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최준석
ⓒphoto 최준석

영화배우 신성일을 죽인 건 폐암이었다. 이광호 박사는 한국화학연구원에서 폐암 신약을 연구한다. 지난 11월 9일 대전 대덕연구개발특구 내 한국화학연구원에서 만난 이 박사는 “폐암이 암 중에서 한국인을 가장 많이 죽인다”고 말했다. 나는 암 중에서 최대 사망 원인은 위암이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폐암을 연구하는 이유에 관해 암의 발병 메커니즘이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폐암 환자가 많은 것이 두 번째 연구 이유라고 했다. 그는 폐암 중에서도 한국인 폐암 환자의 30%를 차지하는 EGFR(상피세포 성장인자 수용체)을 공략한다. EGFR로 인한 폐암 발병은 유럽인에게는 10% 정도로 낮으나 한국·중국·일본인에게는 흔하다. 흔한 만큼 치료제 시장도 크다.

암의 발병 메커니즘은 임상의학자나 생물학자가 연구한다. 화학자는 그를 바탕으로 어디를 막으면 폐암을 공략하는 게 효과적인가를 연구한다. 이 박사가 최근 개발한 폐암 치료제는 EFGR의 4세대 돌연변이를 공격한다.

이 박사는 “신약 개발 화학자의 목표는 내가 만든 화합물이 임상실험에 들어가는 것”이라며 “신약 개발로까지 이어지면 더할 나위 없이 좋으나, 그렇지 않더라도 임상까지 간 것만 해도 좋다”고 말했다. 임상실험은 NRDO(No Research Development Only)와 같은 전문업체가 넘겨받아 진행한다. 신약 개발로까지 이어지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박사는 서울대 화학과 86학번. 부산 동인고 출신이다. 서울대에서 석사까지 마친 후 병역의무를 대신하기 위해 CJ연구소에 들어갔다. 경기도 이천에 있는 CJ연구소는 신약을 개발하는 곳이었다. 1997년 박사학위를 하러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 시골 도시 투스칼루사(Tuscaloosa)로 갔다. 공부밖에 할 게 없는 시골이다. 1994년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배우 톰 행크스가 미식축구 선수로 나왔는데 그 미식축구부가 속한 앨라배마대학이 이곳에 있다. 톰 행크스가 이 대학 미식축구장에서 공을 들고 뛰는 장면이 영화에 나온다. 이 박사는 “박사학위를 두 개 땄다. 화학 박사와 미식축구 박사 학위 두 개다”라며 “요즘도 미국 미식축구 경기 상황을 인터넷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 박사가 이곳에 유학간 건 지도교수 때문이었다. 서울대 공업화학과 출신인 한국인 차진근 교수가 이곳에 있었다. 이 박사는 “차 교수는 ‘전 합성(total synthesis)’을 연구하는, 미국에서도 얼마 안 되는 화학자였다”고 말했다. 이광호 박사에 따르면 ‘전 합성’은 산악인이 에베레스트산에 오르는 이유와 비슷하다. 산이 그곳에 있기 때문에 산을 오른다고 산악인들이 말하듯이 화학자들도 전 합성이라는 매우 어려운 화합물 합성을 해내기 위해 전 합성을 연구한다고 말한다. 논문을 많이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신약개발로 진로를 정한 건 박사후연구원으로 2001년에 간 하버드대학에서다.

“하버드가 있는 보스턴이 생명기술(Bio Technology) 산업의 세계적 중심지다. IT산업의 중심지가 미국 서부의 실리콘밸리라면, BT의 세계적인 중심지가 보스턴이다.”

그는 보스턴에 BT 생태계가 잘 갖춰져 있다고 했다. 연구소, 마켓서비스 기업, 바이오벤처 자본이 다 모여 있다고 한다. 연구인력은 하버드대학, MIT 말고도 BT가 강한 브랜다이스대학, 보스턴칼리지, 보스턴유니버시티, 터프츠대학이 배출한다. 보스턴은 세계적인 병원도 끼고 있다. MGH라고 불리는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이다. MGH는 하버드대학 외에 다른 대학과도 협업한다. “한국의 BT기업도 보스턴으로 몰려들고 있다. 위성연구소(satelite lab)를 두고 업계 정보와 흐름을 수집한다.” 보스턴에 진출한 한국 기업 이름을 얘기해달라고 하자, 이 박사는 오스코텍연구소가 있다고 소개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다

박사후연구원으로 하버드대학에 갈 때까지만 해도 화학자가 꿈이었으나 보스턴에서 생각이 달라졌다. 하버드에서 접한 외부 기관과 인사가 여는 세미나를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사이언스가 너무 높았다. 다른 차원이었다. 제약회사가 여는 세미나를 보고 ‘개벽’, 즉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신약 개발하는 과학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2003년 다국적 제약업체 노바티스에 들어갔다. 보스턴에 있는 노바티스 바이오메디컬 연구소에서 항생제 신약 연구를 시작했다. 이 박사는 얼마 전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았다고 말했다. 영국 록그룹 퀸의 보컬인 프레디 머큐리의 전기와 같은 영화다. 프레디 머큐리는 AIDS로 1991년 사망했다. 이 박사는 “요즘은 에이즈로 죽는 사람이 없다. 요즘은 거의 완치 단계다. 과학이 병을 정복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항생제는 이와 다르다. 이 박사는 “항생제는 너무 어렵다. 박테리아의 진화 속도를 과학이 따라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10년 걸려 신약을 개발해놓으면 불과 1년 뒤 내성을 갖고 있는 박테리아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100만마리 박테리아 중 99만9990마리를 죽였다고 하자. 그런데 살아남은 10마리가 다시 신약에 저항력을 가지고 번성한다. 신약을 무력화시킨다. 결국 사이언스가 박테리아를 못 따라간다.

항생제 개발을 위한 박테리아를 공략법에 대해 좀더 설명을 들어보면 이렇다. 이 박사는 ‘박테리아’와 ‘사람 세포’ 간의 차이가 있다고 했다. 박테리아는 ‘원핵세포’이고, 사람의 세포는 ‘진핵세포’이다. 가령 원핵세포에는 세포벽과 세포핵이 없다. 이 박사는 “사람 세포에는 없고, 박테리아의 원핵세포에만 있는 걸 공격하면 된다”고 말했다. 박테리아는 단백질을 합성할 때 메티오닌이라는 아미노산에서 시작한다. 메티오닌에 포밀(formyl)을 붙어 단백질을 만든다. 포밀을 붙이는 과정과 떼내는 건, 박테리아와 같은 원핵세포에만 있다. 이걸 막는다면 박테리아를 잡을 수 있다. 실제로 박테리아를 이렇게 공략했다. 그러나 문제는 박테리아가 그 과정 없이도 살아가는 방법을 빨리 찾아냈다는 것이다. 항생제 개발에 두 손을 들고 만 건 이 때문이다.

박테리아 중에서도 진짜 무서운 건 수퍼박테리아라고 불리는 녀석들이다. 그의 말을 듣다 보니 ‘일상에서 이런 박테리아가 만연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일반적으로 박테리아는 페니실린과 같은 약으로 잡을 수 있다고 했지만 수퍼박테리아는 꼭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럼 수퍼박테리아는 어디에 있나. 그에 따르면 수퍼박테리아가 잠복해 있는 대표적인 곳은 병원이다. 병원에 수퍼박테리아가 살고 있고, 병원에서 감염될 수 있어 병원이 위험하다는 얘기였다. 많이 접한 내용이지만 전문가의 설명을 들으니 새삼 병원이 위험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민가방 들고 한국으로

그는 노바티스에서 2003~2008년까지 5년 일했으나 박테리아와의 전쟁에서 패했다. 노바티스는 결국 2017년 항생제를 연구하는 조직을 없애버렸다고 한다. 연구자가 100명이 넘는 조직이었다. 다국적 제약업체인 GSK(글락소스미스클라인)도 항생제 개발 그룹을 없앴다고 했다. 이 박사는 “전 세계 제약그룹이 항생제 그룹 문을 닫았다고 보면 된다. 빌게이츠재단과 벤처기업만 항생제 연구를 한다. 항생제를 개발하기 위한 사이언스가 벽에 부딪혔다”고 말했다.

이광호 박사 역시 ‘항생제’를 포기하고 ‘항암제’에서 새로운 길을 찾았다. 보스턴의 집에서 멀지 않은 벤처 제약회사 애빌라(Avila Therapeutics)로 2008년에 옮기면서였다. 그리고 1년간의 단독 연구 끝에 애빌라에서 폐암 치료제 로실레티닙(Rociletinib co-1686)을 발명했다. 이 박사는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방점”이라고 당시를 돌아봤다.

애빌라에서 폐암 치료제를 연구하면서 노바티스에서의 고생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시행착오를 많이 줄일 수 있었다. 애빌라는 이 박사의 물질 특허를 2억900만달러를 받고 클로비스 온콜로지라는 신약 개발 전문 바이오벤처에 넘겼다. 이 업체는 임상실험에 들어갔는데 당시 시장에 비슷한 종류의 폐암 치료제가 없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이 박사가 만든 특허물질을 빨리 임상실험을 진행해야 하는 신약 후보(Breakthrough Therapy designation)로 지정했다. 가능한 빨리 약효를 확인해서 이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환자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끝까지 갔으면 좋았을 텐데, 속상하다. 임상의 최종단계인 3상까지 갔으나 비교 약물과의 경쟁에서 죽었다. 제약산업은 승자독식이다. 같은 효능이면 하나만 살아남는다. 제일 좋은 약을 의사가 쓰기 때문이다.”

이광호 박사는 미국에서 자신이 개발한 신물질이 임상실험에 들어갈 당시 한국에 있었다. 1997년부터의 미국 생활을 접고 2011년 한국화학연구원에 들어갔다. 당시 화학연구원 원장이 기관의 신약 개발 연구 능력을 향상시키려는 의지를 갖고 있어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귀국을 결정했다.

이민가방 두 개를 들고 대전 화학연구원에 첫 출근했다. 가을 화학연 캠퍼스는 아름다웠다. 갑자기 한국에 들어왔으나 화학연구원이 맘에 들었다. 취재를 위해 찾아간 날도 만추를 맞은 화학연 캠퍼스는 아름다웠다.

화학연구원은 기초연구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약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과학’은 밖에서 찾았다. 그는 병원에서 일하는 생물학자와 의학자를 찾아갔다. 이후 공동연구에 성공해 궤양성대장염 치료물질 BBT-401을 개발, NRDO업체인 브리지바이오에 2015년 기술을 판매했다. NRDO기업은 직접 신물질을 개발하지 않고, 외부에서 연구한 걸 사온다. 이를 상업화하거나 기술이전하며, BT분야에 생겨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다. 혈액암 치료제인 BET저해제를 개발해 역시 2015년에 동화약품에 판매했다. 유방암 치료제인 DRAK2저해제를 발명, 항암제 개발 전문업체 매트팩토에 기술이전도 했다. 최근에는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의 의학자 조병철 박사와 기존 폐암약에 저항하는 4세대 돌연변이(EGFR C7975) 치료제를 개발했다. 의학자는 돌연변이 메커니즘을 연구하고, 이광호 박사는 새로운 화합물을 개발했다.

이 중 BBT-401은 지난 3월 미국에서 임상에 돌입했고, 12월에 임상 2a상에 들어갈 예정이다. 브리지바이오는 대전 화학연구원에서 지난 10월 ‘미국 임상1상 완료 기념행사’를 연 바 있다. BBT-401은 이광호 박사가 주도한 신약발굴중개연구기관(TREND) 프로젝트의 첫 산물이기도 하다. TREND 연구는 한국 제약산업이 선진국을 따라가는데서 벗어나, 해당 분야에서 경쟁자가 없는(first-in-class) 신약 개발을 하는 걸 지원하기 위해 한국화학연구원이 과기부의 지원을 받아 2012년 시작했다. 얼마 전 프로그램이 끝났다.

이 박사는 앞으로 뭘 할 거냐는 질문에 “요즘 백수”라고 말했다. TREND 프로젝트가 끝났으나 후속 프로젝트가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인생 5막에 대한 기대도 있다고 했다. 부산에서 고교까지 다녔던 시절(1막), 서울에서의 대학과 직장 시절(2막), 미국에서의 15년(3막), 그리고 2011년 이후 화학연구원에서의 생활(4막), 그 다음 단계를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50대 초반인 그는 인생 5막은 언제 어디가 될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미국, 상하이, 태국, 스위스 바젤?” 그의 그림은 한국 안에 머무르지 않고, 무대가 넓어 보였다. 신약 개발하는 화학자가 선택할 공간이 크다는 걸로 들렸다.

최준석 선임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