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여, ‘협곡회제’ 공자성적도, 1700년, 비단에 색, 32×57cm, 전주박물관
김진여, ‘협곡회제’ 공자성적도, 1700년, 비단에 색, 32×57cm, 전주박물관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순방 도중 발생한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사건으로 나라가 떠들썩했다. 나라 밖에까지 가서 추태를 벌였으니 망신살이 단단히 뻗쳤다. ‘국격(國格)’은 지도자 한 사람의 능력만으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협력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그림자처럼 보필하고 이끌어주고 때론 단호한 목소리로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책사(策士)가 옆에 있어야 지도자가 길을 잃지 않고 국정을 잘 이끌어갈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수많은 왕과 제후들이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노력한 것도 부국강병의 기본이 사람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물며 발목을 잡아서야 되겠는가.

중국 노(魯)나라 정공(定公)10년(기원전500) 봄이었다. 제(齊)나라 경공(景公)이 제와 노, 양국의 우호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해 협곡에서 만나자고 사신을 보냈다. 노나라 정공은 수레만 타고 경호도 없이 그곳으로 가려고 했다. 마침 공자가 대사구로 있으면서 임시로 재상의 일을 집행하고 있었다. 공자가 보기에 정공의 행동은 한 나라의 대표로서는 격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공자가 아뢰었다.

“제가 듣기로는 문(文)에 관련된 일을 하려면 반드시 무(武)를 갖춰야 하며, 무와 관련된 일을 하려면 반드시 문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옛날에 제후가 국경을 벗어날 때 반드시 문무관원들에게 시중들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좌우사마(左右司馬)를 거느리고 가시기를 청합니다.”

왕의 행동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뜻이다. 한 나라의 대표답게 의전을 갖추고 가라는 충고다. 정공은 공자의 말을 따라 좌우사마를 데리고 갔다. 협곡에서 회맹(會盟)할 단을 마련하고 흙계단을 세 단계로 만든 후 예법에 따라 경공과 서로 읍하고 사양하면서 단에 올랐다. 서로 술잔을 돌리는 예가 끝나자 제나라의 관리가 나오더니 악공들에게 미리 준비한 음악을 사방에서 연주하게 했다. 그때 제나라 군사들이 음악에 맞춰 깃발과 창칼을 들고 북을 두드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강대국인 제나라의 힘을 과시하면서 약소국인 노나라 정공을 위협하려는 처사였다. 위기였다.

당시 제나라는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세력이 크고 부유한 강국이었다. 아무리 큰 나라라고 해도 그렇지, 이 자리는 두 나라 군주가 국가 대 국가를 대표해서 만난 자리가 아닌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힘의 우위를 핑계로 상대방을 무시해 수치심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을 모를 리 없는 공자였다. 공자가 재빨리 나와 한 발에 한 계단씩 올라가 대에 오르더니 마지막 한 계단을 오르지 않고 긴 소매를 쳐들고 말했다. “두 군주께서 우호 관계를 위해 만나셨는데 어찌하여 이곳에서 오랑캐의 음악을 연주하게 하십니까? 청컨대 담당 관리에게 명령하십시오!”

담당 관리가 그들을 물러나게 했으나 그들이 물러나지 않자 주위의 수행원들이 안자(晏子)와 경공의 안색을 살폈다. 경공은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하면서 손을 저어 그들을 물러가게 했다. 얼마 후 제나라의 담당 관리가 달려 나와 말했다. “청컨대 궁중의 음악을 연주하게 하십시오.”

경공이 허락했다. 광대와 난쟁이가 재주를 부리며 나왔다. 이들은 희극적인 분장을 하고 나와 사람들을 웃기고 재주를 부렸는데 노나라 정공을 야유하고 비꼬기 위한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공자가 발끈했다. 공자가 또 한 발에 한 계단씩 올라가 대에 오르더니 마지막 한 계단을 오르지 않고 말했다. “보잘것없는 무리로써 제후를 미혹되게 하는 자는 마땅히 죽여야 합니다. 청컨대 담당 관리에게 명하십시오!”

곧바로 담당 관리가 법을 적용해 집행했다. 음란한 행동을 하던 무리의 손과 발이 다른 곳으로 떨어져 나갔다. 이 모습을 본 경공은 제나라의 도의(道義)가 상대방에 못 미친다는 것을 알고는 놀라고 두려워했다.

이 사건은 공자가 대사구에 오른 후 대외적 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사례로 ‘협곡회제(夾谷會齊·협곡에서 제나라와 회합을 가지다)’라는 제목으로 ‘공자성적도’에 실려 있다. 그림은 회담하는 두 군주를 우측에 배치하고 두 무리의 악공들을 좌측에 배치했다. 좌측의 악공들 중 웃통을 벗어젖히고 깃발과 창칼을 휘두르며 춤을 추는 병사들은 상단에 배치했다. 광대와 난쟁이와 미녀들은 그 아래에 배치했다. 이들은 원래 시간 순서에 따라 등장하는 것이 정상이나 그림에서는 시간을 무시했다. 옛 그림에서 설화적 내용을 보여줄 때 종종 활용되는 기법이다. 화면의 상당 부분을 악공들에게 할애한 것은 이야기의 내용이 그들을 대상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두 군주는 단 위에 앉아 진지하게 대화를 하고 있다. 우측에 앉은 군주 뒤로 질서정연하게 무리지어 서 있는 측이 노나라 정공과 그 신하들이다. 좌측에 앉은 군주 뒤로 자중지란에 빠진 듯 허둥대는 신하들 측이 제나라 경공과 그 신하들이다. 우측이 정(靜)이라면 좌측은 동(動)이다. 동은 움직임 때문에 정을 이길 것 같지만 질서를 잃은 움직임은 오합지졸에 가깝다. 제나라 경공과 악공들이 화면에서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무게중심이 오른쪽으로 기운 것은 그 때문이다. 노나라 신하들은 단 위에 있는 사람이나 단 아래 있는 사람이나 한결같이 두 손을 앞으로 모아 맞잡고 서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를 잃지 않는 노나라 사람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다.

이 그림의 하이라이트는 공자다. 공자는 두 나라의 군주 앞에 서서 두 손을 맞잡은 채 단호한 어조로 제나라의 무례함을 항의한다. 공자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크게 그렸다. 원래 몸집이 크고 키가 큰 공자였지만 그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그림 속에서 그의 몸집은 지나칠 정도로 크다. 마치 작금의 혼란을 정리할 사람이 공자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는 것 같다.

공자는 군주 앞에 두 차례 나아갈 때마다 한 발에 한 계단씩 올라가 대에 오르더니 ‘마지막 한 계단은 오르지 않고’ 말했다. 군주와 신하와의 관계를 지키려 함이다. 어떤 경우에도 군주의 위상은 높이되 신하된 자의 본분은 지키겠다는 태도다. 어쩌다 작은 권력이라도 손에 쥐게 되면 분수를 잃고 날뛰는 자들과는 다르다. 군주가 군주로서의 체통을 잊을 때 그 곁에서 군주의 역할을 일깨워주고 대신해주는 자가 진정한 신하다. 하물며 군주가 애써 이뤄놓은 성과를 와르르 무너뜨리게 하는 몰지각한 신하의 행동을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 이야기의 결론은 이렇다. 회담을 끝내고 제나라로 돌아간 경공은 군신들에게 말한다. “노나라는 군자의 도(道)로써 그 군주를 보필했는데 그대들은 단지 오랑캐의 도로써 과인을 가르쳐서 노나라 왕에게 죄를 짓게 되었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담당 관리가 나와서 대답하여 말했다. “군자는 잘못을 저지르면 물질로 사과하는데, 소인은 잘못을 저지르면 꾸민 말로 사과합니다. 당신께서 만일 그 일을 걱정하신다면 물질로 사과하십시오.”

이에 제나라 경공은 즉시 노나라로부터 빼앗은 운(鄆)과 민양(汶陽), 구음(龜陰)의 전답을 돌려줌으로써 잘못을 사과했다. 이 이야기는 ‘공자성적도’에 ‘귀전사과(歸田謝過·토지를 돌려주며 사과하다)’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아름다운 결말이다. 군주를 보필하는 자의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주는 교훈이다.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필요한 덕목이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그림공부, 사람공부’

조정육 미술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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