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재진절양’ 공자성적도, 1742년, 종이에 연한 색, 33×54㎝, 국립중앙박물관
작자 미상, ‘재진절양’ 공자성적도, 1742년, 종이에 연한 색, 33×54㎝, 국립중앙박물관

이상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사람. 누군가는 그를 낭만주의자라 부른다. 그러나 눈보라 치는 날 양식은 떨어져 가는데 수많은 식솔을 거느리고 직장을 찾아다니는 사람에게 유랑은 결코 낭만도 멋도 아니다. 그저 가야만 하니까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가는 길이 고달파도 중도에 그만둘 수도 없다. 어떤 난관이 가로막더라도 무조건 돌파해야 한다. 명분 때문에 떠나온 만큼 명분이 생겨야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공자의 유랑생활은 낭만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참고 견뎌야 하는 고난의 시간은 성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공자가 위(衛)나라를 떠나 송(宋)나라로 향할 때였다. 제자들과 함께 큰 나무 아래 앉아 예법(禮法)에 대해 문답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송나라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나무를 부러뜨리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더니 막무가내로 공자를 죽이려고 했다. 그들은 당시 송나라에서 한창 권세를 휘두르고 있던 사마(司馬) 환퇴(桓魋)의 수하들이었다. 깜짝 놀란 제자들이 공자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빨리 몸을 피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당황한 제자들과는 달리 공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면서 엄숙하게 말했다.

“하늘이 나에게 큰 덕을 내리셨는데, 환퇴 따위가 감히 나를 어찌할 수 있겠는가?”

환퇴가 무슨 이유로 공자를 죽이려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이 사건은 공자의 방랑생활이 상당히 고달팠음을 말해줄 뿐이다. 공자가 나무 아래서 환퇴의 수하들에게 수난당한 이야기는 ‘공자성적도’에 ‘송인벌목(宋人伐木)’이라는 제목으로 생생하게 실려 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은 또 있었다. 공자가 진(陳)나라에 이르러 광(匡)이라는 지역을 지날 때였다. 공자를 양호(陽虎)로 착각한 광 지역 사람들이 공자 일행을 급습해 행패를 부렸다. 공자의 생김새가 양호와 비슷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광 사람들은 노나라의 실력자인 양호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 당시 광 지역은 노나라 군대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포악한 양호가 노나라 사람들을 다른 나라의 포로로 보낸 일이 있었다. 이 때문에 광 사람들은 양호를 보기만 해도 잡아 죽이려고 벼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양호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광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손에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 양호로 오인한 공자를 죽이려고 했다. 이번에도 역시 공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침착성을 잃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왕(文王)께서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 문화의 전통이 내게 지워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늘이 이 전통을 없애려 했다면 후손들은 이 문화에 참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늘이 아직 이 문화를 버리지 않았으니 광 땅의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

‘논어’ 자한 편에 나오는 얘기다. 공자 자신이 태평성대를 이루었던 주(周)나라 문왕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자존감과 당당함이 들어 있는 발언이다. 이 사건 역시 ‘광인해위(匡人解圍)’라는 제목으로 ‘공자성적도’에 실려 있다. 학자들은 ‘송인벌목’과 ‘광인해위’가 같은 사건인데 달리 표현되었다고 해석한다. 공자를 신격화하려는 후대의 유학자들이 지어낸 ‘공자 신화’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신화든 사실이든 두 이야기 속에는 여러 나라를 유랑해야 하는 공자의 고단함이 묻어 있다.

공자의 수난은 위의 두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불행은 항상 예고 없이 찾아온다. 급작스럽게 들이닥친다. 한 번 올 때 결단을 내려는 듯 파도처럼 밀려온다. 가차 없고 냉정하다. 정처 없는 나그네에게는 더 빈번하게 찾아온다. 공자가 진(陳)나라에서 위(衛)나라로 가기 위해 포(蒲) 지역을 지날 때였다. 위나라의 반란군인 공숙씨(公叔氏)와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들은 공자 일행을 가로막고 그곳을 지나지 못하게 했다. 그때 마침 공양유(公良孺)라는 제자가 자기 수레 다섯 채를 끌고 나타났다. 공양유는 용감하게 반란군과 맞서 싸우며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내가 스승님을 따라 광 지역에 갔을 때 환란을 당했는데 지금 다시 이곳에서 이런 환란을 당하니 이것이 내 운명인 것 같다. 내가 스승님을 모시고 두 번이나 이런 환란을 당하느니 차라리 나가서 싸우다 죽는 것이 더 낫겠다.” 그러면서 필사적으로 길을 뚫고 나갔다. 이에 겁먹은 포 지역 사람들이 길을 비켜 주었다. 공자는 겨우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모습 또한 ‘오승종유(五乘從遊)’라는 제목으로 ‘공자성적도’에 실려 있다.

공자가 수난당한 이야기의 절정은 ‘재진절양(在陳絶糧·진나라에서 식량이 떨어지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공자가 초(楚)나라 소왕(昭王)의 초빙을 받고 가는 중이었다. 초나라를 가려면 진(陳)나라와 채(蔡)나라를 지나가야만 했다. 진나라와 채나라는 공자가 초나라에 입국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공자가 초나라에 등용되어 강국이 되면 인접한 두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군사를 보내 공자 일행을 포위했다. 시간이 흐르자 식량이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제자들 중에 병에 걸린 환자가 속출했다. 그러나 공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태연한 모습으로 시를 읊고 거문고를 연주했다. ‘재진절양’은 그 상황을 그린 작품이다. 제자들에 둘러싸인 공자가 땅바닥에 앉아 있다. 공자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평소와 다름없이 제자들에게 수업을 하고 있다. 공자가 시를 읊자 제자들이 진지한 자세로 듣는다. 그들을 포위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그저 한가롭게 소풍 나온 사람들의 야유회 장면을 그린 것 같다. ‘재진절양’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운명을 향해 고개 숙이는 일이 없는 철학자의 평정심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런 공자를 제자라고 모두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위기에 처해서도 한가롭기만 한 스승을 보고 화가 난 자로(子路)가 공자께 툴툴거렸다.

“군자도 곤궁해질 때가 있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군자는 곤궁함을 굳게 버티지만, 소인은 곤궁해지면 아무 짓이나 한다.”

‘논어’ 위평공 편에 나오는 얘기다. 이 상황에 대해 ‘여씨춘추’에는 좀 더 자세히 묘사돼 있다. 자로와 자공(子貢)이 곤궁함에 대해 불평하자 공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곤궁함은 ‘쌀밥이 떨어지고 명아주국을 끓일 쌀가루가 없는 것’이 아니라 ‘군자가 도에 궁색해진 것을 일컫는 말’이라고 새롭게 정의한다. 지금 공자가 ‘인의(仁義)의 도를 껴안음으로써 안으로는 자신을 살펴봐서 도에 꺼림칙한 것이 없고 어려운 일을 당해 덕을 잃지 않았으니’ 지금의 상황은 결코 곤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얘기를 들은 자공은 지금까지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도 몰랐고, 땅이 얼마나 깊은지도 몰랐다’는 얘기로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 결국 이때의 수난은 자공이 초나라에 알림으로써 벗어날 수 있었다.

일련의 사건들은 공자가 69세에 고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14년 동안 계속됐다. 그러나 공자는 천하에 도가 행해지고 봉건적인 예악질서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자신의 신념을 결코 저버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의 이상과 목적은 이상적인 봉건질서의 주창이었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본분을 다하는 것이 이상적인 사회라 여겼다.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공자는 끊임없이 성군(聖君)을 찾아다녔고 정치적 출구를 모색했다. 공자의 이런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난했다. 이것은 공자가 유랑 중에 견뎌야만 했던 또 다른 환란이었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그림공부, 사람공부’

조정육 미술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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