의 세력권을 침범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가졌다. 안드레이 그로미코 당시 소련 외무장관은 훗날 소련 몰락 후 “브레즈네프는 아민이 미국과 타협할 역량이 있다며 이것만은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소련 국방차관이었던 발렌틴 바레니코프 장군은 1979년 소련 당국자들의 마음속에 있던 악몽의 시나리오를 10년 뒤 이렇게 설명하기도 했다. “아프간이 미국과 파키스탄의 수중에 들어가면 미국이 단거리미사일을 배치하여 소련이 카자흐스탄에 배치한 전략무기인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기지를 위협할 것을 우려했다. 당시 소련은 미국이 이란을 침공하여 호메이니 정권을 무너뜨리고 아프간도 침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소련 핵심부에서는 아프간의 실권자 아민이 미국의 첩자라고 확신했다.… 아프간은 우리의 세력권, 우리의 국경 안에 있다. 미국에 속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프간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카터-브레진스키 프로젝트

결국 소련군은 그해 12월 23일 아프간을 침공했으며 아민 등 정치인들도 처형했다. 그러자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중앙정보국(CIA)에 파키스탄을 통해 아프간에서 활동하는 이슬람전사인 무자헤딘에 ‘살상용(lethal)’ 무기를 제공하라고 지시했다. 카터는 1979년 7월 카불의 친소정권이 장악력을 잃어가기 시작하는 시점에 이슬람전사들을 비밀리에 지원하는 행정명령에 처음으로 서명했다. 강경한 반공주의자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1928~2017) 안보보좌관의 주도로 진행된 일련의 이슬람전사 지원정책은 나중에 ‘카터-브레진스키 프로젝트’로 불렸다. 브레진스키는 1989년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비밀작전은 뛰어난 아이디어였다. 그 효과는 소련을 아프간 함정으로 끌어들였다.” 소련군이 아프간에 침공한 12월 23일 그는 카터에게 “우리는 소련에 베트남전쟁을 선사할 수 있게 되었다”며 “이 전쟁으로 소련의 사기는 저하되고 궁극적으로 소련제국은 붕괴할 것”이라는 전망을 담은 보고서를 제출했다.

당시 CIA는 대소 전선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피했다. 미국 내에서 베트남전 실패나 민간인 사찰 등으로 CIA에 대한 여론이 매우 나빴기 때문이었다. 대신 CIA는 작전국을 중심으로 자체 인력 동원은 최대한 줄이면서 이슬람전사들을 가능한 많이 훈련시켜 투입하였다. 존 쿨리는 저서 ‘성스럽지 못한 전쟁(Unholy Wars)’에서 “미국 역사상 최대의 용병작전이었다. 용병의 대부분은 이슬람전사들이었다. 이들은 신(神)이 자신들에게 신의 적(敵)이자 무신론자들인 소련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뜨겁게 믿게 되었으며, 명예와 적은 급료로 보상받았다. 싸우다 죽으면 순교자가 되어 천국에서 보상을 받게 된다고 믿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 무렵 이슬람 청년들을 아프간의 대소 전선으로 동원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이집트의 급진적 이슬람주의 단체인 무슬림형제단(Muslim Brotherhood·MB)이었다. MB는 안와르 사다트(1918~1981) 대통령에 반대하는 이슬람주의 이론가들의 선동을 통해 반정부 성향의 청년들을 아프간 대소전선에 대거 동원했다. 이집트의 MB는 영국 식민지 시절인 1920년대에 태동했다. 1928년 이집트의 신학자인 하산 알 바나(1906~1949) 등은 코란에 따른 철저한 이슬람신정국가를 지향하는 MB를 결성했다. 이후 MB는 이슬람 국가들로 확산되어 일찍부터 제국주의 영국과 프랑스에 테러를 저지르는 등 호전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이집트와 아프간의 이슬람주의 지도자들은 전 세계 이슬람주의의 모태로 불리는 이집트 알아즈하르대학 출신들이었는데 이들은 1950년대에 이집트 나세르(1918~1970) 대통령 암살을 시도하는 등 세속주의에 반대하여 많이 투옥되었다. 1970년 나세르 사망 이후 집권한 사다트는 이들을 대부분 석방했다.

사다트 역시 이슬람 청년들을 아프간 대소 전선에 동원하는 데 나름 기여했다. 사다트가 MB를 설득하여 참전시킨 청년들을 ‘아랍아프간’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에는 사다트의 정치적 계산도 있었다. 1979년 3월 사다트가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자 국내에서 MB 세력이 크게 반발하였다. 이때 사다트는 MB 지지자들을 아프간으로 보내면 국내 정치에서의 압박을 줄일 수 있다는 계산을 했다. 사다트는 아프간 지하드를 지원하며 1956년 이후 나세르가 소련으로부터 얻은 엄청난 양의 소련제 무기들을 이슬람전사들에게 공급했다. 그 대가로 미국은 이집트에 50억달러를 지원했으며, 이스라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F-16 전폭기 등 신예 무기들을 판매하였다.

1970년대에 이집트에서는 눈먼 성직자인 오마르 압델라흐만(1938~2017)의 호전적인 설교가 명성을 떨쳤다. ‘알 지하드’라는 투쟁단체의 지도자로도 알려졌던 그는 전투적인 지하드를 촉구했으며, 1977년부터 1980년까지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대학에서 강의하였다. 정부가 그의 설교를 금지하자 녹음 테이프가 은밀하게 전파되기도 했다. 그는 나중에 아프간 국제테러조직원이 된 전사들을 가장 독려한 인물로 평가된다.

무슬림형제단 초창기 이론가인 하산 알 반나, 1970년대 호전적 설교로 명성을 떨친 성직자 오마르 압델라흐만, 알 카에다를 만든 오사마 빈 라덴, IS의 마지막 지도자인 알 바그다디, 탈레반 지도자 뮬라 오마르(왼쪽부터). ⓒphoto 위키피디아
무슬림형제단 초창기 이론가인 하산 알 반나, 1970년대 호전적 설교로 명성을 떨친 성직자 오마르 압델라흐만, 알 카에다를 만든 오사마 빈 라덴, IS의 마지막 지도자인 알 바그다디, 탈레반 지도자 뮬라 오마르(왼쪽부터). ⓒphoto 위키피디아

근본주의 와하비즘의 확산

아프간 대소 전선의 무자헤딘을 키우는 데는 파키스탄도 기여했다. 파키스탄은 러시아와 아프간 공산주의자들이 아프간을 장악하게 되면 다음 목표는 파키스탄이 될 것이라는 위기를 느꼈다. 미국의 브레진스키는 1980년 1월 파키스탄을 방문하여 지아 울 하크(1924~1988) 대통령과 무자헤딘 지원과 훈련에 합의했다.

사우디아리비아 역시 무자헤딘의 육성에 일조했다. 사우디는 이슬람 근본주의인 와하비즘을 밖으로 확산시키고 자국 내 급진적인 이슬람주의자들을 해외로 내보낼 기회로 삼고자 아프간 무자헤딘에 오일머니를 대폭 지원했다. 이때 사우디 명문가인 빈 라덴 가문도 아프간 전사 지원에 적극 참여했다.

오사마 빈 라덴은 1980년 파키스탄 페샤와르를 처음 방문한 뒤부터 무자헤딘을 적극 지원하기 시작했다. 1982년 그는 페샤와르에 정착했는데, 건설기술자들을 불러들여 CIA가 추진한 ‘호스트’의 터널공사를 완공시키기도 했다. 호스트 터널은 무기고와 아랍아프간들을 위한 훈련소 등을 갖춘 복합 군사시설이었다. 미국과 훗날 원수가 됐지만 당시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국 CIA의 파트너였다. 오사마 빈 라덴은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나는 아프간 국경지대에 정착하여 사우디왕국과 아랍, 그리고 전 세계의 이슬람 국가들로부터 오는 지원자들을 받았다. 내가 세운 캠프에서 미국인 장교들이 이들을 훈련시켰다. 무기는 사우디가 낸 돈으로 미국이 제공했다.”

1989년 빈 라덴은 아랍아프간들과 가족들의 지원센터 격인 ‘알 카에다(군사기지라는 의미)’를 설립하고 연계를 확대했다. 빈 라덴의 도움으로 수천 명의 아랍아프간들이 아프간 각지에 근거지를 마련했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아프간에서 소련군도 철수했다. 당시 미국은 소련의 몰락을 공산주의체제의 실패로 파악했지만 이슬람 세계와 무자헤딘의 입장은 달랐다. 그들은 소련의 실패를 이슬람의 승리로 파악했다고 ‘탈레반’의 저자 아흐메드 라시드는 설명한다. 아프간에서의 성전(지하드)으로 초강대국 소련을 패배시켰다면, 또 다른 초강대국인 미국도 패배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지하디스트들이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소련에 대한 무자헤딘의 증오는 곧 미국을 향하게 된다.

중요한 사실은 아프간에서 벌어진 소련과의 싸움을 통해 급진적인 이슬람 전사들이 엄청난 숫자로 육성됐다는 점이다. 1982년부터 1992년까지 43개국에서 약 3만5000명의 전사들이 아프간 무자헤딘의 세례를 받고 귀국했다. 10만의 급진적인 이슬람전사들이 아프간 및 파키스탄과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이슬람권에서도 이들의 위험성을 일찍부터 감지한 나라들이 있었다. 1992년부터 1993년까지 이집트와 알제리는 미국을 향해 아프간에 개입하여 안정을 찾아주라고 계속 주문했다. 아프간을 안정화시켜 전쟁에 숙달된 아랍아프간 전사들이 생업을 찾도록 도우라고 충고하였으나 미국은 이를 무시하였다. 미국이 아프간을 방치하는 동안 탈레반이라는 세력이 성장하면서 아프간은 국제 테러리스트들의 성역이 되었다.

1980년대 대소 항전에 나선 무자헤딘들. ⓒphoto 뉴시스
1980년대 대소 항전에 나선 무자헤딘들. ⓒphoto 뉴시스

뮬라 오마르의 탈레반 등장

탈레반은 소련군 철수 이후 아프간에서 벌어진 지독한 내전의 결과물이었다. 소련군 철수 이후 아프간의 저항세력은 크게 7개로 나뉘어 서로 반목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파키스탄의 페샤와르를 통해 미국의 지원을 풍족하게 받았다. 반면에 칸다하르를 중심으로 한 파슈툰족, 특히 듀라니 일파는 미국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다. 과수원 지대인 칸다하르의 반소 저항은 지역 성직자들이 이끌었는데 이 지역은 수목이 울창하여 소련군에 대한 매복공격이 수월했다. 이 때문에 소련은 이 지역에 역사상 가장 많은 지뢰를 설치하였다. 소련군이 철수한 뒤 폐허가 된 과수원 지대에서 농민들은 아편을 재배하기 시작했고, 이 지역 무자헤딘 출신의 군벌들이 통행세를 뜯는 등 약탈을 자행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뮬라 오마르가 이끄는 탈레반이었다. 오마르는 “무자헤딘이라 불리는 자들이 가하는 고통에서 국민들을 구해내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우리는 전능한 신을 믿는다”고 선언했다.

탈레반에 결정적으로 힘을 실어준 것은 파키스탄이었다. 당시 파키스탄도 아프간 내 여러 세력의 갈등에 신물이 난 상태에서 아프간을 이끌 새로운 세력을 찾고 있었다. 1993년 총리가 된 베나지르 부토(1953~2007)는 파키스탄 페샤와르에서 아프간 카불을 거쳐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를 잇는 루트를 연결하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슬람주의 성향이 짙은 파키스탄 정보국(ISI)이 탈레반을 지원하여 이 통로를 확보하였다. 1994년 12월까지 파키스탄에 거주하던 1만2000명의 파슈툰족 청년들이 아프간 탈레반에 합세하게 된다.

한편 오사마 빈 라덴은 무자헤딘 간의 내전에 염증을 느끼고 1990년 사우디로 귀환하여 아랍아프간들의 정착지원사업을 벌였다. 그는 4000여명을 메카와 메디나에 정착하게 하는 한편 전사자 가족들을 지원하였다. 그런데 빈 라덴을 다시 충동하는 긴박한 사태가 벌어졌다. 1991년 사담 후세인 대통령의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것이다. 당초 빈 라덴은 사우디 정부에 아랍아프간들을 동원하여 이라크군에 맞서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사우디 당국은 빈 라덴의 제안을 일축하면서 대신 미군을 끌어들였다. 사우디 당국이 미군 54만명의 주둔을 허용하자 이에 실망한 빈 라덴은 수단 등에 머물며 사우디 왕정과 미국을 맹비난했다. 1996년 빈 라덴은 3명의 처와 13명의 자식들, 그리고 소수의 아랍아프간 전사들과 함께 아프간으로 돌아갔다.

1996년 8월 그는 처음으로 미국인들을 상대로 지하드를 벌일 것을 촉구하는 ‘파트와(fatwa)’를 발표했다. 파트와는 이슬람 성직자가 발표하는 일종의 이슬람법령이다. 빈 라덴이 성직자는 아니었지만 무자헤딘 사이에서는 영향력이 매우 컸다.

1997년 칸다하르로 거처를 옮긴 그는 뮬라 오마르가 이끄는 탈레반의 보호를 받게 된다. 1998년 2월 23일 자신이 건설을 담당했던 호스트 캠프에서 열린 알 카에다 모임에서 그는 ‘유대인과 십자군과 싸우는 지하드를 위한 국제이슬람전선’ 명의로 “미국과 동맹국의 시민과 군인들을 죽이는 것이 모든 무슬림들의 의무”라는 파트와를 다시 발표했다.

이어 1998년 8월 케냐와 탄자니아 주재 미국대사관 테러로 220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빈 라덴은 최악의 이슬람 테러 주모자로 떠오른다. 1998년 11월 미국은 빈 라덴의 목에 현상금 500만달러를 걸었다. 미국은 탈레반에 빈 라덴 추방을 요구했지만, 파슈툰 탈레반들은 ‘손님을 내쫓는 것은 파슈툰의 관습에 어긋난다’며 거부했다. 당시 탈레반은 빈 라덴을 미국과의 협상카드로 보았다. 미 국무부는 위성전화를 통해 뮬라 오마르와 직접 장시간 통화하며 협상를 벌였지만 실패했다. 미국은 1999년 2월까지 빈 라덴을 인도하라고 요구했지만 탈레반은 그를 숨겨놓고 있었다.

아프간 사태 뒤에는 미 CIA 그림자

2001년 미국 뉴욕에서 발생한 9·11테러 이후 아프간 사태는 다시 급변한다.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테러의 배후에 알 카에다와 오사마 빈 라덴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미국은 테러리스트들을 돕거나 숨겨주는 행위도 테러로 간주했다. 알 카에다뿐만 아니라 탈레반도 미국의 적이 되었다.

2001년 10월부터 시작된 미국과 동맹군의 공격으로 탈레반 정권은 두 달 만에 붕괴되었다. 미국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했다는 이유로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하여 후세인 정권도 몰아냈다. 후세인 정권 붕괴는 또 다른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을 키우는 계기가 됐다. 이라크의 몰락한 수니파 테러리스트들이 시아파들을 상대로 무수한 테러 공격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 아랍국, 중앙아시아, 러시아의 체첸공화국과 서유럽 국가 등에서 몰려든 테러리스트들로 구성된 이슬람국가(IS)라는 테러조직이 기승을 부렸다. 1999년 오사마 빈 라덴의 알 카에다에 충성을 맹세하며 결성된 IS는 2010년대에는 이라크 북부의 모술과 시리아의 라카 등을 점령하여 1000만 이상의 주민들을 중세 이슬람의 율법에 따라 지배한다며 약탈하고 살해하였다.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한 이후 후세인은 2006년 12월 이라크에서 재판을 통해 처형되었다. 오사마 빈 라덴 역시 미국 오바마 행정부 시절이던 2012년 5월 사살되었다. 탈레반 지도자인 뮬라 오마르는 2013년 3월에 결핵으로 사망했다. IS의 마지막 리더인 알 바그다디도 2019년 10월 미군의 공격을 받자 자폭하여 사망했다. 이들이 사라지면 테러와의 전쟁을 벌인 미군의 목표는 달성된 것일까?

존 쿨리는 이슬람 테러조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슬람단체는 포도송이를 의미하는 ‘안쿠드(anquds)’라는 세포들로 나뉜다. 포도송이처럼 여러 안쿠드가 통합하여 별도의 조직을 구성한다 하여도 각각의 안쿠드는 해체되지 않는다. 각각의 안쿠드 우두머리가 ‘아미르(amir)’이다. 아미르들이 모여서 일종의 협의체인 마줄리스 알 슈라(majlis al shura)를 이룬다. 미국의 지원을 받아 아프간에 참전한 전사들의 조직은 이와 같다. 이들은 귀국 후에 같은 형태를 유지하며 이슬람국가 건설을 위한 투쟁을 벌인다.”

지난 8월 26일 카불공항 인근에서 테러를 저지른 IS-K는 IS의 호라산 지역 분파로 알려지고 있다. 호라산은 오사마 빈 라덴이 ‘알 카에다’를 결성한 곳이다. 아프간에는 소련에 저항하도록 무자헤딘을 지원한 미국 CIA의 망령이 어른거리고 있다. 이슬람 테러를 준비하는 이슬람의 ‘안쿠드’가 과연 IS-K 하나뿐일까?

우태영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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