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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6호] 2021.09.27

일본 정치 열풍 몰고 온 ‘세 마리 코끼리’는?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silkroad100@gmail.com

▲ 지난 9월 18일 일본 기자협회 초청 자민당 총재 경선 토론회에 참석한 후보들. 왼쪽부터 고노 다로 행정개혁담당상, 기시다 후미오 전 정무조정회장, 다카이치 사나에 전 총무상, 노다 세이코 자민당 간사장 대행. photo 뉴시스
일본 정치가 열풍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9월 중순 이후 열도의 신문·방송·인터넷을 주름잡는 키워드가 바로 ‘정치’다. 9월 29일 치러질 자민당 총재 선거에 나선 후보자들 사이의 정책토론이나 인터뷰가 전국에 울려퍼지고 있다. 개별 후보자들에 대한 지지나 반대, 정책 관련 갑론을박, 난상토론이 온라인 디지털 세계를 장악한 상태다. 공교롭게도 내년 대통령 선거에 나설 한국의 여야 후보 간 경선도 비슷한 시기에 시작됐다. 지지자들의 열기를 제외하고 다뤄지고 있는 이슈의 심각성을 보면 일본 정치가 훨씬 더 뜨겁다.
   
   정치야말로 코로나19 사태가 불러온 고독과 고립으로 인한 스트레스 해결에 최적일지 모르겠다. 올림픽 당시 보여줬던 국민적 무관심과 지금의 정치 열기가 너무도 대조적이란 점에서 일본인 스스로도 깜짝 놀라는 분위기다. 필자의 지인인 일본인 기자는 ‘방 안 코끼리(Elephant in the room)’가 정치 열풍의 배경 중 하나라고 분석한다. ‘방 안 코끼리’란, 얼마나 중요한지는 모두 다 알고 있지만 말로 꺼내거나 직접 해결에 나서기를 꺼리는 문제를 의미한다. 책임과 희생이 필요하고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기 때문에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가려는 심리가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좁고 불편하며 악취도 나지만 좁은 방 안에서 코끼리와 동고동락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경우 1인당 1800만원에 달한다는 국가채무가 안방을 차지한 거대한 코끼리라 볼 수 있다. 미래 세대에 쓰나미로 들이닥치겠지만, 대부분은 아예 모른 척 눈을 감고 살아간다.
   
   
   터부시 ‘코끼리’ 언급 시작한 후보들
   
   9월 말 자민당 총재 선거에 나선 인물은 고노 다로(河野太郎) 행정개혁담당상,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전 총무상,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전 정무조정회장, 노다 세이코(野田聖子) 자민당 간사장 대행 등 4명이다.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전 자민당 간사장은 중도에 포기한 채 ‘고노 지지’로 돌아섰다. 유세에 나선 4명 후보자의 행적을 살펴보면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방 안 코끼리 문제를 ‘적극’ 언급하고 있다. 국민들 모두가 알고 싶어 하기 때문에 대충 피할 수도 없다. 물론 코끼리를 집 밖으로 내쫓는 대안도 제시한다. 터부시했거나 생략돼왔던 문제들이 자민당 정치무대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일본은 방 안 코끼리가 한 마리가 아닌 수십, 수백 마리에 달하는 나라다. 정치, 경제, 사회, 외교 등 국가 전 분야에 걸쳐 서식하고 있다. 전부 중요하지만 한국 입장에서 볼 때 주목할 이슈는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된다. 먼저 탈원전 코끼리다.
   
   일본에서 탈원전 논리는 2011년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나타났다. 반핵 논리와 함께 일본인 대부분이 찬성하는 분위기가 자리 잡았다. 후쿠시마(福島)원전 폭발사고로 인해 일본 땅의 4분의1이 불모지로 남을 뻔한 대재앙의 기억 때문이다. 쓰나미에 떠내려간 수만 명의 재난민도 문제지만, 원전 폭발 공포 속에 살았던 당시의 악몽이 일본 국민들 뇌리에 새겨져 있다. 일본의 탈원전 논의는 3·11 당시 일본인 모두가 체험한, 풀뿌리민주주의 차원의 이슈다. 같은 탈원전 이슈지만 한국 정부의 상명하복 주먹구구식 일방통행과는 다르다.
   
   풀뿌리민주주의는 특정 이념이나 정치적 슬로건과 무관하다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변화에 맞춰 적응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민주주의 최대 장점이다. 상식이지만 민주주의는 생활 그 자체에서 시작된다. 이념은 그 이후다. 후쿠시마 악몽 이후 대세로 자리 잡았던 탈원전 분위기는 지금은 좀 달라졌다. CO2 감소나 환경문제를 감안할 때 탈원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세상만사가 그러하듯 싫다고 해서 전부 그만둘 수는 없다. 100% 에너지 수입국 일본의 상황을 감안할 때 ‘탈원전=전기세 수직 인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3·11 악몽이 과거사로 변하고 더불어 탈원전 이슈도 빛을 잃게 된다. 그렇지만 국민정서를 감안할 때 원전 문제를 한순간에 역류시킬 수는 없다. 원전 가동이 현실적 대안이라는 것을 알지만 정치가들 모두 입을 다물고 방관해왔다. 탈원전 코끼리의 탄생인 셈이다.
   
   
   후보 4명 모두 원전 가동 목소리
   
   그러나 올해 자민당 총재 선거는 다르다. 탈원전 코끼리 퇴출에 앞장서는 쿠데타 현장으로 변해버렸다. 후보자들 간의 미묘한 차이는 있지만 원전 가동을 당연시하는 것이 대세다. ‘탈원전 문제 재논의’라는 식의 꼬리표를 달고 있지만 원전 가동은 후보자 4명이 내세우는 정책의 공통분모다.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총재 당선이 유력시된다는 고노다. 원래 3·11 직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전 총리와 함께 탈원전 선두에 섰었지만, 입장이 180도 급선회했다. “안전이 확보된 원전은 당분간은 재가동할 수 있다. 그게 현실적 대안이라 생각한다”는 게 그의 말이다.
   
   두 번째 주목할 코끼리는 안보 관련 이슈다. ‘자위대 재무장과 일본 군사대국’에 관한 얘기는 한국인 모두가 신봉하는 이념이자 신화다. 불에 데었던 20세기 전반부의 체험에서 비롯됐겠지만 일본이 군사적으로 조금만 움직여도 제국주의 군대의 부활로 규정한다. 일본에 대한 갖가지 비난이 이어지고 반일 시위도 뒤따른다. 일본에서 보면 한국의 그 같은 알레르기 반응이 너무도 고맙게 느껴졌을 듯하다. 한국·중국의 반발과 비난을 고려해 열도의 국방비를 증액할 수 없다는 ‘일본식 핑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흔히들 오해하지만 미국이야말로 일본의 국방비 증액과 군사화를 줄기차게 요청해온 장본인이다. 일본 스스로가 국방비 증액과 자위대 강화를 외친 적은 극히 드물다. 역설적이지만 평화헌법을 만들어 일본의 군사화를 철저히 막은 나라가 미국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냉전기와, 21세기 중국 대두와 함께 일본의 군사화를 애타게 기대하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GDP 1% 방위비 무너뜨린 다카이치
   
   그러나 일본은 꿈쩍도 안 한다. 군사화로 나아갈 경우 과거의 악몽을 되풀이할 수 있다는 반전 여론도 있지만 정작 가장 큰 이유는 딴 곳에 있다. 바로 돈이다. 군사화는 천문학적인 돈을 필요로 한다. 병력 증강도 필요하지만 미제 첨단무기 구입에 엄청난 돈이 들어간다. 그 같은 현실을 감안해 미국이 만든 평화헌법과 한국·중국의 반감을 적절히 조합하면서 군사화를 의도적으로 늦춘다. 국내총생산(GDP) 내 방위비 예산 1% 심리선은 그 같은 상황에서 탄생한 암묵적 합의다. 반일의 한 가닥이지만 ‘일본=군사대국’이라 비난·경계하는 사람들이 하나 알아야 할 부분이 있다. 국방비와 상비군을 기준으로 할 때 한국은 이미 일본에 준하는 군사강국으로 떠오른 상황이다. 내년도 국방 예산을 보자. 한국은 477억달러, 일본은 493억달러에 달한다. 절대액수로 보면 일본이 조금 많지만, 인구와 GDP 내 국방비 비율 2.61%로 보면 한국이 2배 정도 높다.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 진짜 군사강국이다.
   
   한국·중국의 알레르기 반응에 힘입어 일본은 GDP 내 1% 이하 국방비 마지노선을 꾸준히 지켜왔다. 그러나 그 같은 입장은 자민당 총재 선거를 통해 대폭 수정되고 있다. 출발점은 여성 총리 1호에 가장 가깝다는 다카이치다. 다카이치는 대놓고 “유럽 선진국 국방비 규모에 준하는 GDP 대비 2%인 10조엔(약 900억달러) 정도의 국방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다카이치의 2% 국방비 발언은 기존의 자민당 정치에서 꺼내기 힘들었던 ‘안보 코끼리’의 대표적 본보기다. 다카이치는 내친김에 헌법 9조 개정과, 국방만이 아닌 경제 문제도 포함한 ‘경제안보포괄법’을 만들어 일본 수호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에서는 다카이치를 ‘맛이 간 우익, 아베의 아바타’로 보면서 비난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어떨까? 필자 판단이지만, 거리로 나가 국민 전체를 상대로 한국식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다카이치가 대통령에 오를 듯하다.
   
   지난 9월 9일 실시한 야후 인터넷 투표를 보면 후보자 4명 가운데 다카이치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압도적이다. 전체 23만명 투표자 가운데 49%인 11만명이 다카이치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민당 내 파벌정치에서 수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고노는 6만2000표, 26% 지지에 불과하다. 일본의 인터넷 여론은 우성향이 강한 젊은이들이 주도한다. 다카이치 열기가 예상은 됐지만 생각보다 엄청 높다는 점에서 일본인 모두가 놀라는 분위기다. 일본인에게 다카이치의 이미지는 안보와 책임정치로 연결된다.
   
   지난해 중국 해경은 센카쿠(尖閣)열도를 333일 침범했다. 1년간 거의 매일 일본 영토를 농락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바다에서 벌어지는 중국의 만행은 매일 TV를 통해 일본 전역에 전해지고 있다. 일본인들의 불만과 불안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헌법 개정을 통한 자위대 강화는 기시다도 강조하는 긴급 현안이다. 국방비 2% 달성이 지금 당장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법사위에 올라간 이상, 급물살을 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의 압력도 한층 더해갈 것이다. 일본의 해상 보급 라인인 남중국·동중국 바다를 중국이 유린하는 한 일본도 더 이상 수수방관할 수가 없다.
   
   
   금기시되던 여계천황도 논전
   
   세 번째 주목할 코끼리는 여계천황(女系天皇) 문제다. ‘여성도 차기 천황에 오를 수 있는가’라는 논의다. 반대로 얘기하자면 ‘남성만이 천황에 오를 수 있다’라는 논리다. 1960년생 나루히토(徳仁)는 2019년 레이와(令和) 신시대를 연 천황이다. 아들이 없고 2001년생 딸 아이코(愛子) 단 한 명만 있다. 아들만으로 이어져내려온 126대에 걸친 천황 역사가 어떻게 될지 모두가 궁금해하고 있다. 일본 천황은 상징적 존재다. 실제 법적인 구속력은 내각에서 만들고 집행한다. 그러나 핵심은 126대에 이르는 전통과 역사다. 여계천황 논의는 그동안 주간지나 정치평론가의 흥밋거리 정도로 취급돼 왔다. 일본에서 천황 관련 이슈는 터부 중 터부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 그러나 나루히토가 딸만 가진 상태에서 언제까지 침묵으로 갈 수만은 없다. 그러던 중 올해 자민당 총재 선거를 통해 일시에 공론화된 것이다.
   
   현재 크게 보면 남성만 가능, 여성도 선택안 중 하나, 여성 이외 (남성도) 가능하다는 세 가지 안으로 나눠 있다. ‘남성만’은 다카이치, ‘여성도 선택안 중 하나’는 노다, ‘여성 이외도 가능’은 기시다의 생각이다. 고노는 명확한 답을 피하고 있다. 일본 보수층의 생각이지만 여성이 천황에 오를 경우 황실을 중심으로 한 일본 특유의 구심력이 사라질 것으로 전망한다. 여성 차별이란 시각에서 우려라 볼 수도 있지만 여성 천황과 결혼할 남성이 어떻게 행동할지에 따라 126대에 걸친 황실의 전통과 역사가 흔들릴 수 있다고 본다. 여계왕(女系王)을 인정한 후 권위가 사라진 유럽 왕실의 역사는 최적의 반면교사다.
   
   방 안 코끼리 퇴출 논의와 실천은 2021년 일본 총선과 이후의 정국을 읽는 핵심 상수다. 4명의 총재 후보자는 물론 2년 전 천황에 오른 나루히토 모두 1960년대 전후 탄생한 이른바 버블세대이다. 전쟁을 직접 겪었거나, 전쟁터에 나갔던 아버지를 둔 세대와 확연히 다른 인물들이다. 100세 장수 시대라 세대 변화를 피부로 느끼기 어렵다. 버블세대가 벌이는 정치 열풍이 일본은 물론 한국과 전 세계로 파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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